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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우(趙相愚)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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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자직(子直)
호(號)동강(東岡)
시호(諡號)효헌(孝憲)
생년1640(인조 18)
졸년1718(숙종 44)
시대조선중기
본관풍양(豊壤)
활동분야문신 > 문신
조형(趙珩)

[상세내용]

조상우(趙相愚)
1640년(인조 18)∼1718년(숙종 4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자직(子直), 호는 동강(東岡). 예조판서 조형(趙珩)의 아들이다.

이경석(李景奭)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657년(효종 8) 사마시에 합격한 뒤 송준길(宋浚吉)의 문인이 되었다.

1672년(현종 13) 익위사세마에 임명되었으며, 숙종이 즉위한 뒤 사축서별제(司畜署別提)가 되었다가 연천현감으로 나갔으나, 1675년(숙종 1) 송준길이 추삭될 때 동문 홍득우(洪得禹) 등과 반대하는 소를 올려 남평(南平)에 유배당한 뒤 이듬해 풀려났다. 호조좌랑을 거쳐 태인현감으로 나갔다.

1682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1684년 지평이 되었으나, 집의 이굉(李宏)을 논죄하였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체직되었다.

그뒤 훈국도감종사관서학교수병조정랑이 되고, 호남암행어사로 나갔다가 홍문관부교리를 거쳐 이조좌랑이 되어서는 궁방에 대한 절수(折受)를 취소하고 호서의 첩가미(帖價米)를 탕감할 것을 건의하여 받아들여졌다. 의정부사인을 거쳐 부응교가 되어서는 외척을 견제하다 처벌받은 홍치중(洪致中)을 두호하고 경연을 자주 열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평안감사 윤계(尹堦)황해감사 임규(任奎)의 잘못을 공격하였으나, 태인현감 때의 잘못을 지적당하여 양주 쌍수역(雙樹驛)에 유배되었다가 대신들의 두둔으로 풀려났다.

1689년 이후 사도시정홍주목사사성종부시정좌통례서산군수 등을 역임하고, 1694년 강계부사가 되었으며, 그해의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한 뒤 남구만(南九萬)의 천거를 받아 특명으로 내직에 들어와 예조참의대사간동부승지 등을 지냈다.

당시 유배자들을 석방하는 작업에 참여하였고, 옥사의 심리를 빨리하고 군포로 인한 침학행위를 없앨 것을 주장하였다. 이어 대사성부제학 겸 비변사부제조를 거쳐 개성유수에 발탁되었으나 가마에 대한 금령을 어겨 추삭되었다가, 대사간이 되어 양전을 바로 하고 군역을 균등히 할 것을 건의하였다.

도승지호조참판동지의금부사를 거쳐 부제학이 되어서는 궁궐생활의 절검을 강조하고 의관을 보내 민간의 환자를 치료할 것 등을 건의하였으며, 단종의 부묘에 왕이 친림하는 것에 반대하다가 파직당하였으나 홍문관의 건의로 용서받았다.

경기감사에 임명되어 민폐와 변통책을 올렸으며, 1700년 이조참판이 되어서는 서북지방의 인재등용책을 건의하였다. 형조예조참판을 거쳐 형조판서에 임명되었으며, 후궁 장씨(張氏)를 사사할 때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

우참찬대사헌지중추부사 겸 도총관이 되어 중국에 사신으로 가던 중 예조판서좌부빈객이 되었고, 좌참찬으로 옮겼다. 한때 오도일(吳道一)을 두둔한다는 이유로 영의정 신완(申琓) 등으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하였으나, 우빈객한성부판윤비변사당상을 거쳐 1706년 판의금부사병조판서가 되었다.

이후 1708년까지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1709년 기로소에 들어갔다.

이듬해 내의원제조를 맡고 있을 때 최석정(崔錫鼎)서종태(徐宗泰)의 분란에 휩쓸려 파직당하였다. 이어 유득일(兪得一)정호(鄭澔)의 공격을 받아 삭탈관직당하였다가 풀려나 판돈녕부사가 되었고, 1711년 예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이 되어 호포법이 논의될 때 명분을 유지함으로써 사회를 안정시켜야 한다는 뜻에서 사대부에 대한 군포징수를 반대하였다.

