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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목(趙穆)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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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사경(士敬)
호(號)월천(月川)
생년1524(중종 19)
졸년1606(선조 39)
시대조선전기
본관횡성(橫城)
활동분야문신 > 문신
조대춘(趙大椿)
안동권씨(安東權氏)
외조부권수익(權受益)
저서『월천집』
저서『곤지잡록(困知雜錄)』

[상세내용]

조목(趙穆)
1524년(중종 19)∼1606년(선조 39).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횡성(橫城). 자는 사경(士敬), 호는 월천(月川).

부친은 참판 조대춘(趙大椿)이며, 모친은 안동권씨(安東權氏)권수익(權受益)의 딸이다.

3세에 글을 읽기 시작하였으며, 12세에 사서삼경을 다 읽었다.

15세 때에 이황(李滉)의 문하생으로 들어가서 학업에 더욱 정진하였다.

23세에 어머니 상을 당하였는데, 효심이 지극하여 이황은 대성할 그릇이 약관으로 몸을 상하지나 않을까 염려할 정도였다.

1552년(명종 7)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대과(大科)는 포기하고 독선일신(獨善一身)에만 매진하였다.

1566년 공릉참봉에 봉직되었으나 학덕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이황을 가까이 모시면서 경전연구에 주력하였다.

그뒤 성균관수천(成均館首薦)에 피선되고, 집경전참봉(集慶殿參奉)에 제수되었으며, 1572년(선조 5) 이후 동몽교관종부시주부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공조좌랑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576년 봉화현감에 제수되자 사직소를 올렸으나 허락되지 않아 봉직하면서 향교를 중수하였다.

1580년 이후 전라도도사경상도도사충청도도사형조좌랑신녕현감영덕현령전생서주부공조정랑상서원판관금산단양합천 등의 군수, 장원서장원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594년 군자감주부로 잠시 있으면서 일본과의 강화를 극력 반대하였다.

그뒤 장악원정사재감정예빈시정공조참의공조참판 등을 제수받았으나 모두 재덕과 노병을 이유로 사직소를 올려 사퇴하였다. 그는 이황과 동향인 예안에서 생장하여 일찍 이황의 문하생이 된 이후로 일생 동안 가장 가까이 스승을 모신 팔고제(八高弟)의 한 사람이다.

이황이 죽은 뒤 문집의 편간, 사원(祠院)의 건립 및 봉안 등에 있어서 항상 성의를 다하였고, 마침내 도산서원 상덕사(尙德祠)에 유일한 배향자가 되었다.

그는 신민(新民)보다 명덕(明德)을 중시하여 벼슬은 사양하고 현사사(玄沙寺)광흥사(廣興寺)에 들어가 독서를 즐겼으며, 이황을 수행하며 명산대천을 주유하면서 심신을 수양하였고, 경학을 연찬하되 이기설보다는 훈고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심학(心學)에 심취하여 『심경(心經)』에 관한 논설이 많다.

또, 외직에 부임하면 향교를 중수하고 서당을 신설하는 등 고을의 교육진흥에 이바지하였으며, 귀향하여서는 매년 역동서원(易東書院)도산서원을 참배하여 현인의 넋을 기리고 자신의 몸가짐을 더욱 돈독히 닦아나갔다.

그의 일생의 주된 업적은 이황에 대한 소술(紹述)과 존봉(尊奉)에 있다 하겠다. 그의 문집에 이황에 관계된 글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음이 이를 잘 증명하고 있다.

평생을 청빈하게 지내면서 온후, 겸양, 독실한 실천을 지향하였다.

제자로는 김중청(金中淸)이광윤(李光胤)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월천집』『곤지잡록(困知雜錄)』이 있다.

[참고문헌]

國朝榜名錄
月川集

[집필자]

김도기(金道基)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