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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李滉){2}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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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경호(景浩)
호(號)퇴도(退陶)
호(號)도수(陶叟)
시호(諡號)문순(文純)
생년1501(연산군 7)
졸년1570(선조 4)
시대조선전기
본관진성(眞城)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식(李埴)
출생지경상도 예안현(禮安縣) 온계리(溫溪里: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 온혜리)

[상세내용]

이황(李滉)
1501년(연산군 7)∼1570년(선조 4).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도(退陶)도수(陶叟).
1. 가계
경상도 예안현(禮安縣) 온계리(溫溪里: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 온혜리)에서 좌찬성 이식(李埴)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생후 7개월에 외간상(外艱喪)을 당하였으나, 후실이었지만 자모(慈母)요 현부인이었던 생모 박씨의 훈도 밑에서 총명한 자질을 키워갔다.

12세에 작은아버지 이우(李堣)로부터 『논어』를 배웠고, 14세경부터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하여, 특히 도연명(陶淵明)의 시를 사랑하고 그 사람됨을 흠모하였다.

20세경 침식을 잊고 『주역』 공부에 몰두한 탓에 건강을 해쳐서 그뒤로부터 다병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한다.
2. 출사와 관직
28세(1528)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33세에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金麟厚)와 교유하고 『심경부주(心經附註)』를 입수하여 크게 심취하였다. 이해 귀향도중 김안국(金安國)을 만나 성인군자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34세(1534)에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부정자가 되면서 관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37세에 내간상(內艱喪)을 당하자 향리에서 3년간 복상하였고, 39세에 홍문관수찬이 되었다가 곧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임명되었다. 중종 말년에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먼저 낙향하는 친우 김인후한양에서 떠나보내고, 이 무렵부터 관계를 떠나 산림에 은퇴할 결의를 굳힌듯, 43세이던 10월에 성균관사성으로 승진하자 성묘를 핑계삼아 사가를 청하여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을사사화 후 병약을 구실삼아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46세(1546)가 되던 해 향토인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의 동암(東巖)에 양진암(養眞庵)을 얽어서 산운야학(山雲野鶴)을 벗삼아 독서에 전념하는 구도생활에 들어갔다. 이때에 토계퇴계(退溪)라 개칭하고,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그뒤에도 자주 임관의 명을 받아 영영 퇴거(退居)해버릴 형편이 아님을 알고 부패하고 문란된 중앙의 관계에서 떠나고 싶어서 외직을 지망, 48세에 충청도 단양군수가 되었으나, 곧 형이 충청감사가 되어 옴을 피하여 임명 전에 청하여 경상도 풍기군수로 전임하였다.

풍기군수 재임중 주자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부흥한 선례를 좇아서, 고려 말기의 주자학의 선구자 안향(安珦)이 공부하던 땅에 전임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扁額)‧서적(書籍)‧학전(學田)을 하사할 것을 감사를 통하여 조정에 청원하여 실현을 보게 되었는데, 이것이 조선사액서원(賜額書院)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1년 후 퇴관하고, 어지러운 정계를 피하여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寒棲庵)을 지어 다시금 구도생활에 침잠하다가 52세(1552)에 성균관대사성의 명을 받아 취임하였다.

56세에 홍문관부제학, 58세에 공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여러 차례 고사하였다. 43세 이후 이때까지 관직을 사퇴하였거나 임관에 응하지 않은 일이 20수회에 이르렀다.

60세(1560)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이라 정하고, 이로부터 7년간 서당에 기거하면서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훈도하였다.

명종은 예(禮)를 두터이하여 자주 그에게 출사(出仕)를 종용하였으나 듣지 않자, 근신들과 함께 ‘초현부지탄(招賢不至嘆)’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도산으로 보내어 그 풍경을 그리게 하여 그것에다 송인(宋寅)으로 하여금 도산기(陶山記) 및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써넣게 하여 병풍을 만들어서, 그것을 통하여 조석으로 이황을 흠모하였다 한다.

그뒤 친정(親政)의 기회를 얻자, 이황자헌대부(資憲大夫)공조판서대제학이라는 현직(顯職)에 임명하여 자주 초빙하였으나, 그는 그때마다 고사하고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67세 때 명나라 신제(新帝)의 사절이 오게 되매, 조정에서 이황의 내경(來京)을 간절히 바라 그도 어쩔 수 없이 한양으로 갔다. 명종이 돌연 죽고 선조가 즉위하여 그를 부왕의 행장수찬청당상경(行狀修撰廳堂上卿)예조판서에 임명하였으나 신병 때문에 부득이 귀향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황의 성망(聲望)은 조야에 높아, 선조는 그를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우찬성에 임명하여 간절히 초빙하였고, 그는 사퇴하였지만 여러차례의 돈독한 소명을 물리치기 어려워 마침내 68세의 노령에 대제학지경연(知經筵)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를 올렸다. 선조는 이 소를 천고의 격언, 당금의 급무로서 한 순간도 잊지 않을 것을 맹약하였다 한다.

그뒤 이황선조에게 정자(程子)의 「사잠(四箴)」, 『논어집주』『주역』, 장재(張載)의 「서명(西銘)」 등의 온오(蘊奧)를 진강하였다.

노환 때문에 여러차례 사직을 청원하면서 왕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서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저술, 어린 국왕 선조에게 바쳤다.

이듬해 69세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번번히 환고향(還故鄕)을 간청하여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환향 후 학구(學究)에 전심하였으나, 다음해 70세가 되던 11월 종가의 시제 때 무리를 해서인지 우환이 악화되었다. 그달 8일 아침, 평소에 사랑하던 매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키고, 일으켜 달라 하여 단정히 앉은 자세로 역책(易簀: 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하였다.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폐하여 애도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 영사를 추증하였고, 장사는 제일등 영의정의 예에 의하여 집행되었으나, 산소에는 유계(遺誡)대로 소자연석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새긴 묘비가 세워졌을 뿐이었다.

죽은지 4년 만에 고향사람들이 도산서당 뒤에 서원을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낙성, 도산서원의 사액을 받았다. 그 이듬해 2월에 위패를 모셨고, 11월에는 문순(文純)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3. 학문
이황『주자대전』을 입수한 것은 중종 38년, 즉 그의 43세 때였고, 이 『주자대전』명나라 가정간본(嘉靖刊本)의 복각본(復刻本)이었으며, 가정간본의 대본(臺本)은 송나라 때 간행된 것을 명나라 때 복간한 성화간본(成化刊本)의 수보본(修補本)이었지만, 그가 『주자대전』을 미독(味讀)하기 시작한 것은 풍기군수를 사퇴한 49세 이후의 일이었다.

이황은 이에 앞서 이미 『심경부주』『태극도설』『주역』『논어집주』 등의 공부에 의하여 주자학의 대강을 이해하고 있었으나, 『주자대전』을 완미(玩味)함으로써 그의 학문이 한결 심화되었고, 마침내 주자의 서한문의 초록과 주해에 힘을 기울였는데, 그의 학문이 원숙하기 시작한 것은 50세 이후부터였다고 생각된다.

50세 이후의 학구활동 가운데서 주요한 것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53세에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설(天命圖說)」을 개정하고 후서(後敍)를 썼고, 또한 『연평답문(延平答問)』을 교정하고 후어(後語)를 지었다.

54세에 노수신(盧守愼)의 「숙흥야매잠주(夙興夜寐箴註)」에 관하여 논술하였다.

56세에 향약을 기초, 57세에 『역학계몽전의(易學啓蒙傳疑)』를 완성, 58세에 『주자서절요』『자성록』을 거의 완결지어 그 서(序)를 썼다.

59세에 황중거(黃仲擧)에 답하여 『백록동규집해(白鹿洞規集解)』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또한 기대승(奇大升)과 더불어 사단칠정에 관한 질의응답을 하였고, 61세에 이언적(李彦迪)『태극문변(太極問辨)』을 읽고 크게 감동하였다.

62세에 『전도수언(傳道粹言)』을 교정하고 발문을 썼으며, 63세에 『송원이학통록(宋元理學通錄)』의 초고를 탈고하여 그 서(序)를 썼다.

64세에 이연방(李蓮坊)의 심무체용론(心無體用論)을 논박하였고, 66세에 이언적의 유고를 정리, 행장을 썼고 『심경후론(心經後論)』을 지었다.

68세에 선조에게 「무진육조소」를 상서하였으며, 「사잠」‧『논어집주』『주역』‧「서명」 등을 강의하였다.

또한 그간 학구의 만년의 결정체인 『성학십도』를 저작하여 왕에게 헌상하였다. 「무진육조소」의 내용은, 제1조 계통을 중히 여겨 백부인 선제(先帝) 명종에게 인효(仁孝)를 온전히 할 것, 제2조 시신(侍臣)‧궁인의 참언(讖言)‧간언(間言)을 두절하게 하여 명종궁(明宗宮)과 선조궁(宣祖宮) 사이에 친교가 이루어지게 할 것, 제3조 성학(聖學)을 돈독히 존숭하여 그것을 가지고 정치의 근본을 정립할 것, 제4조 인군(人君) 스스로가 모범적으로 도술(道術)을 밝힘으로써 인심을 광정(匡正)할 것, 제5조 군주가 대신에게 진심을 다하여 접하고 대간(臺諫)을 잘 채용하여 군주의 이목을 가리게 하지 않을 것, 제6조 인주(人主)는 자기의 과실을 반성하고 자기의 정치를 수정하여 하늘의 인애(仁愛)를 받을 것 등으로, 시무 6개조를 극명하게 상주한 풍격(風格) 높은 명문이다.

『성학십도』는 제1도 태극도(太極圖), 제2도 서명도(西銘圖), 제3도 소학도(小學圖), 제4도 대학도(大學圖), 제5도 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 제6도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제7도 인설도(仁說圖), 제8도 심학도(心學圖), 제9도 경재잠도(敬齋箴圖), 제10도 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와 도설(圖說)‧제사(題辭)‧규약 등 부수문(附隨文)으로 되어 있다.

제1도는 도와 도설이 모두 주돈이(周敦頤)의 저작이며, 제2도에서 「서명」은 장재의 글이고, 도는 정임은(程林隱)의 작품이다. 제3도에서 제사는 주자의 말이고, 도는 『소학』의 목록에 의한 이황의 작품이다.

제4도에서 본문은 주자의 『대학경(大學經)』 일장(章)이고, 도는 권근(權近)의 작품이다.

제5도에서 규약은 주자의 글이고 도는 이황의 작품이며, 제6도에서 상도(上圖) 및 도설은 정임은의 저작이고 도는 이황의 작품이다.

