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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宣祖)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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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명(初名)이균(李釣)
개명(改名)이연(李昖)
시호(諡號)소경(昭敬)
생년1552(명종 7)
졸년1608(광해군 즉위)
시대조선중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왕실 > 왕
이초(李岹)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의인왕후(懿仁王后)
인목왕후(仁穆王后)
처부박응순(朴應順)
처부김제남(金悌男)
외조부정세호(鄭世虎)
출생지한성(漢城) 인달방(仁達坊)
묘소목릉(穆陵)

[상세내용]

선조(宣祖)
1552년(명종 7)∼1608년(선조 41). 조선 제14대왕. 재위 1568년∼1608년.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이균(李鈞), 뒤에 이연(李昖)으로 개명하였다.
1. 가계와 수업
1552년 11월 11일한성(漢城) 인달방(仁達坊)에서 출생하였다. 중종의 손자이며,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이초(李岹)의 셋째아들이고, 모친은 증영의정(贈領議政) 정세호(鄭世虎)의 딸인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정씨(鄭氏)이다. 비는 박응순(朴應順)의 딸 의인왕후(懿仁王后)이며, 계비는 김제남(金悌男)의 딸 인목왕후(仁穆王后)이다.

명종의 사랑을 받았으며 성장하자 하성군(河城君)에 봉해졌고, 1567년 명종이 후사없이 죽자 즉위하였다. 즉위 초년에 오로지 학문에 정진하여 매일 강연(講筵)에 나가 경사(經史)를 토론하였고, 밤늦도록 독서에 열중하여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를 읽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만년에는 특히 『주역』 읽기를 좋아했다.
2. 치적
훈구세력(勳舊勢力)을 물리치고 사림(士林)들을 대거 등용하였으며, 명유(名儒) 이황(李滉)이이(李珥) 등을 극진한 예우로 대하여 침체된 정국에 활기를 불러일으키고자 힘을 다하였다. 당시 사유(師儒)를 선발함에 문사(文詞)에만 치중하는 경향이 두드러져 있는 데다 관리를 뽑는 데도 오직 과거에 의거하여 선비의 습속이 문장에만 치우치게 되어 이러한 병폐를 없애기 위하여 학행(學行)이 뛰어난 사람을 발탁하여 각 고을을 순행하며 교회(敎誨)에 힘쓰도록 하였 한편, 유일(遺逸)을 천거하도록 하여 징사(徵士) 조식(曺植)성운(成運) 등 유능한 인재는 관계(官階)에 구애받지 않고 초서(超敍)하기도 하였으며, 『유선록(儒先錄)』『근사록(近思錄)』『심경(心經)』『소학』 등 치도(治道)에 관계되는 서적과, 윤기(倫紀)를 부식(扶植)하기 위하여 『삼강행실(三綱行實)』을 짓도록 하고 이것을 모두 간행하여 널리 읽히도록 하였다.

또,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조광조(趙光祖)에게 증직(贈職)하는 등 억울하게 화를 입은 사림들을 신원(伸寃)하고 그들에게 해를 입힌 남곤(南袞) 등의 관작을 추탈하여 민심을 수습하기도 하였으며,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尹任)유관(柳灌) 등을 죽이고 녹훈(錄勳)의 영전(榮典)까지 받았던 이기(李芑)윤원형(尹元衡) 등을 삭훈(削勳)하였다.

또한, 명나라 『대명회전(大明會典)』중국의 역사에 이성계(李成桂)고려의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의 후예라는 그릇된 사실이 선조대까지 200년간이나 전해내려온 것을 윤근수(尹根壽) 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시정하도록 하였다.
3. 당쟁과 국론분열
그러나 선조대에 들어와 정국을 주도하던 사림들이 1575년(선조 8)에 이르러 김효원(金孝元)심의겸(沈義謙)을 각각 중심인물로 하는 당쟁이 시작되어 동인(東人)‧서인(西人)으로 분당되었으며, 정론(政論)이 둘로 갈라져 조정이 시끄러워졌고, 이이의 양파조정에도 별로 효과를 보지 못하다가 1591년 세자책봉문제로 집권한 동인도 서인들에 대한 논죄문제로 남북으로 다시 분열되어 정계는 당쟁에 휘말려 국력은 더욱 쇠약해졌다.
4. 임진왜란 발발
1583년과 1587년 2회에 걸쳐서 이탕개(尼蕩介)가 주동이 된 야인(野人)들이 반란을 일으켜 경원부가 함락되고 부내(府內)의 모든 진보(鎭堡)가 그들의 손에 들어가자 온성부사 신립(申砬)첨사 신상절(申尙節) 등을 시켜 그들을 무너뜨리고 두만강을 건너 그들의 소굴을 소탕시켰다.

