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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석(李景奭)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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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상보(尙輔)
호(號)백헌(白軒)
시호(諡號)문충(文忠)
생년1595(선조 28)
졸년1671(현종 12)
시대조선중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유간(李惟侃)
저서『백헌집』

[상세내용]

이경석(李景奭)
1595년(선조 28)∼1671년(현종 1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상보(尙輔), 호는 백헌(白軒).
1. 가계
종실 덕천군(德泉君)의 6대손이며, 동지중추부사 이유간(李惟侃)의 아들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1613년(광해군 5) 진사가 되고 1617년 증광별시에 급제하였으나, 이듬해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비상소에 가담하지 않아 삭적(削籍)되고 말았다.
2. 관직
그뒤 1623년 인조반정이 있은 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를 시작으로 선비의 청직으로 일컫는 검열봉교로 승진하였고 동시에 춘추관사관(春秋館史官)도 겸임하였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으로 인조공주로 몽진을 하게 되자 승문원주서로 왕을 호종하여 조정의 신임을 두텁게 하였다. 이어 봉교전적예조좌랑정언교리 등을 두루 거친 뒤 1626년(인조 4)에는 호당(湖堂)에 선입(選入)되었다.

또한, 같은해말에는 이조좌랑이조정랑에 올라 인사행정의 실무를 맡게 되었다.

이듬해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체찰사 장면(張晩)종사관(從事官)이 되어 강원도 군사모집과 군량미조달에 힘썼다.

이때에 쓴 「격강원도사부부로서(檄江原道士夫父老書)」는 특히 명문으로 칭송되었다. 정묘호란 후 다시 이조정랑 등을 거쳐 승지에 올라 인조를 측근에서 보필하였다.

1629년 자청하여 양주목사로 나가 목민관으로서의 실적을 올렸다.

그뒤 승지를 거쳐 1632년에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대사간에 제수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대사헌부제학에 연배되어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이듬해 인조가 항복하고 산성을 나온 뒤에는 도승지에 발탁되고, 예문관제학을 겸임, 「삼전도비문(三田渡碑文)」을 찬진하였다.

이듬해 문관으로서는 최대의 영예인 홍문관예문관 양관의 대제학이 되었고, 얼마 뒤 이조참판을 거쳐 이조판서에 발탁되어 조정인사를 주관하게 되었다.

1641년에는 청나라에 볼모로 가 있던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이사(貳師)가 되어 심양으로 가 현지에서 어려운 대청외교(對淸外交)를 풀어나갔다.

그러나 이듬해 엄금하던 명나라 선박이 선천에 들어온 일이 청나라에 알려지자, 그 사건의 전말을 사문(查問)하라는 청제(淸帝)의 명을 받고 서북지역으로 돌아왔으나 조선의 관련사실을 두둔하느라 청제의 노여움을 사 영부조용(永不調用)의 조건으로 귀국, 3년 동안 벼슬에서 물러났다.

1644년에 복직,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좌의정을 역임한 뒤 이듬해 마침내 영의정에 올라 국정을 총리하였다.
3. 사문사건
그러나 1650년에 효종의 북벌계획이 이언표(李彦標) 등의 밀고로 청나라에 알려짐으로써 사문사건(查問事件)이 일어나게 되었다. 청나라사문사남별궁(南別宮)에서 영의정 이경석정승판서 및 양사의 중신 등을 모두 세워놓고 북벌계획의 전말을 사문, 치죄하고자 하여 조정은 큰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국왕을 비호하고 기타 관련자들까지 두둔하면서 모든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림으로써 국왕과 조정의 위급을 면하게 하였다. 이에 청나라 사신들로부터 ‘대국을 기만한 죄’로 몰려 극형에 처하게 되었으나 국왕이 구명을 간청하여 겨우 목숨만을 부지, 청제의 명에 의하여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위리안치되고, 이어 다시 영부조용의 명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나 1년 남짓 광주(廣州)판교(板橋)석문(石門)에서 은거하였다.