제7도는 도 및 도설이 모두 주자의 저작이고, 제8도는 도 및 도설이 모두 정임은의 저작, 제9도에서 잠은 주자의 말이고 도는 왕노재(王魯齋)의 작품이며, 제10도에서 잠은 진남당(陳南塘)의 말이고 도는 이황의 작품이다.

그러므로 요컨대 제3‧5‧10도와 제6도의 중간 하도(下圖) 등 5개처만이 이황의 작품이고, 나머지 17개처는 상기한 선현들의 저작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들 유학사상의 정수들의 집약은 이황에 의하여 독창적으로 배치되어 서로 유기적으로 관련됨으로써 생명 있는 전체적 체계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황의 학문은 일대를 풍미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역사를 통하여 영남을 배경으로 한 주리적(主理的)인 퇴계학파를 형성해왔고, 도쿠가와(德川家康)이래로 일본 유학의 기몬학파(崎門學派) 및 구마모토학파(熊本學派)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쳐왔다.

또한, 개화기 중국의 정신적 지도자에게서도 크게 존숭을 받아,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3국에서 도의철학(道義哲學)의 건설자이며 실천자였다고 볼 수 있다.

『언행록』에 의하면, 조목(趙穆)이덕홍(李德弘)에게 “퇴계선생에게는 성현이라 할만 한 풍모가 있다.”고 하였을 때 이덕홍은 “풍모만이 훌륭한 것이 아니다.”라고 답하였다 한다.

그리고 『언행통술(言行通述)』에서 정자중(鄭子中)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선생은 우리나라에 성현의 도가 두절된 뒤에 탄생하여, 스승 없이 초연히 도학을 회득(會得)하였다. 그 순수한 자질, 정치(精緻)한 견해, 홍의(弘毅)한 마음, 고명한 학(學)은 성현의 도를 일신에 계승하였고, 그 언설(言說)은 백대(百代)의 후에까지 영향을 끼칠 것이며, 그 공적은 선성(先聖)에게 빛을 던져 선성의 학(學)을 후학의 사람들에게 베풀었다. 이러한 분은 우리 동방의 나라에서 오직 한분뿐이다.” 위에서 밝힌 사실만 가지고도 우리는 그가 제자들에게서 성현의 예우를 받는 한국유림에서 찬연히 빛나는 제일인자임을 엿볼 수 있게 된다.

이황의 학풍을 따른 자는 당대의 유성룡(柳成龍)정구(鄭逑)김성일(金誠一)조목이덕홍기대승김설월당(金雪月堂)금응협(琴應夾)이산해(李山海)정탁(鄭琢)정자중구경서(具景瑞)조호익(曺好益)황준량(黃俊良)이강이(李剛而) 등등을 위시한 260여인에 이르렀고, 나아가서 성혼(成渾)정시한(丁時翰)이현일(李玄逸)이재(李栽)이익(李瀷)이상정(李象靖)유치명(柳致明)이진상(李震相)곽종석(郭鍾錫)이항로(李恒老)유중교(柳重敎)기정진(奇正鎭) 등등을 잇는 영남학파 및 친영남학파를 포괄한 주리파 철학을 형성하게 하였으니, 이는 실로 한국유학사상의 일대장관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특히 이익은 『이자수어(李子粹語)』를 찬술하여 그에게 성인(聖人)의 칭호를 붙였고, 정약용(丁若鏞)은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을 써서 그에 대한 흠모의 정을 술회하였다.

임진왜란 후 이황의 문집은 일본으로 반출되어 도쿠가와가 집정(執政)한 에도(江戶)시대에 그의 저술 11종 46권 45책이 일본각판으로 복간되어 일본 근세유학의 개조(開祖) 후지와라(藤原惺窩)이래로 이 나라 유학사상의 주류인 기몬학파 및 구마모토학파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고, 이황은 이 두 학파로부터 대대세세(代代世世)로 신명(神明)처럼 존숭을 받아왔다.

기몬학파의 창시자 야마사키(山崎暗齋)는 그를 “주자의 직제자(直弟子)와 다름 없다.” 하고 ‘조선의 일인(一人)’이라 평가하였고, 그의 고제(高弟) 사토(佐藤直方)는 “그의 학식이 이룬 바는 크게 월등하여 원명제유(元明諸儒)의 유(類)가 아니다.”라고 찬양하였다.

이나바(稻葉黙齋)는 ‘주자의 도통(道統)’‧‘주자 이래의 일인(一人)’이라 하여 존신(尊信)하였으며, 구마모토 학파의 시조 오쓰카(大塚退野)는 “만약에 이 사람이 없었다면 주자의 미의(微意)는 불명하여 속학(俗學)이 되어버렸을 것이라 생각된다.”고 하였고, 도쿠가와 말기의 요코이(橫井小楠)는 그를 시대를 통하여 ‘고금절무(古今絶無)의 진유(眞儒)’라 절찬하였고, 역시 이 계통에 속하는 막부(幕府)말 메이지(明治)시대의 구스모토(楠本碩水)는 “대의 대유(大儒) 설경헌(薛敬軒)호경재(胡敬齋)초의 육가서(陸稼書)장양원(張楊園)과 비교하면 훨씬 탁월하다.”라고 단언하였다.

마쓰다(松田甲)『일선사화(日鮮史話)』에 의하면, 여코이의 친구이자 제자였던 메이지제일의 공신이며 교육칙어(敎育勅語)의 기초자인 모토다(元田東野)는 “정주(程朱)의 학은 조선이퇴계(李退溪)에게 전하여졌고, 타이야(退野) 선생이 그 소찬(所撰)의 『주자서절요』를 읽고 초연히 얻은 바 있었으니, 내 지금 타이야의 학을 전하여 이것을 금상황제(今上皇帝)에게 봉헌하였다.”라고 술회하였다 한다.

뿐만 아니라, 1926년 중국북경(北京) 상덕여자대학(尙德女子大學)에서 대학의 증축‧확장기금에 충당하기 위하여 『성학십도』를 목판으로 복각(復刻)하여 병풍을 만들어서 널리 반포(頒布)하였을 때, 중국 개화기의 대표적인 사상가 량치차오(梁啓超)는 찬시(贊詩)를 써 그 제1연에서 “아득하셔라 이부자(李夫子) 님이시여”라고 그를 거리낌 없이 성인이라 호칭하였다.

일본유학에의 영향을 제외하면 다음과 같은 조호익의 말은 이황의 학적 지위를 간결히 표현한 매우 적절한 평가라 볼 수 있다.

즉, “주자가 작고한 뒤......도(道)의 정맥은 이미 중국에서 두절되어버렸다. 퇴계는......한결같이 성인의 학으로 나아가 순수하고 올바르게 주자의 도를 전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비교할만한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이만한 인물을 볼 수 없다. 실로 주자 이후의 제일인자이다.” 1609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고, 그뒤 그를 주사(主祀)하거나 종사하는 서원은 전국 40여개처에 이르렀으며, 그의 위패가 있는 도산서원은 8‧15광복 후 제5공화국 때 대통령의 지시에 의하여 국비보조로 크게 보수, 증축되어 우리나라 유림의 정신적 고향으로서 성역화되었다.

이황의 학덕은 그의 생시(生時) 및 한일 양국의 역사에서 크게 선양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 있어서도 국제적 규모로 널리 부흥, 재검토되고 있다.

1970년 서울에 퇴계학연구원이 창립되었고, 1972년 퇴계400주기기념논문집 『퇴계학연구』가 간행되기 이전부터 발행된 계간학술지 『퇴계학보』는 1990년 3월 현재로 64집에 이르렀다.

경북대학교에 퇴계연구소가 부설되었는가 하면, 서울과 거의 같은 시기에 일본 동경에 이퇴계연구회가 설립되었다. 대만에도 국립사범대학 안에 퇴계학연구회가 부설되었고, 근래에는 미국워싱톤뉴욕하와이에 이퇴계연구회가 조직되었으며, 서독 함부르크에 퇴계학연구회가 생겼다.

1986년에는 단국대학교에서 퇴계기념중앙도서관이 낙성되어 그 안에 퇴계학연구소를 부설하였다.

또한, 국제퇴계학회가 창설되어 1976년 이래로 거의 해마다 한국일본대만미국서독홍콩 등지에서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하여 세계 각국의 이 방면의 석학들이 회동하여서 주제논문을 발표하며 진지한 토론을 거듭해왔다.

특히, 1989년 10월 국제퇴계학회와 중국인민대학이 공동주최한 제11차국제학술대회가 북경에서, 그리고 1990년 8월 제12차국제학술대회가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바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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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전두하(全斗河)

