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인(宋寅)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C1A1C778FFFFB1517X0 |
자(字) | 명중(明仲) |
호(號) | 이암(頤庵) |
시호(諡號) | 문단(文端) |
생년 | 1517(중종 12) |
졸년 | 1584(선조 17)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여산(礪山) |
활동분야 | 학자 > 유생 |
부 | 송지한(宋之翰) |
모 | 의령남씨(宜寧南氏) |
조부 | 송질(宋軼) |
처 | 정순옹주(貞順翁主) |
저서 | 『이암유고』 |
[상세내용]
송인(宋寅)
1517년(중종 12)∼1584년(선조 17). 조선 전기의 학자.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명중(明仲), 호는 이암(頤庵).
영의정 송질(宋軼)의 손자이며, 송지한(宋之翰)의 아들이고, 모친은 의령남씨(宜寧南氏)이다. 어려서 어머니가 죽자 외가에서 자랐다.
10세에 중종의 셋째서녀인 정순옹주(貞順翁主)와 결혼하여 여성위(礪城尉)가 되고, 명종 때 여성군(礪城君)에 봉해졌다. 의빈부‧충훈부‧사옹원‧상의원 등에서 요직을 역임하고, 도총관에 이르렀다.
시문에 능하였으며 이황(李滉)‧조식(曺植)‧이민구(李敏求)‧정렴(鄭𥖝)‧이이(李珥)‧성혼(成渾) 등 당대의 석학들과 교유하였으며, 만년에는 선조의 자문 역할을 하였다.
글과 글씨에 능하여 산릉(山陵)의 지(誌)와 궁전의 액(額)으로부터 사대부의 비갈(碑碣)에 이르기까지 많은 글과 글씨를 남겼다. 그는 특히 오흥(吳興)의 필법을 받아 해서를 잘 썼다고 한다.
저서로는 『이암유고』 12권 4책이 있다.
그의 글씨는 양주의 덕흥대원군신도비(德興大院君神道碑)‧송지한묘갈(宋之翰墓碣), 남원의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 부안의 김석옥묘비(金錫沃墓碑), 여주의 김공석묘갈(金公奭墓碣), 남양의 영상홍언필비(領相洪彦弼碑), 광주(廣州)의 좌참찬심광언비(左參贊沈光彦碑) 등에 전한다.
시호는 문단(文端)이다.
영의정 송질(宋軼)의 손자이며, 송지한(宋之翰)의 아들이고, 모친은 의령남씨(宜寧南氏)이다. 어려서 어머니가 죽자 외가에서 자랐다.
10세에 중종의 셋째서녀인 정순옹주(貞順翁主)와 결혼하여 여성위(礪城尉)가 되고, 명종 때 여성군(礪城君)에 봉해졌다. 의빈부‧충훈부‧사옹원‧상의원 등에서 요직을 역임하고, 도총관에 이르렀다.
시문에 능하였으며 이황(李滉)‧조식(曺植)‧이민구(李敏求)‧정렴(鄭𥖝)‧이이(李珥)‧성혼(成渾) 등 당대의 석학들과 교유하였으며, 만년에는 선조의 자문 역할을 하였다.
글과 글씨에 능하여 산릉(山陵)의 지(誌)와 궁전의 액(額)으로부터 사대부의 비갈(碑碣)에 이르기까지 많은 글과 글씨를 남겼다. 그는 특히 오흥(吳興)의 필법을 받아 해서를 잘 썼다고 한다.
저서로는 『이암유고』 12권 4책이 있다.
그의 글씨는 양주의 덕흥대원군신도비(德興大院君神道碑)‧송지한묘갈(宋之翰墓碣), 남원의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 부안의 김석옥묘비(金錫沃墓碑), 여주의 김공석묘갈(金公奭墓碣), 남양의 영상홍언필비(領相洪彦弼碑), 광주(廣州)의 좌참찬심광언비(左參贊沈光彦碑) 등에 전한다.
시호는 문단(文端)이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宣祖實錄
國朝人物考
澤堂集(李植)
頤庵遺稿(宋寅)
朝鮮金石總覽
大東書法
宣祖實錄
國朝人物考
澤堂集(李植)
頤庵遺稿(宋寅)
朝鮮金石總覽
大東書法
[집필자]
이민식(李民植)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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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