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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시한(丁時翰)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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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군익(君翊)
호(號)우담(愚潭)
생년1625(인조 3)
졸년1707(숙종 33)
시대조선중기
본관나주(羅州)
활동분야학자 > 성리학자
정언황(丁彦璜)
횡성조씨(橫城趙氏)
증조부정윤복(丁胤福)
출생지서울
저서『우담집(愚潭集)』

[상세내용]

정시한(丁時翰)
1625년(인조 3)∼1707년(숙종 33).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군익(君翊), 호는 우담(愚潭). 서울 출생.

대사헌 정윤복(丁胤福)의 증손으로, 관찰사 정언황(丁彦璜)의 아들이며, 모친은 횡성조씨(橫城趙氏)이다.
1. 관로
강원도 원주 법천(法泉)으로 낙향하여 평생 벼슬길을 멀리하고, 오직 이현일(李玄逸)이유장(李惟樟)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에 힘썼으며, 성리학의 연구와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사헌부집의성균관사업의 벼슬이 내려졌으나, 이를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690년(숙종 16)「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을 것’, ‘집안 다스리기를 엄격히 할 것’, ‘나라의 근본을 배양할 것’, ‘조정을 바르게 할 것’, ‘인재를 쓰고 버림에 신중히 할 것’, ‘언로를 열 것’의 6조를 제시하였는데, 이 상소의 구절에 임금이 분노하여 관직을 삭탈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뒤 세자시강원진선으로 나아갔다.

1691년 서인을 몰아내고 남인이 집권하는 권력교체의 기사환국을 맞았을 때, 그 자신은 남인에 속하면서 인현왕후를 폐위시킨 일이 잘못이라고 상소를 올렸다가 삭직당하기도 하였으며, 이해에 다시 기용되었으나 사퇴하고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1694년 서인들이 민비(인현왕후) 복위운동을 일으켜 갑술옥사가 일어나 민비가 복위되어 서인이 집권하고 남인이 실세하자, 1696년 희빈 장씨가 정비에서 희빈으로 강등하는 데 대하여 다시 반대상소를 올렸다.

이처럼 그는 당파적 입장을 떠난 자신의 일관된 의리론적 입장을 지키고 있다.
2. 인품
그의 생애와 인품에 대하여 『숙종실록』에서 사신(史臣)은 “일찍부터 과거공부를 버리고 편안하게 고향에서 지냈다.

어버이를 섬겨 효도하였으며, 성품이 공손하고 조심스러워 남과 비교될 바가 아니었다. 가정은 가난하지 않았으나 검약을 법도로 삼았다.

그의 어머니가 천수(千壽)를 다하고 그의 나이 이미 60인데도 능히 상제(喪制)대로 다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이를 칭송하였다.”라고 하여, 산림도학자의 고결한 풍격을 보여준다.

저술에는 문집인 『우담집(愚潭集)』을 비롯하여 「임오록(壬午錄)」‧「만록(漫錄)」‧「산중일기(山中日記)」‧「관규록(管窺錄)」‧「사칠이기변(四七理氣辨)」‧「변무록(辨誣錄)」 등이 있다.
3. 학문
그의 학문적 업적은 성리설의 ‘이기론’과 ‘사단칠정론’을 정밀하게 분석하여 이황(李滉)의 입장을 명석하게 해명하고 도통을 계승한 데 있다. 따라서, 이익(李瀷)정시한의 학문적 공적을 평가하여 “학문의 정맥(定路)에 거슬러올라가 이어감으로써 「사칠변증(四七辨證)」을 저술하니 크게 빛나서 밝았다.”라고 지적하였다.

정약용(丁若鏞)도 “정구(鄭逑)장현광(張顯光) 이후로 진정하고 순수한 유학자(眞儒醇學)는 오직 선생 한분뿐이다.”라고 강조하였다.

그의 성리설에서는 ‘이(理)’와 ‘기(氣)’의 관계를 현상적으로 주인과 보좌의 역할에 상응시켜 이주기보설(理主氣輔說)에 의하여 이기사칠설(理氣四七說)을 전개한다. 그는 기를 이의 보조자로 규정하고, 이를 주재하고 명령하는 자로 일관되게 주장하였다.

또한, 이를 본원(本原)과 산수(散殊)의 양면적으로 인식할 것을 요구하고, 이‧기의 관계에서도 혼륜(混倫)과 분개(分開)의 두 형식을 동시에 인정함으로써 일원론이나 이원론으로 극단화하기를 거부한다. 곧, 현상적으로는 이‧기의 혼융무간(混融無間)함을 인정하지만, 수양을 위해서는 이가 기를 조종하는 것이 필수적임을 강조한다.

그는 이황의 학설을 계승하는 과정에서, 이현일이 「수주관규록(愁州管窺錄)」(1695)을 통하여 이이(李珥)의 성리설을 비판함으로써 퇴계학파의 형성에 선구적 역할을 한 데 이어서, 「사칠변증」을 저술하여 이이의 성리설을 41조에 걸쳐 조목별로 비판함으로써 퇴계학파의 형성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그는 이이의 성리설이 ‘혼륜’에 집착한 ‘기’일원론임을 지적하고, 특히 인심(人心)‧도심(道心)이 서로 시작과 끝이 되어 연결된다는 이이의 주장은 명나라 나흠순(羅欽順)의 입장과 일치하며 주희와 상반되는 것이라 하며 거부한다.

그는 이황의 이발설(理發說)은 ‘이기구발(理氣俱發)’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여 이이의 기발설(氣發說)을 비판하며, 또한 이에도 통(通)‧국(局)이 있고, 기에도 통‧국이 있다 하여, “이는 소통하고 기는 국한한다(理通氣局).”는 이이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그는 1700년부터 3년 동안 문인 이식(李栻)과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의 동이문제(同異問題)에 관한 논변을 벌이면서 자신은 인물성상이론(人物性相異論)의 입장을 전개하였는데, 그것은 기호학파인 한원진(韓元震)이간(李柬) 사이의 인물성론인 호락논쟁(湖洛論爭)에 선행하는 것이다.

그의 문하에서는 이식황수일(黃壽一)이만부(李萬敷)권두경(權斗經) 등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이익은 그의 묘갈명을 지었고, 정약용은 「방친유사(傍親遺事)」에서 정시한의 학덕을 존숭하고 있다. 원주광암사(廣巖祠)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愚潭集
愚潭丁時翰硏究(劉明鍾, 韓國儒學硏究, 以文出版社, 1988)
愚潭丁時翰의 理主氣輔說과 人物性同異論辨(劉明鍾, 韓國儒學硏究, 以文出版社, 1988)

[집필자]

김장태(琴章泰)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