성명 : "이황(李滉)"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歷代總要v04在陽州泰陵東岡行狀李滉撰又有表石
國朝編年v02退溪李滉曾祖
國朝編年v08詣闕啓曰近者定罪自上不動聲色各適其當人心咸服朝臣雖多坐罷者而亦有所未盡此臺諫未及聞知也持平李天啓典翰李滉楊根郡守權勿持平李湛等無異於金䃴輩丁熿只遆本職而不罷請與同罪且往者己卯之人徒以自已所知爲賢才而取人其
國朝編年v09以昔日耽釋之小失輕遆論思重任且悔過自新其意可嘉宜勿讓寶鑑○四月以洪暹爲右相暹有文名無操守是時輿望屬于李滉召命重疊滉不至乃以暹卜相士林失望○五月平安兵使金秀文襲胡于西海坪焚其聚落西海坪本我地絶遠不能守恐胡人
國朝編年v10也非欲追尊也且釣名之云無乃士類自取乎以幺麽一芑之疏至於兩司伏閤無乃躁乎兩司伏閤經月竟未蒙允○賜故贊成李滉諡文純故判書金凈諡文簡○七月義州牧使郭越上疏陳時弊而疏中論李浚慶之非且論白仁傑欲嫁禍士林而祕謀不掩羞
國朝編年v15右參贊成渾卒渾字浩源自號默菴居坡山牛溪之上學者稱爲牛溪先生渾天分甚高德器早成自童幼時服膺庭訓又嘗尊慕李滉而私淑焉其爲學以考亭爲準則講明踐履交致其功而於本源之地尤慥慥焉與李珥論四端七情理氣先後之說往復累千萬
國朝編年v16爲深惡痛絶反欲曲護多費辭說則是自有遺君之心也云云○湖南儒生高敬履等上疏略曰鄭汝昌金宏弼倡之於前趙光祖李滉繼之於後能得四賢之道而遠祖程朱之學者先朝臣成渾其人也又曰論者只見渾與鄭澈相善謂其嗾殺永慶之獄出於一時之
國朝編年v17紀極○特許兩司及館學疏請從祀文敬公金宏弼寒暄堂文獻公鄭汝昌一蠧文正公趙先祖靜菴文元公李彦迪晦齋文純公李滉退溪五賢于文廟○別試取權得已等三十三人○九月親釋尊于先聖取金誾等九人○冬別試取辛光業等十九人朴自與曺
國朝編年v18諡文穆公字道可號寒崗淸州人公初學於吳德溪健又受學於李退溪又見曺南冥植許以君子戊寅拜昌寧縣監上召見問曰李滉曺植其學何如對曰滉德厚而學純學者可以尋入植超然自得特立獨行學者難以爲要也至是卒年七十八所著五先生禮說
國朝編年v19以蛇蝎之性鬼蜮之心始雖逃名於林下特一豪强品官中焉託跡於義兵惟事武斷鄕曲收聚頑鈍之徒私倡怪鬼之學李彦迪李滉東方大賢而因憾疏斥不有餘力鄭蘊李大期直言被罪而從而下石略不伸救士心咸憤門徒皆叛與賊魁爾瞻表裏聲勢迭相
國朝編年v20者例得從食於西廡其在我東於羅則有若崔致遠薛聰於麗則有若安裕鄭夢周於本朝則有若金宏弼鄭汝昌趙光祖李彦迪李滉等五儒臣皆其人當明寧之際繼李滉而作爲儒林所宗者有二人焉文成公臣李珥文簡公臣成渾是已又曰癸未年間李珥爲
國朝彙鑑v1五年春二月頒內藏書籍于豊基白雲洞書院賜額曰紹修從郡守李滉請也尋命諸道有書院處次第表章書院之作由是益盛
國朝彙鑑v1聞不知之理乎請自今祕密公事令備邊司一一通諭于兩司從之時上剔除權奸釐革弊政欲登庸賢俊以賁飾至治而尤傾嚮李滉欲必致朝端然滉自春辭歸之後屢召不起上益重之密令畵工模寫所居陶山形勝又嘗宣醞湖堂學士以招賢不至律時命製
紀年便攷v4其忠義再召不起程傳初來東方無能知者倬閉門月餘參究乃解教授生徒理學復行太祖曰禹倬道學精明為東方理學之祖李滉曰先生之忠義大節旣足以動天地撼山岳而經學之明進退之正有大過人者則爲後學師範可以廟食百世者非先生而誰哉
紀年便攷v5竹橋吟錄事曰先生爲國死公爲先生死爲國爲先生俱是死於死文忠配享崇仁殿名入筆苑中宗丁丑從祀 文廟鄭逑問於李滉曰南冥甞以圃隱出䖏爲疑鄙意圃隱一死頗可笑爲恭愍朝大臣十三年於不可則止之義已爲可愧又事辛禑父子謂以禑爲
紀年便攷v5恩半月含羞已滅門一國豈能留景祚九原難可雪幽冤古風淪䘮時還泰新法清平道益尊且向玉墀呼萬歲願施優渥及山村李滉書有云國家萬世後當從耘谷議申欽曰禑昌之事當以元天錫爲信史直書無隱比諸麟趾之麗史不翅日星蝶蝀之相懸監司
紀年便攷v9後不仕五紀七世孫墉希孟子號仙溪中進士以遺逸拜參奉院享五常孫文海參奉祉子字灝元號草磵明宗朝文科官止監司李滉門人與柳成龍金誠一金宇顒契深甞言東西之禍與國相終始作詩以見志所著有大東韻玉二十卷文海子鱉號竹所蔭護軍
紀年便攷v9戊午禍及泉壌 仁孝兩聖每以宗直之不得典文為東國一大欠事其詩如十年世事孤吟裏九月秋聲亂葉間眞可謂絶唱也李滉曰宗直非學問底人終身事業只在詞章上所著有青邱風雅東文粹肅宗朝贈領相兄弟文科兄弟碩博士
紀年便攷v10母不可并此受傷乃就刑年五十一 中宗丁卯伸雪贈都承旨戊寅贈右相謚文敬宣祖丁丑加贈領相光海庚戌從祀 文廟李滉曰寒暄之學既無着述又無文獻其造詣深淺未可知也且踐履雖篤而於道問學工夫恐有未盡也
紀年便攷v10愈倜儻有氣節甲子言事杖流盈德中宗反正後至京見洪景舟暴貴仍勇退屢召不起沉潜性理多有訓誨之功所着有案上圖李滉曰學問精粗於此可見嘗除青松時成希顏素相善求柏蜜答曰柏在高峯頂上蜜在民間蜂栢為太守者何由得之希顏愧服謝
紀年便攷v10辛丑三十六年嘉靖二十年副提學李彥迪直提學李浚慶應教柳辰仝抆理權轍李滉䓁上一綱九目䟽上嘉納○命釜山僉使以武臣擇差先是釜山有接待倭人檢察京啇之事故擇送文臣至是金安國䓁言釜山
紀年便攷v11院以祀高麗大儒安裕豊基裕之郷也東方書院始始起於此明宗甲寅卒子博生父世鳥世鵬昆弟中宗甲申生字約之號龜峯李滉門人明宗戊午生壯進 俱中宣祖戊辰文科歴翰林官止校理居㓒谷鄊人爼豆之世鵬従子怡字士安明宗丙午文科官止都
紀年便攷v11不覺心神灑然聞其姓名乃林亨秀也中宗辛卯十八進士乙未登别試選湖堂歴舍人為儐使蘇世讓従事豪邁能文兼弓馬才李滉每稱奇男子與滉在湖堂醉呼滉字曰君亦知奇壯事乎滉笑曰第言之亨秀曰大雪滿山着黑貂裘帶白羽長箭掛臂百斤角弓
紀年便攷v11世健子應雲第中宗甲戌生字景霖號二樂堂又樂山中宗甲午進士乙未登别試選湖堂歴直學官止工議明宗癸丑卒年四十李滉誄文曰鸞停翠竹玉出藍田子瑜見下
紀年便攷v11李滉瀣弟燕山辛酉生權磌姪婿后字景浩號退溪又退陶又陶叟又清凉山人又退陶晩隱中宗戊子進士甲午登明經科選湖堂歴
紀年便攷v11而己十八嵗有詩曰露草夭夭繞水涯野塘清活净無沙雲飛鳥過無相管只怕時時燕蹴波可見學業之已成白仁傑問趙光祖李滉優劣於李珥珥曰姿質則靜菴勝似退溪學問則退溪勝似靜菴朴淳曰闡明正學開導後生使孔孟程朱之道煥然復明於吾東
紀年便攷v11李滉
紀年便攷v11李湛績孫引儀宗蕤號竹亭子中宗庚午生慶世仁婿字仲久號靜存齋又後峯師事李滉柳藕十二喪父受小學至寡婦之子非有見焉弗與為友益發憤期於有成常曰丈夫生世何物非分內事學問之外又工文章至
紀年便攷v11霖號寓菴中宗辛卯二十進士己亥魁别試選湖堂歴銓郞提學官止禮參明宗癸亥以卞誣奏請使赴燕道卒年五十二能文章李滉嘗贈詩曰彌勒形容河海量贈禮判宣祖朝追䇿光國㓛三等封花山君謚文端
紀年便攷v11朴承任訔五世孫進士珩子中宗丁丑生權五紀婿字重甫號嘯臯又西臯李滉門人居榮川中宗庚子生進俱中同年登明經科歴南床翰林銓郞選湖堂明宗丁未以禮曹正郞罷職歴知申官止通政監司所
紀年便攷v11生九嵗奇遵見之曰後當為世子之臣盖以當時世子睿徳夙著故云金安國一見便以少友號及長學務聖賢未甞苟異於人與李滉志氣相得有麗澤之益學述高明文章超越中宗辛卯進士庚子登别試歴南床選湖堂 仁宗在東宫以說書侍講筵寵遇極隆
紀年便攷v11李元祿荇子中宗乙亥生字廷瑞中宗辛卯十七生貟辛丑登别試選湖堂其叔芑啓削李滉權勿李湛丁熿等職元祿泣諌還給牒丁未芑錄乙巳獄推案名曰乙巳定難記令鑄局印出元錄曰觀叔所為異日恐有家禍於
紀年便攷v11盧守慎光州人嵩八世孫别提鴻子中宗乙亥生李延慶婿字寡悔號蘇齋又伊齋又暗室又茹芝老人李滉門人又受學于延慶及李耔中宗甲午二十進士癸卯魁明經科選湖堂歴銓郞直學聡明博學為文章尢深於經術直聲動於士
紀年便攷v11學為正言時諫廢主配安東禁府囚單子中有一術士之名在賢輔之次御筆點放此人而誤下於賢輔之名以此得生養徳林泉李滉推重而唱酬靖國後還朝為臺臣遇事鯁直不撓另為燒酒陶瓶謂外黔而內清烈雖帶職恬退榮利不受祿中宗嘉其恬退屢加