정승으로 있을 때 당론의 폐단을 없애려고 노력하였으며, 1717년 세자 대리청정의 명령이 내렸을 때에는 판중추부사로 있으면서 반대하는 소를 올리는 등 남구만최석정 등과 함께 온건한 소론으로서 정치활동을 하였다.

또한, 오랜 기간 관직에 있으면서 부세제도‧형사제도‧예론을 비롯한 국정 전반에 대한 건의를 많이 하였다.

글씨를 잘 써서 장렬왕후(莊烈王后)의 옥책문을 쓰는 데 선발되었고, 충현서원(忠賢書院)의 사적비 등을 남겼다. 남평용강사(龍岡祠)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효헌(孝憲)이다.

[참고문헌]

顯宗實錄
肅宗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집필자]

오수창(吳洙彰)

명 : "상우(相愚)"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國朝捷錄v01字叔章號鶴岩豊壤人相愚從孫辛亥拜左都事仁壽子文忠公文谷孫壻兼五營大將庚申生號凝庵
親鞠日記v3上曰其言必有隐情更加究問可也○徐文裕告改杖○趙相愚告改杖○文裕告改杖○相愚告改杖○文裕告改杖○相愚告罪人準杖○文裕告罪人解縛○李東郁告罪人捧考音又告着枷○晩成進推案文書承傳色出受
親鞠日記v3上出御帳殿錫鼎進曰問目下款依傳敎添入合符故稟定後更問之意敢達上曰唯錫鼎曰判義禁進讀問目于上前宜矣相愚進前讀過問目一遍
親鞠日記v3上曰其言必有隐情更加究問可也○徐文裕告改杖○趙相愚告改杖○文裕告改杖○相愚告改杖○文裕告改杖○相愚告罪人準杖○文裕告罪人解縛○李東郁告罪人捧考音又告着枷○晩成進推案文書承傳色
親鞠日記v3上曰情狀顯著而如是欺諱極可痛惡箇箇嚴刑可也○相愚告罪人準杖○崔錫鼎進曰罪人旣已準杖當爲加刑而後考音辭緣與前招內無加減則亦有添入問目之規以此添入別傳敎
親鞠日記v3上曰今番則予當鞫問矣相愚告罪人上之○問事郞廳趙泰億讀宣問目
親鞠日記v3上曰終始不可牢諱各別嚴刑期於得情相愚告罪人加刑
親鞠日記v3上曰所謂有悟者何事耶旣發言端仔細問之可也相愚告改杖○文裕告改杖○
親鞠日記v3而以不爲請拿等語肆然驅之於惡逆之科是何意耶此非誣告而何以此問之○相愚告改杖○文裕告改杖○弼星告改杖○相愚告改杖○東郁告改杖
親鞠日記v3上曰罪人拿入極爲遲緩事甚駭異從重推考可也文裕告罪人解枷○相愚告罪人捧加刑考音又告罪人讀聽問月○問事郞廳鄭栻於罪人處讀宣問目
親鞠日記v3渠雖陰凶亦可知大臣非逆則不入鞫廳之規而以不爲請拿等語肆然驅之於惡逆之科是何意耶此非誣告而何以此問之○相愚告改杖○文裕告改杖○弼星告改杖○相愚告改杖○東郁告改杖
親鞠日記v3上曰其言每多反復極可痛惡矣○徐文裕告改杖○相愚告改杖○東郁告改杖
親鞠日記v3上曰都事先爲發遣擧條則追後捧之可也晩成遂書二罪人名出授趙相愚相愚呼禁府都事授之○南弼星告罪人下之晩成進推案文書承傳色出受進于上前
親鞠日記v3上曰罪人徑斃可慮問目中撮其緊語嚴加究問○相愚告改杖○文裕告改杖○弼星告改杖
親鞠日記v3上曰罪人云何耶○東郁告改杖○相愚告罪人準杖又告罪人解縛
國朝人物志v3字子直號東岡豐壤人判中樞府事珩子從同春宋浚吉受學乙卯同春被追削相愚與同門疏辨坐謫丁酉進士肅宗壬戌文科歷副提學辛卯拜右議政時久旱是日甘雨沛然都民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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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