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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후(金麟厚)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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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후지(厚之)
호(號)담재(湛齋)
시호(諡號)문정(文靖)
생년1510(중종 5)
졸년1560(명종 15)
시대조선전기
본관울산(蔚山)
활동분야학자 > 유생
김영(金齡)
옥천조씨(玉川趙氏)
출신지전라도 장성
저서『하서집(河西集)』
저서『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
저서『서명사천도(西銘四天圖)』
저서『백련초해(百聯抄解)』

[상세내용]

김인후(金麟厚)
1510년(중종 5)∼1560년(명종 15). 조선 중기의 유학자‧문신.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 또는 담재(湛齋). 본관은 울산(蔚山).

전라도 장성 출신. 부친은 참봉 김영(金齡)이며, 모친은 옥천조씨(玉川趙氏)이다.

열살 때 김안국(金安國)에게서 『소학』을 배웠고, 1531년에 성균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 이황(李滉) 등과 교우가 두터웠다.

1540년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등용되었으며, 이듬해에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하고, 홍문관저작(弘文館著作)이 되었다.

1543년에 홍문관박사 겸 세자시강원설서홍문관부수찬이 되어 세자 보도(輔導)의 임을 맡았다.

특히, 기묘사화 때 죽음을 당한 제현(諸賢)의 원한을 개진하여 문신으로서 본분을 수행하였다. 그해에 부모의 봉양을 위해 옥과현감(玉果縣監)으로 나갔다. 중종이 죽자 제술관(製述官)으로 서울에 올라왔으나, 일년도 채 못되어 인종이 죽고 곧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이유로 고향 장성에 돌아갔다.

그뒤 1554년까지 성균관전적공조정랑홍문관교리성균관직강 등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시문에 능하여 10여권의 시문집을 남겼으나 도학에 관한 저술은 많지 않다.

그러나 성리학 이론은 유학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당시 이항(李恒)기대승(奇大升)사이에 논란되었던 태극음양설에 대하여 이항의 태극음양일물설(太極陰陽一物說)을 반대한 기대승에 동조하여, 인심과 도심은 다 그 동처(動處)를 두고 이른 말임을 주장함으로써, 후일 기대승의 주정설(主情說) 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학문은 성경(誠敬)을 주안으로 하였기 때문에 노수신(盧守愼)과 더불어 숙흥야매잠해(夙興夜寐箴解)를 논한 것을 보면, 마음이 일신을 주재한다는 노수신의 설을 비판하면서, 마음이 일신을 주재하지만 기(氣)가 섞여서 마음을 밖으로 잃게 되면 주재자를 잃게 되므로, 경(敬)으로써 이를 바르게 하여야 다시금 마음이 일신을 주재할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하여, 이른바 주경설(主敬說)을 내놓았다.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律曆)에도 정통하였다. 제자로는 정철(鄭澈)변성온(卞成溫)기효간(奇孝諫)조희문(趙希文)오건(吳健) 등이 있으며, 1796년(정조 20)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장성필암서원(筆巖書院), 옥과영귀서원(詠歸書院)에 제향되었으며,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하서집(河西集)』『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서명사천도(西銘四天圖)』『백련초해(百聯抄解)』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참고문헌]

河西集
中宗實錄
明宗實錄

[집필자]

이을호(李乙浩)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