紀年便攷v11六子一婿皆專城一時榮養子仲樑字公幹號賀淵中宗甲午以進士登明經科歴三司官至東伯仲樑弟叔樑字大用號悔巖従李滉學專心聖學見重師門中進士除王子師傅不就筆法神竗大邱有郷賢祠
紀年便攷v11李賢輔永川人縣監欽子世祖丁亥生字棐仲號聾巖又雪髩翁李滉每稱聾巖老仙燕山乙卯生貟庚午登明經科歴翰林副學為正言時諫廢主配安東禁府囚單子中有一術士之名在賢輔之次
紀年便攷v11歴大司成官止同成均作成多士及其遞也多士上疏請留明倫堂兩文杏即倬手植也趙光祖諸賢皆撤臯比以推於倬宋麟壽李滉皆承講授以左尹為松京留守甲午卒于任所年六十三玄孫煌烇見下○五世孫舜舉見下五世孫聖舉煥子登武科官止府使
紀年便攷v12徐敬德唐城人副尉好蕃子成宗己酉生字可久號復齋又花潭李延慶門人與李滉曺植從遊生於松京母韓氏夢入夫子廟而生敬德天資聦頴眉宇明快眼若曙星年近志學受尙書至朞三百塾師不肯授敬德
紀年便攷v12原理氣太虚說死生鬼神論明宗丙午卒年五十八贈戶佐宣祖朝門人朴淳許曄主張甚力加贈右相謚文康議論與聖賢差異李滉李珥以爲非儒者正脉多可疑處不許以醇正之學孫佑申龍潭縣令騏子有材畧善射少時與平壤武士較藝以五矢射中帟四
紀年便攷v12學章句補遺又修中庸九經衍義而未及成癸丑卒于配所年六十三官止右賛成選清白吏清方有學力士林推爲當世第一人李滉曰頴悟出人天資近道無授受之處而自舊於斯學用力於格致之工成就後進青蠅止樊誣芳蠋於電徃中原採菽仰高山於雲
紀年便攷v12朴雲密陽人進士宗元子成宗癸丑生字澤之號龍岩朴英門人晩與李滉徃來質疑中宗己卯進士以學行見重於士流才俊氣豪志趣不凡所著有擊蒙篇紫陽心學至論景行錄明宗壬戌卒年七十以
紀年便攷v12丙子生員己卯以孝行登賢良科薦目有學行有志操歷翰林罷科後拜陽城官止兵佐禍作下獄徒流昆陽丁酉放善畵梅竹與李滉有詩酬唱年五十五卒
紀年便攷v12修撰麟厚入春坊上與語大悅㤙遇日隆或親至直廬従容問難 上素多藝不欲表見於人而獨於麟厚賜墨竹畵以示意○以李滉為應教○復趙光祖䓁官爵及賢良科時 上不䂊乃教曰趙光祖䓁事予實不㤀于懐而以 先王所未許故不敢輕改今予疾
紀年便攷v12而為之遂以承欵當日䖏斬李徳應李煇郭珣正刑柳灌尹任柳仁淑追戮羅湜權撥宋麟壽䓁并論罪有差尋因李芑言李天啓李滉䓁皆削職罷薦舉科岏丙午配平昌丁未壁書獄被殺後并伸雪復爵○策衛社功臣柳灌䓁誣獄後錄鄭順月䓁二十九人為保
紀年便攷v12為尹元衡所搆誣時有大小尹之目乙巳明宗即位鄭順朋以謀危 宗社宣言誣告安置于南海絶島行至忠州賜死年五十九李滉曰不無社稷之罪李珥曰無罪丁未伸雪賜謚忠毅子興仁登武科官止正郞興義中進士三父子同被禍興仁子瓊乙巳被謫後
紀年便攷v12戊申三年嘉靖二十七年以李滉為丹陽郡守憲府啓言不宜外補上曰民方飢困可徃救也不聴○李芑誣殺弘文博土安名世名世曾以史官直書乙巳諸奸事
紀年便攷v12庚戌五年嘉靖二十九年頒內藏書耤于豊基白雲洞書庚戌院因郡守李滉言也賜書籍仍賜額曰紹修書院賜額始此院今在順興地○御慶會樓下觀射御題安不㤀危七言律諸令宗宰侍臣以為製進
紀年便攷v12任乕臣周世鵬金秀文李夢弼李世璋李荣金珣全彭齡洪曇成世章尹釜尹鉉尹春年鄭宗荣朴永俊吳祥李重慶金闓任輔臣李滉安従琠宋景璟金雨卞勲男辛士衡姜允權禹世謙凢三十三人○復立両宗禪科給僧度牒承 大王大妃㫖也時監司鄭萬鍾
紀年便攷v12不得已従之○副提學鄭裕䓁上䟽陳七條下優批一勤聖學二審所尙三辨邪正四納諌諍五恤民隐六振士風七闢異端○以李滉為大司成○景福宮大內灾思政殿以南皆焚歴代典籍殆盡 大王大妃誥命亦被燒燼 上避殿减膳下教朮言翌年重修之
紀年便攷v12乙卯十年嘉靖三十四年兵曺叅議李滉謝病歸鄕上下書敦召上箋謝不至○倭寇損竹島全州府尹李潤慶撃却之初先犯羅梁鎮㷊蕩閭轁閻度使元續與長興府使
紀年便攷v12丙寅二十一年嘉靖四十五年以李滉為工曺判書兼木提學李珥為正言滉肅命旋歸 上宻令畵工摸進陶山形勝又以招賢不至為御題命湖堂學士製進○世宗
紀年便攷v12然命復宋麟壽䓁官還給職牒人心大悅被謫人存者盧守慎柳希春金鸞祥柳堪李元祿并放擢用○九月葬康陵在楊州行状李滉撰○執義竒大升請李彦廸趙光租復官贈職従之命復彦廸官爵贈光祖議政○召䖏士曺植成運前郡守李恒皆不至紀年便
紀年便攷v12制中宗䘮左相柳灌議以為卒哭後燕居黒笠卽脫丧也復用白笠仁宗䘮灌卒即廢其議用黒笠至是復用白笠如禮也○持拜李滉為禮曺判書滉屢辭以病乃許逓滉不辭朝而還拜滉以官斥退沈通源乃一初黜陟之政○命沈通源削爵放歸田里通源連源
紀年便攷v13簡亢不喜不附已者故與士類携異臨没一疏言朋黨有漸啓人主之疑李珥以是斥之又嘗以爲不如其兄不喜儒學之士至斥李滉爲山禽野獸云李珥以反覆小人遺劄眩惑等語啓子上左相洪暹曰今若指以小人蜼在地下亦不服矣珥疏詆至曰蔵頭匿形
紀年便攷v13李浚慶潤慶弟燕山己未生金楊震婿字原吉號東皐又紅蓮又南堂又養窩與李滉成守琛曺植爲道義交少磊磈不羣儀貌䧺偉有名多士間中宗壬午生員辛卯登明經科歴南床翰林銓郞直學仁宗初言於人
紀年便攷v13李滉
紀年便攷v13李滉見中宗朝湖堂
紀年便攷v13朴淳祐子中宗癸未生字和叔少號青霞子後改思菴又雙松徐敬德門人後事李滉滉曰相對如一條清氷八歲吐辭驚人中宗庚子十八進士明宗癸丑魁親試選湖堂歴舎人銓郞直學副學宣祖初典文衡以登
紀年便攷v13丁胤禧應斗子中宗辛卯生字景錫號顧菴李滉門人明宗朝生進俱中一䓁丙辰魁謁聖選湖堂丙寅以僕正魁重試歴舎人典翰官止通政東伯文章卓一世尢長於四六宣祖
紀年便攷v13奇大升参奉進子遵從子中宗丁亥生字明彥號高峯又存齋李滉門人㓜時就鄕塾有客試之以聯句舉食字應殾曰食無求飽君子道明宗己酉生進俱中戊午登明經科選湖堂歴翰林銓郞舍
紀年便攷v13塲尹元衡忌之認其劵故黜之博通古今精練典故與李■辨四端七情之同異屢千言論議發越學者是之 上問當今學問於李滉滉對日奇大升博洽超詣鎭見其比斯可謂通儒平日奏對言語史官錄為二卷名曰論思錄曹植曰此人得志必誤國事大升亦
紀年便攷v13李山海之蕃子中宗己亥生趙彥秀婿字汝受號鵝溪又終南睡翁李滉門人四歲能讀書五六歲能作詩書屏簇名振都下明宗戊午二十進士辛酉文壯選湖堂歴南床銓郞舍人直學宣祖朝典文衡
紀年便攷v13卜相入耆社庚寅兄弟被黨錮鄕居壬辰起廢三赴廣寧六使遼東開陳請援無不動聽清德文章爲世宗匠少好學性理之書訪李滉尊植論朱陸異同從李珥成渾遊爲莫逆交㓛冠一代位班三事益謙卑無矝容善筆法名入筆花宣祖曰尹某德高勳高予愛其
紀年便攷v13具鳯齡綾城人謙子中宗丙戌生字景瑞號柏潭李滉門人明宗丙午生員庚申登别試選湖堂歴翰林南床銓郞直學副學吏参官止大司憲出按两湖著績如水博聞多見守禮執義
紀年便攷v13義菴盖取集義生浩然之意也緇徒尊之以爲生佛以竹兠子肩擔而行居一年旋悟其非乃長髮從事斯學師事朴洲二十三謁李滉與成渾爲道義交與宋翼弼翰弼安敏學成允諧朴光玉鄭磏李夢奎曹好益禹㐲龍從遊滉曰明爽多記覧後生可畏珥獻詩曰
紀年便攷v13鄭惟一東莱人穆䉒子光弼再從孫中宗癸巳生字子中號文峯李滉門人明宗乙卯生員戊午登明經科選湖黨歴翰林舍人官止大司諫李滉嘗薦于朝李珥以爲凡俗無可觀宣祖丙子卒年四十
紀年便攷v13莱人穆䉒子光弼再從孫中宗癸巳生字子中號文峯李滉門人明宗乙卯生員戊午登明經科選湖黨歴翰林舍人官止大司諫李滉嘗薦于朝李珥以爲凡俗無可觀宣祖丙子卒年四十四
紀年便攷v13中宗丙子二十進士甲午登明經科歴典翰舎人直學副學屢掌試圍人稱選士之精三承敬差之命五爲御史之任皆舉其職與李滉同選清白官止知申東伯階通政沉默寡慾誠孝尤篤至於大義隨過輒觧頗有出人意表一生廉潔四壁藁薦以觀書自娛觀書
紀年便攷v13慶渾清州人持平世清子世仁族姪燕山戊年生字彥晦金安國門人中宗壬午進士癸巳登别試歴翰林副學官止吏參以薦引李滉見忤於金安老又為陳復昌所詆宣祖戊辰卒年七十一曾孫信俊見下
紀年便攷v13寅薦授司畜知林川郡歴掌令官止掌樂正果於自信堅於自用故所學或無不病䖏而用工甚篤傑然為一世大儒弟子甚衆與李滉分嶺之半而金千鎰以節義著 宣祖丙午卒年七十八贈吏議祭酒哲宗甲寅領府事鄭元容自湖南還奏曰泰仁贈祭酒李恒
