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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직(李景稷)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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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상고(尙古)
호(號)석문(石門)
시호(諡號)효민(孝敏)
생년1577(선조 10)
졸년1640(인조 18)
시대조선중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유간(李惟侃)

[상세내용]

이경직(李景稷)
1577년(선조 10)∼1640년(인조 1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상고(尙古), 호는 석문(石門). 정종의 8대손이며, 동지중추부사 이유간(李惟侃)의 아들이다.

이항복(李恒福)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01년(선조 34)에 사마시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고, 1605년에 전시(殿試)에 합격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에 올랐다. 이후 1609년(광해군 1)에 승문원주서시강원설서, 1610년에 홍문관정자봉교, 이듬해에 전적호조좌랑수찬병조좌랑지제교 등을 역임하였다.

1613년 병조정랑으로 승진하였으나 이이첨(李爾瞻)이 득세하여, 이른바 계축옥사를 도모하자 이에 연루된 서성(徐渻)과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수성찰방(輸城察訪)으로 나갔다가 파직되었다.

그뒤 황해도도사로 복직되고, 다시 병조정랑이 되어 접반관(接伴官)진휼종사관(賑恤從事官)평안도경차관(平安道敬差官) 등을 겸하였다.

1617년에는 오상윤(吳相允)과 같이 일본회답사(回答使)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1618년 폐모론이 일어났을 때, 이에 반대하여 사직하고, 약 5년여를 고향에 내려가 지냈다. 이후 1622년 명장(明將) 모문룡(毛文龍)가도(椵島)에 주둔하자 그는 백의종군하였으며, 곧이어 철산부사가 되어 모문룡의 신임을 얻었고, 인조반정 이후 형조참의의주부윤이 되었다.

또한,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전라도절도사여산(礪山)으로 달려가 병사들을 모으고 난군 진압에 힘썼으며, 그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품계가 오르면서 수원부사가 되었다.

1626년(인조 4)에 부총관장례원판결사를 거쳐 병조참판동지의금부사도체찰찬획사(都體察贊畵使)비변사유사가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는 병조참판으로 왕을 강화도에서 호종하고 강화가 성립될 때 접반사로 활약, 환도 이후 호조참판이 되었다.

1629년 도체찰부사(都體察副事)로서 모문룡의 병기(兵機)를 파악하기에 노력하였으며, 호조참판경기도관찰사를 거쳐 1634년 도승지가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부호군으로 비변사당상을 겸하여 남한산성으로 왕을 호종하였고, 화의가 성립된 뒤 호조판서가 되었으나 영의정 김류(金瑬)와의 불화로 일시 정직되었다가 다시 도승지강릉부사동지중추부사경도총관을 거쳐, 1640년에 강화유수로 있다가 병으로 죽었다.

관료로서 재주가 있고 품위가 준수하였으며, 특히 사부(詞賦)와 글씨가 뛰어났다.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효민(孝敏)이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집필자]

박정자(朴定子)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