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徐渻)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C11CC131FFFFB1558X0 |
자(字) | 현기(玄紀) |
호(號) | 약봉(藥峰) |
시호(諡號) | 충숙(忠肅) |
생년 | 1558(명종 13) |
졸년 | 1631(인조 9)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대구(大丘)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서해(徐嶰) |
저서 | 『약봉집(藥峰集)』 |
[상세내용]
서성(徐渻)
1558년(명종 13)∼1631년(인조 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현기(玄紀), 호는 약봉(藥峰).
대제학 서거정(徐居正)의 현손으로, 서해(徐嶰)의 아들이다. 이이(李珥)‧송익필(宋翼弼)의 문인이다.
1586년(선조 19)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권지성균학유(權知成均學諭)가 되었다.
이어 인천부교수(仁川府敎授)‧검열‧대교(待敎)‧봉교(奉敎)‧전적을 거쳐, 감찰과 예조좌랑을 지냈다. 병조좌랑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하다가 호소사(號召使) 황정욱(黃廷彧)의 요청으로 그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함경도로 길을 바꾸었다가 국경인(鞠景仁)에 의하여 임해군(臨海君)‧순화군(順和君)‧황정욱 등과 함께 결박되어 가토(加藤淸正)에게 가게 되었으나 탈출하였다.
왕의 명령으로 행재소에 이르러 지평‧병조정랑‧직강(直講)을 역임하고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을 접대하였다. 다시 지평과 직강을 거쳐 삼남지역(三南地域)에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민정을 살피고 돌아온 뒤 전수(戰守)의 계책을 아뢰었다. 이로 인하여 제용감정(濟用監正)으로 승진하고, 경상감사에 발탁되었으나 대간의 반대로 내섬시정(內贍寺正)으로 바뀌었다.
그뒤 경상우도감사로 내려가 삼가(三嘉) 악견산성(嶽堅山城)을 수리하고 민심을 진정시켰다. 이어 동부승지‧병조참의‧비변사유사당상(備邊司有司堂上)‧승문원부제조(承文院副提調)를 겸하였다. 다시 병조참의‧도승지‧황해감사‧함경감사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있다가 평안감사로 나아가 당시 평양의 아전들의 환심을 얻었다.
이어 도승지가 되어 경연에서 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을 신구(伸救)하고, 성혼(成渾)과 정철(鄭澈)을 헐뜯는 정인홍(鄭仁弘) 일파를 배척하다가 왕의 미움을 받았다.
이어 판윤(判尹)으로 비변사와 훈련도감의 제조를 겸하고, 형조판서‧병조판서‧지중추부사를 거쳐 함경감사로 나갔다. 다시 호조판서로 지의금부사를 겸하다가 경기감사가 되고, 그뒤 우참찬을 거쳐 개성유수가 되었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이에 연루되어 단양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영해와 원주 등지로 옮겨지는 등 11년간이나 귀양살이를 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방환되었다.
이어 형조판서‧대사헌‧경연성균관사를 겸하고,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호종하고 판중추부사‧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도 왕을 강화도까지 호종하였고,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승격하였다.
학문을 즐겨 이인기(李麟奇)‧이호민(李好閔)‧이귀(李貴) 등과 남지기로회(南池耆老會)를 조직하여 역학(易學)을 토론하였고, 서화(書畵)에도 뛰어났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대구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약봉집(藥峰集)』이 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대제학 서거정(徐居正)의 현손으로, 서해(徐嶰)의 아들이다. 이이(李珥)‧송익필(宋翼弼)의 문인이다.
1586년(선조 19)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권지성균학유(權知成均學諭)가 되었다.
이어 인천부교수(仁川府敎授)‧검열‧대교(待敎)‧봉교(奉敎)‧전적을 거쳐, 감찰과 예조좌랑을 지냈다. 병조좌랑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하다가 호소사(號召使) 황정욱(黃廷彧)의 요청으로 그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함경도로 길을 바꾸었다가 국경인(鞠景仁)에 의하여 임해군(臨海君)‧순화군(順和君)‧황정욱 등과 함께 결박되어 가토(加藤淸正)에게 가게 되었으나 탈출하였다.
왕의 명령으로 행재소에 이르러 지평‧병조정랑‧직강(直講)을 역임하고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을 접대하였다. 다시 지평과 직강을 거쳐 삼남지역(三南地域)에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민정을 살피고 돌아온 뒤 전수(戰守)의 계책을 아뢰었다. 이로 인하여 제용감정(濟用監正)으로 승진하고, 경상감사에 발탁되었으나 대간의 반대로 내섬시정(內贍寺正)으로 바뀌었다.
그뒤 경상우도감사로 내려가 삼가(三嘉) 악견산성(嶽堅山城)을 수리하고 민심을 진정시켰다. 이어 동부승지‧병조참의‧비변사유사당상(備邊司有司堂上)‧승문원부제조(承文院副提調)를 겸하였다. 다시 병조참의‧도승지‧황해감사‧함경감사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있다가 평안감사로 나아가 당시 평양의 아전들의 환심을 얻었다.
이어 도승지가 되어 경연에서 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을 신구(伸救)하고, 성혼(成渾)과 정철(鄭澈)을 헐뜯는 정인홍(鄭仁弘) 일파를 배척하다가 왕의 미움을 받았다.
이어 판윤(判尹)으로 비변사와 훈련도감의 제조를 겸하고, 형조판서‧병조판서‧지중추부사를 거쳐 함경감사로 나갔다. 다시 호조판서로 지의금부사를 겸하다가 경기감사가 되고, 그뒤 우참찬을 거쳐 개성유수가 되었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이에 연루되어 단양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영해와 원주 등지로 옮겨지는 등 11년간이나 귀양살이를 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방환되었다.
이어 형조판서‧대사헌‧경연성균관사를 겸하고,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호종하고 판중추부사‧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도 왕을 강화도까지 호종하였고,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승격하였다.
학문을 즐겨 이인기(李麟奇)‧이호민(李好閔)‧이귀(李貴) 등과 남지기로회(南池耆老會)를 조직하여 역학(易學)을 토론하였고, 서화(書畵)에도 뛰어났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대구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약봉집(藥峰集)』이 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海東名臣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亂中雜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海東名臣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亂中雜錄
[집필자]
이장희(李章熙)
명 : "성(渻)"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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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