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이항로(李恒老)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C774D56DB85CB1792X0
초명(初名)이광로(李光老)
자(字)이술(而述)
호(號)화서(華西)
시호(諡號)문경(文敬)
생년1792(정조 16)
졸년1868(고종 5)
시대조선후기
본관벽진(碧珍)
활동분야학자 > 성리학자
이회장(李晦章)
전의이씨(全義李氏)
외조부이의집(李義集)
출신지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노문리
저서『화서집』
저서『화동역사합편강목(華東歷史合編綱目)』
저서『주자대전차의집보(朱子大全箚疑輯補)』
저서『벽계아언(檗溪雅言)』

[관련정보]

[상세내용]

이항로(李恒老)
1792년(정조 16)∼1868년(고종 5).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 본관은 벽진(碧珍). 초명은 이광로(李光老)였으나 철종 사친(私親)의 이름을 피하여 개명하였다. 자는 이술(而述), 호는 화서(華西).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노문리 출신.

이회장(李晦章)의 아들이며 모친은 전의이씨(全義李氏) 이의집(李義集)의 딸이다.

3세 때 『천자문』을 떼고, 6세 때 『십구사략(十九史略)』을 읽고 「천황지황변(天皇地皇辨)」을 지었다.

12세 때 신기령(辛耆寧)에게서 『서전(書傳)』을 배웠다.

1808년(순조 8) 반시(泮試: 한성초시)에 합격하였으나, 당시 권력층의 고관이 과거급제를 구실로 자기 자식과의 친근을 종용하자 이에 격분하여 과장의 출입마저 수치스럽다 하여 끝내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과거를 포기한 뒤 당시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던 서울임로(任魯)지평이우신(李友信) 등을 찾아가 학우의 관계를 맺고, 25∼26세 때 어버이와 사별한 뒤 학문에 전념하였다.

30세 때 그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하여 청년들이 많이 모여들었으나 세속을 피하여 쌍계사‧고달사 등의 사찰을 옮겨다니며 사서삼경과 『주자대전(朱子大全)』 등 성리학연구에 힘을 쏟았다.

그뒤 그의 학덕이 조정에 알려져 1840년(헌종 6) 휘경원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그뒤에도 지방수령 등에 제수되었지만 고사하고 향리에서 강학을 위하여 여숙강규(閭塾講規)를 수정하여 실시하였다. 이 무렵 한말의 위정척사론자로 유명한 최익현(崔益鉉)김평묵(金平黙)유중교(柳重敎) 등이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62년(철종 13) 이하전(李夏銓)의 옥사에 무고로 체포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1864년(고종 1) 당시의 권력자 조두순(趙斗淳)의 천거로 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전라도사지평장령 등에 임명되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모두 거절하였다.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동부승지의 자격으로 입궐하여 대원군에게 주전론을 건의하기도 하였으며, 그뒤 공조참판으로 승진되고 경연관(經筵官)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대원군의 비정(秕政)을 비판한 병인상소를 올리고 만동묘(萬東廟)의 재건을 상소한 바도 있는데, 이 상소로 대원군의 노여움을 사서 삭탈관직당한 뒤 낙향하였다.

그의 학문은 주리철학(主理哲學)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호남의 기정진(奇正鎭), 영남의 이진상(李震相)과 함께 침체되어가는 주리철학을 재건한 조선조 말기 주리철학의 3대가의 한 사람이다.

그의 주리철학은 이기합일설(理氣合一說)을 주장한 중국나흠순(羅欽順)일파의 우주론을 반대하고 이(理)와 기(氣)를 엄격히 구별하는 동시에 그것을 차등적으로 인식하였다.

즉, ‘이’가 주가 되고 ‘기’가 역(役)이 되면 만사가 잘 다스려져 천하가 편안할 것이나, 만일 반대로 기가 주가 되고 이가 버금이 되면 만사가 어지러워져 천하가 위태로울 것이라 하고 이‧기를 차등적으로 보았다.

또, 주리론에 기초를 둔 심전설(心專說), 즉 심즉리(心卽理) 심즉기(心卽氣)설을 반대하고 심합이기설(心合理氣說)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존기비(理尊氣卑)를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중교가 비판하였듯이 이리단심(以理斷心)의 이론이라 할 수 있으니 그의 심설은 심전설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사상은 심전주리론에 그 기초가 깔려 있다. 따라서, 그의 심전주리론은 존왕양이(尊王壤夷)의 춘추대의(春秋大義)라는 윤리와 아울러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처럼 하고, 나라 걱정하기를 내집처럼 한다는 애국사상과 자주의식을 강조함으로써 조선조 말기의 민족사상인 위정척사론의 사상적 기초가 되고, 나아가서 민족운동의 실천적 지도이념으로 승화되었다.

저서로는 『화서집』『화동역사합편강목(華東歷史合編綱目)』 60권, 『주자대전차의집보(朱子大全箚疑輯補)』, 『벽계아언(檗溪雅言)』 12권 등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참고문헌]

華西集
朝鮮儒敎淵源(張志淵, 海東書館, 1922)
朝鮮儒學史(玄相允, 民衆書館, 1949)
韓國哲學史(劉明鍾, 韓明文化社, 1963)
韓末의 民族思想(洪淳昶, 探求堂, 1975)
李恒老(申奭鎬, 朝鮮의 儒學者 8人, 新丘文化社, 1974)
李恒老의 衛正斥邪思想(洪淳昶, 讀書新聞 270, 1976)

[집필자]

홍순창(洪淳昶)

명 : "항로(恒老)"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高宗太皇帝行狀v1撫營以李景夏爲使李容熙爲中軍閱月防守九月千摠梁憲洙大破之于鼎足山城賊擧帆遁召見工曹參判李恒老于誠正閣恒老陳嘉謨大義嘉納之命出入經筵十一月以明年慈齡滿六旬議大臣禮堂追上
韓史綮v3加折辱遣禁府官以天主敎徒逮之恒老旣至京大院君作驚曰此林下士也寧有染邪敎者乎令政府奏除承旨不日陞大司憲恒老痛陳時弊辭職而去恒老敎弟子以宋時烈尊攘之論爲進修之首義曰古今遭夷狄之患者孔子朱子宋子三人云○夏美利堅
韓史綮v3敎徒逮之恒老旣至京大院君作驚曰此林下士也寧有染邪敎者乎令政府奏除承旨不日陞大司憲恒老痛陳時弊辭職而去恒老敎弟子以宋時烈尊攘之論爲進修之首義曰古今遭夷狄之患者孔子朱子宋子三人云○夏美利堅人崔蘭軒欲與朝鮮通商
韓史綮v3至二文○大院君性不好儒然以國家故事國王新立必延懦師將徵楊根經儒李恒老欲先加折辱遣禁府官以天主敎徒逮之恒老旣至京大院君作驚曰此林下士也寧有染邪敎者乎令政府奏除承旨不日陞大司憲恒老痛陳時弊辭職而去恒老敎弟子以
韓史綮v3廷之和日本卽和西洋之漸也宜斥日本以淸其源竄之黑山島初李恒老常言淸人夷狄而西洋禽戰也身不服洋布益鉉師事恒老故有是論焉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1-04-10이항로 선생 생가를 참고하여 출신지를 "경기도 포천"에서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노문리"로 수정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