紀年便攷v13監乘馹詣闕陳以治道屢典至光州為光牧也宣祖命㨂守令有德者監司舉薰為啓民目之以氷壺生質粹美德器早成與曹植李滉契分甚密與弟藝皆以孝蒙生前旌閭之典官止判决事宣祖甲申卒年八十五贈吏判謚孝簡弟藝字彥成號瞻慕堂少豪邁有
紀年便攷v13畧飮酒放蕩時作狂態為文汪洋大肆至於醫卜地誌無不涉獵養德山林徴辟不起士皆尙之草廬饘粥蕭然有遺世出塵之意李滉獨不取曰此老莊為祟己未卒年五十四 當宁庚戌贈奎提謚清憲兄孝一字伯一號漁夫與悌齊名善為詩遊方之外
紀年便攷v13朴士熹咸陽人訓導馨子中宗戊辰生字德明號默齋又梅筠軒李滉門人始除訓導以學行薦八辟不起晩調昌寧亦不赴居醴泉終老宣祖戊子卒年八十一
紀年便攷v13成守堗之門有志性理之學而好善嫉惡出於天性執親之丧哀毀踰禮為金正國心丧三年好古樂善晩懲世禍托於麯蘖之間李滉惜之中宗朝有人論薦出遊遠方以避之讀昜十餘年不懈作天命圖又著說見稱於諸賢明宗辛酉卒年五十三
紀年便攷v13止禮參奉使燕京卒于玉河館年六十六 天子賜吊祭本朝贈吏判有孝行子弘㴻號西溪始事曹植終學成渾推尊曹植過於李滉渾曰退溪深於學恐南冥不如也壬辰欲起義兵而時妹夫鄭仁弘自總一道義兵耻與同事奔問行在官止都事弘㴻子榥字學
紀年便攷v13崔應龍和順人以漢子字見叔號松亭遊朴英李滉之門明宗丙午以進士魁增廣被將薦歴留守監司官止左尹
紀年便攷v13李滉之門有宋諸儒道學之當自楨始刊布宣祖朝屢召不起居萬竹山中教授生徒而卒所著文集及景賢錄性理遺編行于世李滉曰好䖏甚好而見識未透院享
紀年便攷v13李楨泗川人字剛而號龜巖中宗丙申以進士魁别試官止副學初學于宋麟壽金麟厚卒聞大道於李滉之門有宋諸儒道學之當自楨始刊布宣祖朝屢召不起居萬竹山中教授生徒而卒所著文集及景賢錄性理遺編行于世李滉
紀年便攷v13止吏正以孝友贈副學加贈禮判謚忠簡與兄同院享弟熖字君晦號晩軒明宗庚申以進士登文科錄原從勳官止通政牧使與李滉講論至有真儒之奬先見汝立反狀
紀年便攷v13韓修致仁曾孫以世倫子為季父司䆃正宗倫后與李珥為中表兄弟字永叔號石峯遊李滉門中宗丁酉生壯明宗朝以經明行修授官老成宿儒如曹植者同被召宣祖朝超拜持平官止承旨嘗以持平入侍 上問學問
紀年便攷v14沈鎬以光彥子為伯父郡守光門后字景基號逸齊又西湖䖏士趙光祖門人與李滉李恒為道義交孝行高節見重於世贈大司憲系子宗敏兄錦子字士訥號晴灣李珥門人能詩翩翩豪舉有丈夫氣䕃仕止郡守
紀年便攷v14洪仁祐唐城人文僉知徳演子中宗乙亥生字應吉號耻齋徐敬徳門人出入於成守琛之門晩事李滉與曹植韓修林薰林藝金範俞好仁従逰勵志為學孝友出天立心行事直以聖賢為標凖傍置黑白以驗一念之善惡平居必冠
紀年便攷v14金富弼光山人文科號竹淵緣子國光族姪中宗丙子生字彥遇號後凋堂李滉門人孝友剛嚴敦睦正直丁酉中司馬調祠官不起以遺逸薦除孝陵參奉時滉在都貽書勉出富弼以詩答之曰為向山雲寄一
紀年便攷v14遺逸官止知縣滉甞命造璣衡子坽見下富仁子㙉李賢輔外孫字子厚號九峰李滉門人以文學名早卒㙉弟圻字叔止號北厓李滉門人不事科業篤志學問以遺逸補齋郞
紀年便攷v14信弟富倫字敦叙號雪月堂李滉門人中司馬以遺逸官止知縣滉甞命造璣衡子坽見下富仁子㙉李賢輔外孫字子厚號九峰李滉門人以文學名早卒㙉弟圻字叔止號北厓李滉門人不事科業篤志學問以遺逸補齋郞
紀年便攷v14公車之永廢除書之不赴其跡如成渾六月仁山之哭其跡如金麟厚純祖以嶠南真儒贈吏判謚文純弟富儀字慎仲號挹清堂李滉門人中司馬以遺逸除寢郞不起篤志文學子垓見下富弼従兄富仁生員綏子字伯榮號山南李滉門人登武科官止兵使少以
紀年便攷v14少以文藝名孝友傑然世比朴英富仁弟富信字可行號養正堂李滉門人中進士篤志力行早卒富信弟富倫字敦叙號雪月堂李滉門人中司馬以遺逸官止知縣滉甞命造璣衡子坽見下富仁子㙉李賢輔外孫字子厚號九峰李滉門人以文學名早卒㙉弟圻
紀年便攷v14純弟富儀字慎仲號挹清堂李滉門人中司馬以遺逸除寢郞不起篤志文學子垓見下富弼従兄富仁生員綏子字伯榮號山南李滉門人登武科官止兵使少以文藝名孝友傑然世比朴英富仁弟富信字可行號養正堂李滉門人中進士篤志力行早卒富信弟
紀年便攷v14従兄富仁生員綏子字伯榮號山南李滉門人登武科官止兵使少以文藝名孝友傑然世比朴英富仁弟富信字可行號養正堂李滉門人中進士篤志力行早卒富信弟富倫字敦叙號雪月堂李滉門人中司馬以遺逸官止知縣滉甞命造璣衡子坽見下富仁子
紀年便攷v14李全仁彥廸庶子中宗丙子生字敬夫號潛溪克襲詩禮之訓出入於李滉之門明宗丙寅疏進其父進修八䂓之疏 上感悟即復其父官爵所著有關西問答錄宣祖戊辰卒年五十三贈禮賓寺正
紀年便攷v14平海人觶子中宗丁丑生李賢輔婿字仲舉號錦溪李滉門人丁酉生貟己亥登明經科歴两司以兵郞進闢佛疏內外職多不就李滉盛稱其學而但為學官時承權臣旨以舟川為詭論停舉之然而在於朝以文辭名在於外崇尙學校有㓛士習明宗癸亥以星牧
紀年便攷v14黃俊良平海人觶子中宗丁丑生李賢輔婿字仲舉號錦溪李滉門人丁酉生貟己亥登明經科歴两司以兵郞進闢佛疏內外職多不就李滉盛稱其學而但為學官時承權臣旨以舟川為詭論
紀年便攷v14朴慎密陽人進士亨達金宗直門人曾孫生貟彥桂趙光祖門人孫大成子字汝欽號無盡齋李滉門人以學行薦除教官子壽春號菊澤鄭逑門人倡義兵有忠節院享
紀年便攷v14䕃牧使博子中宗戊寅生申鏛孫婿字致遠號月潭又鶴峯宋麟壽門人丁酉二十司馬薦授禁都明宗壬戌登别試歴舍人副學李滉之歸政院有給馬之請徳輿疏彈曰未聞縶駒反請給馬何也因陳白駒三章以留之與李珥成渾友善宣祖癸酉航海朝天辛卯
紀年便攷v14金徳龍安東人壽童從孫字雲甫號駱谷李滉門人明宗丙午登文科歴箕伯官止大司憲清德與李浚慶并稱兄弟文科弟徳鵾字成甫李滉門人登文科官止司諌
紀年便攷v14安東人壽童從孫字雲甫號駱谷李滉門人明宗丙午登文科歴箕伯官止大司憲清德與李浚慶并稱兄弟文科弟徳鵾字成甫李滉門人登文科官止司諌
紀年便攷v14裵紳星州人參奉嗣宗子中宗庚辰生字景餘號洛川㓜時見乙巳之禍将起作恠雨賦以示傷時之意弱冠往見曺植又從李滉學洪仁祐每推學於紳南方學者郭䞭朴惺皆其門徒薦授參奉者四以經術與趙穆同被薦除教官只一肅命而歸除别提不就
紀年便攷v14琴應莢奉化人儀後孫金富仁外弟字莢之號日休居禮安逰於李滉之門中進士有至行被召為王子師傅不就除河陽數月棄歸以孝行學術見稱官止翊䝺宣祖丙申卒年七十一弟應薰字薰之
紀年便攷v14至行被召為王子師傅不就除河陽數月棄歸以孝行學術見稱官止翊䝺宣祖丙申卒年七十一弟應薰字薰之號勉進齋早逰李滉門中進士以學行超授右職再為知縣不就以篤實見稱年七十七卒
紀年便攷v14吳守盈高敝人字謙仲號春塘以李滉從妹之子為其門人中進士筆法絶妙早卒
紀年便攷v14琴輔奉化人䕃僉樞元壽子字士任號梅軒李滉門人中司馬博學多聞善於筆滉之碑碣出於輔手官止縣監從叔元貞武縣令徵子號聾叟中進士己卯後不出元貞孫義筍䕃
紀年便攷v14滉之碑碣出於輔手官止縣監從叔元貞武縣令徵子號聾叟中進士己卯後不出元貞孫義筍䕃主簿號積善堂應石子號翠菴李滉門人參奉不仕義筍弟悌筍號赤菴李滉門人參奉不仕元貞從子軸進士元漢子字大任號南溪生進俱中齋郞不仕院享輔孫
紀年便攷v14武縣令徵子號聾叟中進士己卯後不出元貞孫義筍䕃主簿號積善堂應石子號翠菴李滉門人參奉不仕義筍弟悌筍號赤菴李滉門人參奉不仕元貞從子軸進士元漢子字大任號南溪生進俱中齋郞不仕院享輔孫是養號三棄堂以孝行贈持平旌閭
紀年便攷v14徐嶰達城人文參議固子居正從曾孫 中宗丁酉生字挺之號㴠齋李滉門人不事科業篤志問學為士友所推重明宗己未卒年二十三推恩贈領相子渻見下
紀年便攷v14鄭士誠鐡城人字士明號芝陽十七逰李滉門甚被愛重中司馬以薦拜官官止縣監
紀年便攷v14白仁傑進曰嗣王不至㓜冲女主不可以久聴國政 王大妃不悅未幾撤簾○命薦遺逸之士京畿監司尹鉉以成渾應命○遞李滉左䝺成移授判中樞府事下旨促召滉承命就召請褒贈趙光祖追罪南袞仍請改正崇政加階○贈趙光祖領議政謚文正以鄭