1590년 일본의 동태가 수상하여 통신사 황윤길(黃允吉), 부사 김성일(金誠一) 등을 일본에 파견하여 그곳 동향을 살펴오게 하였으나, 다음해 돌아온 두 사람이 서로 상반된 보고를 함으로써 국방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못하고 있던 중, 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부산진을 필두로 각 고을이 무너지고 왜군이 침략한 지 보름 만에 서울도 위급하게 되자 수성(守城)의 계획을 포기하고 개성으로 물러갔다가 적이 한강을 건너 도성이 무너지자 다시 평양으로 퇴각했으며, 임진강의 방어선도 무너지자 의주로 피난하여 고급사(告急使)를 명나라에 보내어 원병을 청하고, 세자 광해군(光海君)으로 하여금 분조(分朝)를 설치하게 하여 의병과 군량을 확보하는 데 열중하도록 하였다.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적의 후방을 위협하였고 무기력하였던 관군도 전력을 가다듬어 각처에서 승첩(勝捷)을 거두고, 바다에서 이순신(李舜臣) 등 우리 수군이 제해권(制海權)을 완전 장악하였고, 명나라 원군이 와서 우리 관군과 함께 빼앗겼던 평양성을 수복하였으며, 권율(權慄)의 행주대첩으로 적의 사기가 꺾여 1593년 4월에 강화를 조건으로 서울에서 철수하여 남으로 퇴각하자 이해 10월 왕이 환도하였다.
5. 전쟁과정
다음해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군사훈련을 강화시키고 투항해온 왜군으로 하여금 조총(鳥銃)쏘는 방법과 탄환 만드는 기술을 관군에게 가르치도록 하였다.

임진왜란 초기에는 왜군을 격퇴하는 것이 급선무였으므로 군공사목(軍功事目)을 규정하여 군공을 세운 자는 신분에 따라 응분의 논공(論功)을 시행하는 등 비상책을 강구하였는데, 전쟁이 장기화되고 명나라 원군이 오랜 기간 머물게 되어 군량미조달이 심각한 국면에 이르게 되자 납속(納粟)을 한 자에게도 납속사목(納粟事目)에 규정한 논공을 설시하도록 하였다. 군공을 세운 자나 납속을 한 자는 논공을 할 때 주로 공명첩(空名帖)이나 실직(實職)을 주었으므로 하층 신분을 가진 자가 양반으로 격상되는 일이 허다하여 조선 후기 신분변화의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임진왜란중에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고 심지어 사람끼리 서로 잡아먹는 일까지 있어 백성들의 생활이 극도에 이르게 되자 매일 왕에게 공급되는 쌀의 양을 줄여서 굶주리는 사람을 진휼하는 데 보태도록 하였으며, 곳곳에 산재한 유해(遺骸)를 수집해서 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올리게끔 하였다.
6. 정유재란
1597년명나라일본간에 진행되던 강화회담이 깨어지고 재차 왜군이 침입하자(丁酉再亂), 또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는 한편 관군의 정비를 촉구하였다. 왜란중에 3궁(三宮)이 소진되고 귀중한 전적(典籍)을 보관한 춘추관(春秋館)이 불타서 귀중도서가 소실된 것을 애석해 하며 각처에 흩어져 있는 서적들을 거두어 모아 운각(芸閣)에 보관하도록 하였으며, 불타서 없어진 문묘(文廟)에 설단(設壇)하고 제사를 드려 전쟁중에도 윤기(倫紀)의 소중함을 대내외에 알렸다 궁궐이 불타서 왕이 정릉동(貞陵洞) 행궁(行宮)에 거처를 정하고 있을 때 실의에 잠긴 선조는 불에 탄 옛 궁궐터에 초가를 얽어 옮기려고 하였으며, 명나라 장수가 왕의 거처가 초라함을 보고 궁궐의 영건(營建)을 권하였으나 왜군의 깊은 원수를 갚기 전에는 지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정유재란 때 우리 수군함대가 부산에 총집결하자 이를 염려하고 병(兵)은 뜻하지 않은 곳에 나올 수 있는 것이니 부산에만 강한 군사를 집결시킬 것이 아니라 호남지역도 소홀해서는 안되며 육지에도 험한 곳에 군대를 배치하는 것이 계책임을 역설하였다는데 그 추측은 들어맞았다.
7. 인품
두 대비 모시기를 친어머니 섬기듯 효도가 지극하였고, 성품이 본디 검소하여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성색(聲色)이나 오락에 괘념하지 않았고, 음식과 의복도 절제하여 비빈이나 궁인들이 감히 사치하지 못하였다. 항상 절용(節用)하고 농민들의 노고를 생각하여 한톨의 낟알을 땅에 떨어뜨리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왜란이 끝난 뒤 1604년에 호성(扈聖)‧선무(宣武)‧청난(淸難) 등의 공신을 녹훈하여 전쟁의 마무리를 짓고 전후복구사업에 힘을 기울였으나, 흉년이 거듭되고 동인‧서인의 당쟁은 더욱 격심해져서 커다란 시련을 받게 되었다. 더욱이, 왕이 죽기 직전에 측근을 불러 적자 영창대군을 보필해달라는 유언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바로 광해군이 즉위하자 영창대군의 수명을 단축하는 결과가 되었다.