그러다가 1653년(효종 4)에 겨우 풀려나 영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며, 1659년에는 영돈녕부사가 된 뒤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1668년(현종 9) 인신(人臣)으로는 세기적 영예인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4. 학문
평생 『소학』『논어』를 거울삼아 수양하였고, 노년에는 『근사록』과 주자제서(朱子諸書)를 탐독하였다. 문장과 글씨에 특히 뛰어났는데 그의 시문은 경학(經學)에 근본한 것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문장은 “기력(氣力)이 웅혼(雄渾)하여 광화현란(光華絢爛)하며, 시도 활동양염(活動穰豔)하다. ”는 칭송을 받을 만큼 필력이 뛰어나 「삼전도비문」 등을 찬술하기도 하였다.

그의 정치적 생애는 17세기의 초기‧중기에 해당하는 인조효종현종의 3대 50년에 걸쳐 시국의 안팎으로 얽힌 난국을 적절하게 주관한 명상(名相)으로 보냈다. 그 자신이 지양하려던 의도와는 달리 생애 말년에는 차츰 당쟁 속에 깊이 말려들어가, 사후에는 심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백헌집』 등 유집 50여권이 간행되었고, 조경(趙絅)조익(趙翼) 등과 함께 『장릉지장(長陵誌狀)』을 편찬하였다. 글로는 「삼전도비문」이 있으며, 글씨로는 좌상이정귀비문(左相李廷龜碑文)‧이판이명한비(吏判李明漢碑)‧지돈녕정광성비문(知敦寧鄭廣成碑文) 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남원방산서원(方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孝宗實錄
顯宗實錄
白軒集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李景奭의 政治的 生涯와 三田渡碑文是非(李銀順, 韓國史硏究 60, 1988. 3.)

[집필자]

김성준(金成俊)

명 : "경석(景奭)"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紀年便攷v26宣教宣醖賜一等樂景奭時年七十四筵臣引故文忠公李元翼賜凡杖文正公金尙憲賜肩輿之例請施優老之典也
紀年便攷v26田碑文其所称道實有愧人心者然其立朝清白庚寅一事為足可称故金尙憲諸賢皆與之友善而時烈䟽末有曰孫従臣云云景奭大怒以時烈䟽示宋浚吉浚吉亦不勝駭歎
紀年便攷v26造門景奭必待以下士之禮及孝廟新服又首請招俫擬共國事時烈名位既崇而敬重尊尙之意每見於辭氣書牘之間至是以景奭劄中納履等語誤認指已而發乃上一䟽至引孫覿事極意醜詆盖景奭昔作三田碑文其所称道實有愧人心者然其立朝清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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紀年便攷v26者行身無忕乃反為其人所非則其為象人之鄙笑何如哉今臣所遭不幸近是矣時時烈適有嫌不敢冒進行在只出次全義聞景奭之劄乃有此䟽初時烈名重一世景奭自仁祖朝屡薦請召致時烈亦入都以布衣草履造門景奭必待以下士之禮及孝廟新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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紀年便攷v26不敢冒進行在只出次全義聞景奭之劄乃有此䟽初時烈名重一世景奭自仁祖朝屡薦請召致時烈亦入都以布衣草履造門景奭必待以下士之禮及孝廟新服又首請招俫擬共國事時烈名位既崇而敬重尊尙之意每見於辭氣書牘之間至是以景奭劄中
紀年便攷v26景奭家貧饋奠難繼鄭太和奏以宜有優恤有是命大臣喪後給祿始此
東國歷代總目v02淸世祖順治七年淸使來竄相臣李景奭等○金自點子鉽及申冕怨宋浚吉等諸賢流言于淸淸主遣七使臨江驗問國內震懼景奭引以自當遣宗室女嫁淸貴臣事稍解又以陵誌不書淸號大提學趙絅被竄諸儒臣退歸淸使復來褫李景輿相職○明年自點
郯述v03景奭侄七十一
國朝人物志v3重試壯元歷湖堂文衡丁丑淸人立碑三田徵碑文張維趙希逸文竝不滿彼意咆喝日甚上面命景奭曰句踐不恥臣妾以圖自強今日唯適彼意無或層激景奭承命貽書其兄曰悔學文字壬午淸人拘囚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0-04-03효종실록 3권, 1650년 3월 13일조를 참고하여 사문사건이 일어난 해를 1646에서 1650으로 고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