紀年便攷v14愆荅曰自古豪傑之士未免佛氏所䧟溺不可以昔日耽釋之小失輕遞論思重任且悔過自新其意可嘉宜勿讓○判中樞府事李滉上疏陳六條賜批一曰重継統以全仁孝二曰杜讒間以親両宫三曰敦聖學以立治夲四曰明道術以正人心五曰推心腹以通
紀年便攷v14上問李滉曰近日侍臣皆言南衮之奸邪何也滉曰䧟害趙光祖以搆己卯士林之禍承旨金啓厯舉為鬼為蜮網打事狀一一敷陳滉曰臣
紀年便攷v14誠修省以承天愛 上親札荅曰卿之道徳質也古人亦鮮其倫凡此六条真千古之格言乃當今之急務予雖眇末敢不服膺○李滉又上剳上聖學十圖一太極圖二西銘圖三小學圖四大學圖五白鹿洞規圖六心統性情圖七仁說圖八心學圖九敬齋箴圖十
紀年便攷v14尹元衡李芑林百齡鄭順朋軰僞勲之号并削仍請伸雪柳灌柳仁淑叛逆之名閱數月後始有是命削勲事不允○判中樞府事李滉卒命贈領議政賜賻葬祭如禮子寯遵遺教再上疏辭禮葬不許
紀年便攷v14憲朝京時觀中朝文物制度之盛慨然有東周之志其㘦於施為者八事条例以進而首論聖廟之制又言金宏弼趙光祖李彥廸李滉從祀事
紀年便攷v14丙子九年萬暦四年贈故䝺成李滉故判書金净謚滉文純净文簡皆遣官致祭
紀年便攷v15李滉見中宗朝湖堂相臣
紀年便攷v15李滉
紀年便攷v15柳成龍仲郢子中宗壬寅生字而見號西崖李滉門人滉一見之曰此子天之所生也明宗甲子生進俱中丙寅登别試宣祖朝選湖堂歴翰林舍人銓郞直學副學典文衡選清白
紀年便攷v15鄭琢䫨九世孫以忠子中宗丙戌生字子精號藥圃又柏谷李滉門人又従曺植學早以經術名明宗壬子生貟戊午登明經科初释褐李浚慶見之曰狀貌類雌龍後必大貴以草莾奮起拜校書
紀年便攷v15金命元引齡孫大憲萬鈞子中宗甲午生韓效元孫婿字膺順號酒隱李滉門人明宗戊午進士辛酉登明經科歴南床以持平陞鍾城歴平兵完伯長六曹參賛賛成宣祖己卯進嘉善為義州牧使臺諌劾
紀年便攷v15沈善壽逢源孫正字鍵子李延慶外孫 明 宗戊申生盧守慎姪婿字伯懼號一松盧守慎李滉門人宣祖戊辰進士壬申登别試選湖堂廉謹吏典文衡文章名一世多為儐相萬經理世德見而敬之曰我使列國多矣未見如
紀年便攷v15柳根格弟為従叔光門后明宗己酉生字晦夫號西坰又孤山黃廷彧門人又逰李滉門下宣祖壬申以生貟魁别試選湖堂歴銓郞典文衡卜相入耆社壬辰以前承旨随駕䇿扈聖㓛二䓁封晉原府院君丁酉為軆
紀年便攷v15特旨除孝元慶興府使吏判鄭大年兵判金貴榮䓁啓以極邉非書生所宜鎮守命換富寧因李珥啓又改為三陟府使初被奬於李滉曺植知為學之方在經幄補益弘多三爲守令十年在外未甞一入京師勤於職事見朝象潰裂嘆曰吾軰安得無罪李珥曰若使
紀年便攷v15金宇顒希參子中宗丁酉生曺植婿仍受業字肅夫號東岡又直峰布衣李滉門人居星州天姿瀅澈如氷壺秋月宣祖即位丁卯登明經科選湖堂歴南床副學大憲官止吏參有學識為經幄臣啓沃弘多與
紀年便攷v15許篈筬弟明宗辛亥生字叔美號荷谷柳希春門人又事李滉宣祖戊辰十八生壯壬申登親試選湖堂歴南床翰林銓郞舍人癸未以典翰誣陷李珥為專擅驕蹇始貶補昌原府使旋招二品
紀年便攷v15床舍人其在玉堂稱學士全才又以善書稱癸未以應教疏論朴淳李珥成渾伸救宋應漑黜為長淵博於經學尤善於論思甞従李滉問為學之方滉歎曰吾友不忘矣迪當朋黨之際特立不循俗官止執義辛卯卒年四十三六世孫教萬判尹周萬弟進士邪獄㐲
紀年便攷v15明一字彥純號雲巖天姿近道為師門所推年三十七殁明一弟復一字季純號南獄宣祖庚午登明經科官止司成五兄弟俱為李滉門人六父子享同院誠一序在明一之上
紀年便攷v15金誠一義城人文直學漢啓世祖朝不仕 玄孫生員璡号清溪子中宗戊戌生字士純號鶴峰李滉門人為兒嬉如有不合决然捨去其父曰此兒他日必不俯仰随世明宗甲子生進俱中宣祖戊辰登别試選湖堂歴翰林銓郞舍
紀年便攷v15柳成龍金誠一最相善所著有問答太極說癸巳卒年五十五謚文簡三兄弟文科弟敬中養中見下子㓜澄見下弟養中字公浩李滉門人宣祖壬申以生貟登别試歴翰林官止承旨
紀年便攷v15副學䇿扈聖㓛二䓁封完昌府院君官止戶判以東人中士流其所持論務在昭公滅私受業于順川君又逰金謹㳟之門執贄于李滉與柳成龍金誠一最相善所著有問答太極說癸巳卒年五十五謚文簡三兄弟文科弟敬中養中見下子㓜澄見下弟養中字公
紀年便攷v16閔應祺驪興人字伯嚮號尤叟李滉門人中司馬仍廢舉薦拜王子師傅宣祖深加眷顧賜以御製詩官止縣令
紀年便攷v16禹性傳仁烈七世孫以武經歴彦謙子為仲父䕃都事俊謙后中宗壬寅生許曄婿字景善號秋淵又淵菴李滉門人少滉四十一年與柳成龍同年生交道甚宻眼高於世間人少許可逰師門稍得善名而負才氣持訉辯淩駕士類自以為才
紀年便攷v16趙穆橫城人大春子中宗甲申生字士敬號月川又東臯李滉門人五嵗在父懐中口受大學深於性理其師期以程門楊謝明宗壬子進士薦授齋郞除外任俱不起惟陜川赴任前後除官四
紀年便攷v16朴光前珎原人進士而誼子中宗丙戌生字顯哉號竹川李滉門人華使㘴明倫堂諸生謁見不意兩注諸生皆奔避東西齋簷廡光前通前後一二行堅㘴滉大竒之柳希春薦士五人光前為
紀年便攷v16金就礪安山人定卿後文参判暉子字而精號潛齋李滉門人生進俱中官止正居京千里従遊輒久留焚香静對以度朝暮滉称其志尙
紀年便攷v16權字安東人生員大器子字定甫號松巢弱冠登李滉門中進士後仍廢舉以遺逸薦拜王子師傅遘痘不起年三十九士友惜之宣祖甞手書古詩十絶以賜之贈承㫖院享
紀年便攷v16天性樂昜有㘴上春風氣象與成渾李珥相友善入儒林筆苑丙申卒年六十七弟彦紀字季憲一張甫號考棸又静齋少遊李恒李滉金麟厚徐敬徳之門有學力宣祖戊辰生員薦拜教官官止别㘴并不就入筆苑弟彦縝字敬甫號雪厓遊李滉門又従李恒學䕃
紀年便攷v16又静齋少遊李恒李滉金麟厚徐敬徳之門有學力宣祖戊辰生員薦拜教官官止别㘴并不就入筆苑弟彦縝字敬甫號雪厓遊李滉門又従李恒學䕃仕止司評
紀年便攷v16南彦經智玄孫武牧使致勗子致勒従子中宗庚寅生字時甫號東岡徐敬徳門人又遊曹植李滉之門明宗朝以布衣召對称㫖授獻淩参奉由工佐拜砥平丙寅以砥平與掌苑韓修司畜李恒彦陽倅林薰同為入侍 上問治
紀年便攷v16朴澯字景清號雪峯十六道遇曹植下馬拱手曰子非南冥先生耶植曰世称之云耳自見植之後絶意名利又事李滉院享
紀年便攷v16卞成温草溪人字汝潤號壺巖學於金麟厚李滉温厚愿愨不求聞達卜築于壺谷不以三公昜其楽成渾朴淳貽書奬之始居宻陽移茂長
紀年便攷v16具思孟思顔弟申砬妹夫后中宗辛卯生字景時號八谷李滉門人明宗己酉十九進士戊午登明經科歴翰林舎人銓郞五道伯宣祖壬辰以保護王子之㓛超資憲拜吏判官止左䝺成入耆
紀年便攷v16文緯世長興人字叔章號楓巖與妺夫朴光前遊學李滉之門又事鄭逑絶意進取玩圖書訓學宣祖壬辰起義兵權慓以首㓛聞超拜縣令陞堂上官止牧使滉命兼學八陣圖法似逆覩
紀年便攷v16者師之句鄭琢寄書請留具鳯齡為銓長欲引為六品官好文著閑居錄以示之鳯齡難曰終老林下之志堅確不移何必强屈也李滉曰有儒者氣像又曰瀟灑山林之風柳成龍許以百世師宣祖丁亥卒年五十六子行可號楼湖拜参奉入京見爾瞻惡而棄歸
紀年便攷v16權好文安東人教授稜子中宗壬辰生字章仲號松巖李滉門人自學語能讀書曉文義八嵗有詩曰窓明知日上山白見雲生明宗辛酉進士親没不復應舉屡登薦章或称廉静寡慾或称
紀年便攷v16遇江華人以教授澹教子為季父進士浩教后中宗壬辰生字時中號香湖年十四仲父演教黨於乙巳奸凶累以書諫之親灸於李滉成渾。李珥之門明宗壬子以生員遊太學上䟽請復 貞陵又請各陵立表石以為久遠計以薦入仕歴十官多不就宣祖乙巳
紀年便攷v16李純仁全義人䕃縣監弘子中宗癸巳生字伯生號孤潭李仲乕門人李滉許其篤學與李珥成渾宋翼弼友善與簡昜崔岦龜峰宋翼弼孤竹崔慶昌玉峯白光勲鵝溪李山海重湖尹卓然青坡何應臨世
紀年便攷v16琴蘭秀儀後孫中宗庚寅生字聞遠號惺惺堂李滉門人中進士宣祖壬辰為禮安守城将官止判官滉許以人品甚高志節可尙雅愛山水有孤山别業甲辰卒年七十五贈左承㫖
紀年便攷v16裵三益興海人天錫子中宗甲午生字汝友號臨開李滉門人明宗戊午生貟甲子登明經科歴三司官止大司成天性至孝乗善愛人為文章以温婉為主茟法遒勁聘上國得褒奨以歸