서화에 뛰어났는데, 명나라 이여송(李如松)이 그것을 알고 선조의 어필(御筆)을 받기를 청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였다. 능은 목릉(穆陵), 전(殿)은 영모전(永慕殿), 시호는 소경(昭敬)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宣祖修正實錄
燃藜室記述
亂中雜錄
懲毖錄

[집필자]

이장희(李章熙)

능호 : "목릉(穆陵)"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紀年便攷v3議政懿愍公悌男女萬暦十二年甲申宣祖十七年十一月十四日誕降壬寅冊封王妃壬申六月二十八日昇遐誕一男一女 穆陵大王陵左岡甲坐初号惠陵嗣元宗大王儲慶宫敬惠裕德仁嬪金氏誕生序居第五○嬪順康園楊州豊壤里子坐一男永昌大
紀年便攷v3封河城君隆慶元年丁卯七月三日卽位。萬暦三十六年戊申二月朔日昇遐在位四十一年春秋五十七有十四男十一女 穆陵楊州健元陵第二岡壬坐戊申六月初葬 健元陵西岡 仁祖八年庚午移葬于此妃章聖徽烈貞憲敬穆懿仁王后朴氏籍羅
紀年便攷v3籍羅州領敦寧府事潘城府院君贈領議政應順女 明宗十年四月十五日誕降己巳冊封王妃庚子六月二十七日昇遐旡嗣穆陵大王陵左岡壬坐葬初号裕陵繼妃昭聖貞懿明烈正肅光淑莊定仁穆王后金氏籍延安領敦寧府事延興府院君贈領議政懿
紀年便攷v15後改穆陵在大王陵左岡
紀年便攷v15金千祐正刑錄翼社㓛臣許筬䓁○尊中宫爲大妃○冊封㧕氏自新女為王妃○宗廟重建告成壬辰燬至是始重建○六月葬穆陵在掦州後移葬行狀李廷龜撰誌文李山海撰○始行京畿宣惠法大臣李元翼建請行之○李山海尹承勳䓁請廢臨海君爲庶
紀年便攷v17鄭光績麟趾五世孫崇祖玄孫參奉起門子中宗甲辰生字景勳號南坡宣祖癸酉進士己卯登明經科歴翰林銓郞副學穆陵因山後上十漸䟽首勸盡孝道歸卧田廬 仁祖反正後以大憲召官止判中樞入耆社辛未卒年八十八謚翼正兄弟文科兄熙
紀年便攷v23側夙夜不離大臣稱其忠勤乙丑諫選嬪不可謫忠州丙寅放才猷氣㮣有過人者忠樸敢言篤於行誼庚午以原州牧使上䟽言穆陵地不吉且有水氣及其破陵封則了無水氣啓玄宮諸物依舊少無潤濕衆心齊憤至發臺啓答曰有懷必達事君之道罪言者實
紀年便攷v24曰三綱已裂國垂傾公議千秋愧汗靑忍背神宗皇帝德何顔宣祖大王靈寧爲北地王諶死不作東窓賊檜生江上答聲行且哭穆陵殘日照微誠文章節義甚高嘗宰于寧越泛舟錦江聞皇城陷宣帝自縊失聲哭復作詩寓懷翌年乙酉卒年四十一英祖朝以南
紀年便攷v28巳以王子英祖師傳棄官去時烈有後命上章訟寃及仁顕后廢黜遂挈家入泰安士慕其徳名出財力搆成講齋於海門後又拜穆陵参奉辭歸又拜利仁察訪曾為師傳時定講學儀節多輔導之功性仁厚學主實踐尹拯背師之後鐫責不改而始絶之亦不出惡
紀年便攷v29慎景尹尹希復玄孫别坐英健子仁祖甲子生字仲立號明谷孝宗丁酉進士除穆陵參奉以宋浚吉薦超六品拜禁都又拜外任洪命夏李浣俱大穪之顯宗丙午登别試為媢疾者所擊去浮沈州郡十餘年甞有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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