紀年便攷v16文緯地克謙後孫字叔章號楓巖受業於李滉命兼習八陣圖似逆賭其當亂收效也與妹夫朴光前共遊滉門絶意進就結廬山中玩圖書教後學與世相忘宣祖壬辰起義兵
紀年便攷v16中宗乙未生鄭芝衍妹夫字浩源號默菴牛溪者學者所称白仁傑門人宣祖初舉遺逸不起天分甚高徳器早成㓜膺庭訓私淑李滉凖則考亭講明践履與李珥論四端七情氣先後說屡千萬言多有先儒所未發李珥甞曰若見觧所到吾差有長操履敦確吾所
紀年便攷v16先除七臣先王顧命七臣以折永昌羽翼兒時題小松曰数尺椎松古塔西塔高松短不相齊傍人莫笑椎松短他日松高塔反低李滉曰詩則大竒而有務勝之病可謂知人又知詩 仁祖癸亥正刑年八十八
紀年便攷v16宣祖癸酉薦卓行拜六品職又拜臺職性隂鷙豪橫嶺右為李山海腹心急於搆罪柳永慶投進一䟽又詆毀李滉成渾以李彦廸李滉之短其師曺植上䟽誣毀彦廸及滉太學儒生李楘䓁陳䟽訟辨且削仁弘儒藉持平朴汝樑為其師訐啓之李恒福曰曺植之門
紀年便攷v16鄭崑壽㧾六世孫胗思中子為仲父大護軍承門后權五紀孫婿中宗戊戌生字汝仁號栢谷又慶隂朝隠李滉門人宣祖即位丁卯進士丙子以司評魁别試歴東伯海伯壬辰如京師呈奏文七日呼哭又詣尙書石星痛哭哀訴癸巳得天兵
紀年便攷v16權春蘭安東人錫忠子中宗己亥生朴承任姪婿字彦晦號晦谷具鳯齡門人謁李滉諸學與柳成龍諸人講究疑義明宗辛酉進士宣祖癸酉登明經科歴翰林奉教輔德執義司諫永川義城皆辭在青松任所遭母
紀年便攷v16柳雲龍仲郢子中宗己亥生字應見號謙菴李滉門人以遺逸除别㘴宣祖壬辰後三為豊基郡守官止通政牧使選廉謹吏性俠介不楽俯仰流俗辛丑卒年六十三贈吏判謚文
紀年便攷v16金玏淡玄孫以文佐郞士文子為季父士明后中宗庚子生字希玉號柏巖李滉門人明宗甲子生貟宣祖丙子登明經科歴翰林三司官止吏参甞為寧越守為文祭 魯陵始置齋房及守直戶壬辰為嶺南安
紀年便攷v16吳澐高敞人守貞子守盈従子字大源號竹牗李滉門人居咸安明宗辛酉生貟丙寅登别試官止慶州府尹所著有東史纂要子汝稳見下
紀年便攷v16李徳弘永川人忠樑子賢輔従孫中宗辛丑生字宏仲號艮齋李滉門人宣祖戊寅以名儒拜集慶殿参奉歴副率壬辰随邸駕于成川官止知縣丙申卒年五十六以徒步勤王勞贈吏参郷人爼豆
紀年便攷v16金沔鐸孫武府使世文子秀文従姪中宗辛丑生字志海號松菴遊李滉曺植鄭逑之門舉孝廉授寢郞不就宣祖初陞工佐不赴壬辰與弟澮及趙宗道郭䞭文緯朴惺倡義於高靈居昌之間 上嘉之
紀年便攷v16洪可臣瀚曽孫别提昷子中宗辛丑生字興道號萬全又艮翁遊閔純李滉許曄之門宣祖即位丁卯進士辛未除参奉甲戊以才行卓異授六品官除持平掌令論事有古諍臣風歴扶餘水原壬辰倡郷人
紀年便攷v17鄭逑崑壽弟琢族侄金宏弼外曾孫中宗癸卯生字道可號寒岡又百梅園李滉門人又出入於吳健曺植之門與李瀷金沔遊生有異質見者稱以神童八歲受大學論語已通大義九歲執親丧無異成人手摸
紀年便攷v17李源陜川人字君浩號清香堂博學力行尊慕曺植李滉與鄭逑崔水慶契分甚厚好善惡惡出於天性鄕人爼豆之從子光友字和甫號竹閣早及曺植之門清貧自守於物慾泊如也權
紀年便攷v17趙振楊州人進士忠秀子彥秀再從侄字起伯李滉門人以遺逸官止工判封漢山君所著有丧祭問荅迎鳯臺記弟挺見下
紀年便攷v17南致利宜寧人藎臣子中宗癸卯生字義仲號賁趾李滉門人八歲而孤不待教督能辦志勵業以親故早事舉業輒不利恬如也滉奬許及滉沒而愈感奮不懈專心為己之學學明行高
紀年便攷v17宋言慎礪山人䕃府使嵂子慎希復外孫中宗甲辰生字寡尤號壹峰李滉門人宣祖丁丑以承訓郞登謁聖歴三司四道伯壬辰 上自平壤向寧邊言慎以本道監司留守大同城門與兵使李潤德避入
紀年便攷v17實治稱清簡官止僉正錄原從㓛贈左承旨曾孫弘茂見下玄孫鳯祥見下五世孫漢膺見下舜臣兄堯臣字汝欽號栗谷受業於李滉之門中進士子菶荄見下
紀年便攷v17曺好益允慎子仁宗乙巳生字士友號芝山李滉門人崔滉以都事差出籍兵賊任勒匡檢督於好益好益以居喪未禫不敢出滉怒至加刑杖以土豪啓聞至有江東徙邊之命距
紀年便攷v17戌以道德忠義加贈吏判太皇帝甲子賜謚文簡嘗謫居江東教誨後進蔚有西河之風故建院祀之仲兄光益字可晦號聚遠堂李滉門人燕山辛酉■生進俱中中宗甲子魁别試丙子以監察魁重試官止都事性至孝㫌閭叔兄希益字君望壬辰以生貟倡義好
紀年便攷v17世孫同樞仲淹子字叔正一仲止號臨谷宣祖於筵中論諸臣能否曰湜也拙筬也許筬固執湜感 上知遇因以自號曰用拙齋李滉門人又遊成運之門宣祖丙子登别試歴三司官止知樞入耆社見識精明用力於禮樂之書己丑以名在汝立門生錄故受刑一
紀年便攷v17金隆爾音六世孫以參奉應麟子為李父應龍后字道盛號勿菴年十六遊李滉門滉稱其文字細密通筭法窮天地之庶 宣祖壬辰傳檄列邑激以忠義以薦除齊郞尋卒贈承旨院享子起秋以遺逸官止承
紀年便攷v17權東輔安東人字震卿號青巖李滉門人䕃仕至郡守大世孫正忱見下
紀年便攷v17尹暾南原人文正字克新子暹從兄潔再從孫明宗辛亥生字汝昇號竹窓李滉門人宣祖己卯生貟乙酉登明經科歴南床翰林銓郞舍人副學官止吏判兄弟文科弟曄正言再從字汝明宣祖癸巳登文科官
紀年便攷v18甲辰上章辨明李彥廸乙巳事薦授召村察訪光海壬子登增廣官止通政大邱府使及政亂召以大司諌不起終老江湖始遊於李滉具鳳齡金誠一柳成龍之門居安東壬戌卒年六十三
紀年便攷v18外孫字可受李珥成渾門人宣祖辛丑進士丙午登明經科厯縣監官止典籍屡度上疏辨其師誣子惟健號櫟齋昏朝不仕䟽辨李滉李珥成軍被誣孫明運見下孫鳳朝見下
紀年便攷v18黃海水使見光海政乱謝病敀羅州壬戌卒年五十七与魯鴻同祖与姜沆同道同俘同功人剛愎自信不喜道德之士宣祖戊辰李滉既退鎧心不平語人曰景浩此行所得不少暫詣京師手握一品告身以為郷里榮豈不充然乎洪曇為吏判引鎧為大憲鎧大言
紀年便攷v18柳仲淹豊山人字希範號巴山李滉門人滉許其醇精年未四十夭
紀年便攷v18南弼文號操菴李滉門人中進士老而志學所著有心學摭要
紀年便攷v18朴遂一密陽人字純伯年十七徃謁李滉于禮安滉頗許之初參别試不利於殿試自是不復留意舉業遂奮為己之學宣祖丁酉倭再動遇㓙鋒罵不絶口而死
紀年便攷v19金宏弼鄭汝昌趙光祖李彦廸李滉五賢自宣祖初年舘學及諸道儒生䓁連䟽請従祀至是始命許之鄭仁弘䟽詆彦廸及滉盖其意拔去両賢代其師曺植也
紀年便攷v20五十三人終身不叙者四人金悌男夫人濟州為婢時牧使梁濩待之無狀至是拿来伏誅仁弘以曺植門人因私憾力排李彥廸李滉交結爾瞻至入相凡光海亂政仁弘仁弘實賛成之至是誅之又誅嬖人李益燁大燁李茳閔藻趙龜壽寵宦等
紀年便攷v21齋尹根壽門人三歲戲排棊子有易卦象八歲草疏論辨邪正宣祖壬寅登別試光海政亂以玉堂退居新昌鄭仁弘醜辱李彥迪李滉翼上箚辨之黜爲高山察訪廢毋論起棄官歸村墅與朴知誡權得已講論自娛以經術聞而學行俱篤仁祖反正首拜佐郞選湖
紀年便攷v27十五年遣福善君柟䓁如燕卞誣柟奏言仁祖反正明史中紀事爽宲至有臣子不忍聞者上命賓㕔會議乃遣柟䓁○賜文純公李滉安東地院額號因安東止員李亘䟽請也○㝎宣祖世室○設軆府廰尹鐫䓁以國勢危疑請設軆府於許積家拜積為都軆察使
東國歷代總目v02追削南衮等爵○己巳冊朴氏爲妃潘城府院君應順之女卽懿仁王妃○庚午前贊成李滉卒○滉字景浩號退溪眞寶人中廟朝登第就仕尋還鄕明廟嘗使人畵其所居陶山精舍以觀及上卽位召致擢用滉撰進聖學
東國歷代總目v02己酉元年皇明神宗萬曆三十七年殺臨海君珒光海惡其逼己誣以謀逆殺之○庚戌以金宏弼鄭汝昌趙光祖李彦迪李滉從祀文廟從太學疏請也○壬子殺詩人權韠○時宮戚柳希奮等預政專恣韠賦詩有宮柳靑靑鶯亂飛之句光海聞之以宮柳
見睫錄v1領相忠正公李浚慶判中樞文純公李滉
見睫錄v1宣祖元年李滉上箚進聖學十圖一太極圖二西銘圖三小學圖四大學圖五白鹿洞規圖六心統性情圖七仁說圖八心學圖九敬齋箴圖十夙
記聞v1朴忠元趙士秀洪暹任說金祺丁應斗宋猉壽林亨秀南應雲尹仁恕尹鉉鄭惟吉李洪男李湛閔箕金澍李滉朴承任金獜厚李元祿盧守愼中宗大提學金安老蘇世讓金安國成世昌
記聞v1識者恨之請令禮官與儒臣議定俾合臣服君喪之正禮禮曹請令大臣及儒臣等會同一處完定依達領敦寧李景奭議以爲李滉之爲此議也故相臣朴淳以禮官持難而不之改金集之此禮也故相臣金尙憲有所持難臣亦有所難焉領相鄭太和議以爲
記聞v1宣廟元年大提學朴淳啓曰大提學提學雖是同是館閣之職提學之任不如大提學之重也今臣爲主文而李滉爲提學高年碩儒反居小任而後進初學之士乃處重地請遞其任以授之命議于大臣皆以淳言爲然於是命與相換先生遂
野乘v1○以文敬公寒暄金宏弼文獻一蠧鄭汝昌文正公静奄趙光祖文元公晦齋李彦廸文純公退溪李滉五賢従文庙以三學生諸道士子两司合啓従之
龍問門答v1翁入京老峯文谷光城諸人各言事機本末尤翁乃曰如此則益勳非其罪也淸城不無衛社之功白上曰昔文純公李滉有弟子趙穆文純之死後視其子孫有若同氣至誠誡勅俾無過失當時咸稱趙穆爲師盡誠矣今臣少事文元公金長生
歷代帝王紀年v01文純公李滉
歷代帝王紀年v01退溪李滉字景浩號退溪眞城人生而異質穎悟絶人初中進士遂有求道之志不屑科業爲母登第位至一品中年退卜陶山博覽經紀深
歷代帝王紀年v01金獜厚河西李義健峒隱李滉退溪
國朝捷錄v01妻愼承善女有戊午甲子史禍一蠧鄭汝昌配鍾城甲子卒于謫所戊午寒暄堂金宏弼配熙川甲子就刑弘治十四年辛酉退溪李滉生○戊午以宗直作吊義帝文部棺斬屍壬戌虛庵鄭希亮不知逃去處甲子追罪南秋江孝溫以王大妃命癈燕山策晉城大君
國朝捷錄v01李 滉
國朝捷錄v01孟洪暹見相錄鄭惟吉見相錄朴忠元字仲初號駱村別坐藻子儐許國吏判文景公奇服齋門人宣祖朝朴淳見相錄儐歐希稷李滉字景浩號退溪贊成再典塡子文純公盧守愼光州人大海父儐韓世能見相錄金貴榮見相錄李珥字叔獻號栗谷贊成元秀子
國朝捷錄v01蘇世讓彦謙退休左成金麟厚河西校理朴彭年仁叟琹軒刑判蜀體宋寅明仲頤庵治禮學礪城君蜀體李忠元松庵吏佐蜀體李滉退溪晋體成渾牛溪聽松體成守琛仲玉自作體奇古不俗縣監李濟臣淸江蜀體字夢應李珝珝或作瑀李獻玉山栗谷弟又善
國朝捷錄v01揚震文參判劾金安老號虛堂東皐妻父金詮見相仁穆王妃高祖孝行姜叔突護軍李善長郡守李榮會寧府使金鉤江界府使李滉見上宋益璟李眞彦又號拙庵文右成號秋川字君美全州人白仁傑休庵贊成鄭崑壽判書金晬李光庭延原府院君判書之億
國朝捷錄v01李天啓舍人亨伯權勿介之韓澍安景佑權撥見上安馠注書成世昌見相韓淑參判李爓沈荃翰林李瀣參判退溪兄李湛湖堂李滉退溪沈鎬洪奉世當在己卯景霖孫判決事李德應注書朴光佑熙顯八代祖應敎郭瑜敬齋司諫鄭希登掌令李霖羅湜李彦迪
國朝捷錄v01宣祖大王室領議政忠正公東皐李浚慶左贊成文純公李滉
文獻攷略v1復神德王后立主處所收議領中樞李景奭議丁丑亂後廟主新造之位奉安于世子宮別堂仍爲改題之所則臣請倣先正臣李滉所論就廟內而行之
文獻攷略v1次太祖居北南向昭穆東西向而殿宇南北短東西長仁明合祔則殿窄不容故大臣欲柝開殿宇補其南以容加設之位判中樞李滉以爲古者祫享之位太祖東向昭穆南北向我朝
重訂南漢志v1東廡弘儒侯薛聡文成公安珦文敬公金宏弼文正公趙光祖文純公李滉文簡公成渾文正公宋時烈文純公朴世采在東北向東上
靑邱風雲v1註下所謂溪訓者卽退溪所訓退溪卽李滉號也眉訓者卽眉岩柳希春所訓也無標識者退溪門人所記或後人所增云加圈者卽同春宋浚吉新註也
靑邱風雲v1後學與書尺往復率多用之蓋欲人之易曉而顧我東聲音言語謠俗不同反有難曉者此解之所以作也舊本初出於先正臣李滉門人所記而隨手箚錄實欠精粹向者故掌令臣鄭瀁就漢語集覽中拈出如干語以補前錄之未備者然其書不出一人之手
韓史綮v1乙卯十年明世宗嘉靖三十四年禮安人李滉遂於理學始登第爲校理與李彦迪上疏言時事頗有希世意旣而大獄屢興兄淸洪觀察使瀣非辜竄死滉自是慨然有
韓史綮v1丙寅二十一年明世宗嘉靖四十五年王旣除權奸革弊政欲登庸淸流而尤傾嚮於李滉超拜工曹判書滉辭不肯至王益重之密遣畫工模其所居陶山形勝以觀之○初曹植不應中宗召命及王卽位上封事曰
韓史綮v1宣祖昭敬王元年明穆宗隆慶二年春二月日有暈仁順王后曰日變之作良由未亡人聽政也卽命撤簾○夏五月以李滉爲判中樞府事先是明宗以明使來授滉製述官召之曰非卿無以接明使滉不得已應命旣至京明宗晏駕王拜爲禮
韓史綮v1仁傑旣起用爲楊州牧使有治聲召拜直提學未幾仁傑辭退王重其苦節春三月超授大司憲仁傑感而應命○判中樞府事李滉引病請歸王許之而不遞職○時文臣讀書湖堂者例呈一月所作詩文李珥在湖堂之選秋七月進東湖問答數萬言其中所
韓史綮v1庚午三年明穆宗隆慶四年冬十二月判中樞府事李滉卒年七十王聞而嗟悼賜賻甚厚滉所論著性命理氣之說甚富於朝鮮以來諸儒中爲最盛而尤深於涵養李珥嘗曰趙靜
韓史綮v1月吏曹判書李珥卒年四十九王聞計發聲哀哭太學生及市民奔哭者相望於道珥善事庶母日必拜省於經多所發明與李滉竝峙爲朝鮮理學之宗世謂之栗谷先生
韓史綮v1沒掠賊於畿境王聞之賞陞大司成于時性傳追賊南下斬馘頗多至宜寧勞瘁疾發卒性傳高麗大臣仁烈之後學於李滉著理氣說於人少許可意所不取對而不與語以此多怨於人坎坷窮困聰力絶人嘗出監水原一閱訴牒數千便燒之吏胥大駭
東國續修文獻錄v1宣祖朝朴淳見相湖堂李滉見湖堂再典金貴榮見相湖堂盧守愼見相湖堂李珥見湖堂李山海見相臣湖堂再典李陽元見相湖堂柳成龍見相湖堂李德
東國續修文獻錄v1議尹仁恕士推打乖珍子坡平人戶參尹鉉子用菊磵都正承弘子坡平人戶判忠簡鄭惟吉吉元林塘府使福謙子東萊人左相李滉景浩退溪進士埴子眞寶人贊成文純配文廟李洪男士重汲古主簿若氷子慶州人工議李湛仲久靜存引儀完蕤子龍仁人
東國續修文獻錄v1庵治禮學文靖蜀成渾見儒林金魯景參東皐希壽子直學蜀李瑀季獻玉山善畫琴栗谷弟金麟厚見湖堂李忠元松菴蜀李滉見儒林李山海見相蜀李文楗卞巚楊士彥應聘蓬萊李海龍寫字官黃耆老孤山金玄成慶餘南窓蜀金景熹用晦蘆溪生員韓
國朝人物志v1李滉
國朝人物志v1位起廢拜大司成時靜菴諸賢皆萃於朝倡明道學皆撤皐比以推先生先生亦自喜諄諄不倦文純公李滉每以所聞於先生者擧而言之學者稱尹先生其所誦大學格致之說不失於晦翁之遺旨也南衮沈
國朝人物志v1司諫蔡紹權等請罪翌年賜死淨臨絶貽書兄弟勉養老母年三十六取兄光之子哲葆爲嗣宣祖初李滉白上曰中廟將興三代之治趙光祖金淨奇遵等協心贊襄四方風動由衮貞網打上命奪
國朝人物志v1處謙謀害大臣礩弟磌連累栲死坐配于禮安雖重遭家禍曠然理遣未嘗有戚戚意官至廣興倉奉事女壻李滉撰墓碣
國朝人物志v2等用事乃削奪官爵丁未壁書禍起被竄梁山辛亥放還復入玉堂宣祖初年入對首陳振作士氣盛稱李滉賢德請雪趙光祖冤湛歷副提學官至忠淸道觀察使平居晨起焚香端坐讀書尤好讀易至忘寢食
國朝人物志v2士許忠吉金禧年以上杖流縣監梁允信判官安景祐金應貞吏曹佐郞盧守愼司諫李首慶李滉黃博右尹權應挺參判權應昌李浚慶宋純承旨李文楗正郞李元祿贊成閔齊仁
國朝人物志v2道可號寒岡淸州人八歲受大學論語通大義十二受易乾坤於吳德溪推類而通見陶山李滉講心經遂棄擧業專心經學金宇顒白上曰有鄭某者遊李滉鄭某曺植門明於經術可以
國朝人物志v2字希玉號柏谷禮安人正言士文子淡玄孫從退溪李滉學甲子生員丙子文科歷翰苑箚論君德甚切上召前責曰爾謂予英睿太過何據也對曰如今日事是也上益
國朝人物志v2拜大司憲接伴明使使見其禮儀中度凜然起敬及與酬唱歎曰宋人物唐詩調也拜大提學啓曰臣爲主文而李滉爲提學高年碩儒反居小任而後進初學乃處重地請移授李滉判書金鎧欲陷諸賢松江鄭澈
國朝人物志v3字浩仲號二志堂高靈人承旨景洛子出繼牧使景植後甲子進士甲申文科爲弼善進李滉聖學圖每講畢使小宦張傘而送金自點被黜洬以舅甥義不安於朝出知延安及自點被誅洬爲楊州牧
國朝人物志v3字遠而淸州人孝仲子宣祖乙巳生員光海丙辰文科歷兩司鄭仁弘誣毀文純公李滉必遠掌太學議削仁弘儒籍士論稱快光海將重究賴有救者而得免官至參判王子王孫嘗有坐其母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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