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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적(李彦迪)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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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명(初名)이적(李迪)
자(字)복고(復古)
호(號)자계옹(紫溪翁)
시호(諡號)문원(文元)
생년1491(성종 22)
졸년1553(명종 8)
시대조선전기
본관여주(驪州)
활동분야학자 > 성리학자
이번(李蕃)
경주손씨(慶州孫氏)
조부이수회(李壽會)
외조부손소(孫昭)
저서『구인록(求仁錄)』
저서『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저서『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
저서『봉선잡의(奉先雜儀)』

[상세내용]

이언적(李彦迪)
1491년(성종 22)∼1553년(명종 8).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

참군 이수회(李壽會)의 손자로, 생원 이번(李蕃)의 아들이며, 모친은 경주손씨(慶州孫氏)계천군(鷄川君) 손소(孫昭)의 딸이다. 초명은 적(迪)이었으나 중종의 명으로 언(彦)자를 더하였다.
1. 관직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다. 이조정랑사헌부장령밀양부사를 거쳐 1530년(중종 25) 사간이 되었다.

이때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경주자옥산에 들어가서 성리학연구에 전념하였다.

1537년 김안로 일당이 몰락한 뒤에 종부시첨정으로 불려나와 홍문관교리응교직제학이 되었고, 전주부윤에 나가 선정을 베풀어서 송덕비가 세워졌다.

이때 조정에 「일강십목소(一綱十目疏)」를 올려 정치의 도리를 논하였다. 이조예조형조판서를 거쳐 1545년(명종 즉위)에 좌찬성이 되었다.

이때 윤원형(尹元衡) 등이 선비를 축출하는 을사사화를 일으켰을 때 추관(推官)이 되어 선비들을 심문하는 일을 맡았지만 자신도 관직에서 물러났다.

1547년 윤원형 일당이 조작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많은 저술을 남겼으나 63세로 죽었다.
2. 학문
이언적조선조 유학, 곧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인물로서 유학의 방향과 성격을 밝히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그것은 주희(朱熹)의 주리론적 입장을 정통으로 확립하는 것이다.

그는 스승으로부터 뚜렷하게 계승받은 것이 아니요 독자적으로 학문을 수립하였다. 다만 그의 호를 ‘회재’라 한 것은 회암(晦菴: 주희의 호)의 학문을 따른다는 견해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27세 때 당시 영남 지방의 선배학자인 손숙돈(孫叔暾)조한보(曺漢輔)사이에 토론되었던 성리학의 기본쟁점인 무극태극논쟁(無極太極論爭)에 뛰어들어 주희의 주리론적 견해에서 손숙돈조한보의 견해를 모두 비판하여 자신의 학문적 견해를 밝혔다.

물론, 이언적은 이 논쟁에서 이기론(理氣論)의 주리론적 견해로서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과 이기불상잡설(理氣不相雜說)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이우위설(理優位說)의 견해는 이황(李滉)에게로 계승되는 영남학파의 성리설에 선구가 된다. 그가 여기에서 벌인 태극의 개념에 관한 논쟁은 조선조 성리학사에서 최초의 본격적인 개념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사화가 거듭되는 사림의 시련기에 살았던 선비로서 을사사화 때는 그 자신이 좌찬성판의금부사의 중요한 직책으로 사림과 권력층 간신 사이에서 억울한 사림의 희생을 막으려고 노력하다가 마침내 자신이 사화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이이(李珥)는 그가 을사사화에 곧은 말로 항거하여 절개를 지키지 못하였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그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온건한 해결책을 추구하였던 인물이다.
3. 저술
그는 만년에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큰 업적이 되는 중요한 저술들을 여럿 남겼다. 곧, 『구인록(求仁錄)』 (1550)‧『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1549)‧『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 (1553)‧『봉선잡의(奉先雜儀)』 (1550) 등이다. 『구인록』(4권)은 유교경전의 핵심개념으로서 인(仁)에 대한 그의 집중적인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유교의 여러 경전과 송대 도학자들의 설에 인의 본체와 실현방법에 관한 유학의 근본정신을 확인하고자 하였다. 『대학장구보유』(1권)와 『속대학혹문』(1권)은 주희『대학장구』『대학혹문』의 범위를 넘어서려는 그의 독자적인 학문세계를 제시하고 있다. 이 점에서 그는 뒤따르는 도학자들보다 훨씬 자율적인 학문태도를 가졌다. 곧, 주희『대학장구』에서 제시한 체계를 개편하였다.

특히, 주희가 역점을 두었던 격물치지보망장(格物致知補亡章)을 그는 인정하지 않고, 『대학장구』의 경1장에 들어 있는 두 구절을 격물치지장으로 옮기는 계획을 하였으며, 이런 개편에 대해서 주희가 다시 나오더라도 이것을 따를 것이라는 확신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주희의 한 글자 한 구절을 금과옥조로 삼아 존숭하는 후기의 학문태도에 비하여 매우 창의적인 학문정신을 보여준다.

『중용구경연의』(29권)는 그의 미완성 절필이다.

이 저술도 주희『중용장구』『중용혹문』의 체계를 훨씬 벗어나서 천하국가를 통치하는 방법의 9경(九經: 修身‧尊賢‧親親‧敬大臣‧體群臣‧子庶民‧來百工‧柔遠人‧懷諸侯)을 중심으로 중용정신을 밝히려는 독창적인 저술이다.

이 저술은 진덕수(眞德秀)『대학연의』가 대학체계를 통치원리의 구체적 실현방법에 응용하였던 것에 상응한 저술이요, 뒷날 이현일(李玄逸)『홍범연의(洪範衍義)』를 저술한 것에 선행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주희『대학』『중용』을 표출시킨 의도를 계승하면서도 『대학』『중용』의 정신을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의 양면으로 파악함으로써 도학의 통치원리를 선명하게 제시하는 창의적 견해를 가졌다고 하겠다.

『봉선잡의』(2권)는 도학의 실천적 규범인 예서를 제시한 것으로서 조선조 후기 예학파의 선구가 되고 있다.

주희『가례(家禮)』조선조 사회에 미친 영향을 주목한다면, 이언적의 예학저술은 그의 학문적 관심이 얼마나 광범하였던가를 보게 한다. 그가 임금에게 올렸던 상소문으로서 「일강십목소」와 「진수팔규(進修八規)」는 군주사회의 통치원리를 제시한 것이다.

하늘의 도리, 곧 천도에 순응하고 백성의 마음, 곧 인심을 바로잡으며 나라의 근본을 배양하여야 한다는 왕도정치의 기본이념을 추구하였으며, 도학적 경세론의 압축된 체계를 제시하고 있다.

「일강십목소」에서 근본의 일강령은 ‘임금의 마음씀(人主之心術)’으로 규정하고, 10조목으로는 가정법도의 엄숙, 국가근본의 배양, 조정기강의 정대, 인재취사의 신중, 하늘도리에 순응, 언로를 넓힘, 사치욕심의 경계, 군자의 길을 닦음, 일의 기미를 살핌을 도모하도록 요구하고, 27세에 지은 「오잠(五箴)」에서도 하늘을 두려워함(畏天), 마음을 배양함(養心), 공경하는 마음(敬心), 허물을 고침(改過), 의지를 독실하게 함(篤志)을 들고 있다.

그는 하늘(天道‧天心)과 백성(人心)에 순응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수양(養心‧敬心)에 힘쓸 것을 중요시하는 도학적 수양론을 경세의 근본으로 삼고 있다. 그는 조선조 도학의 학문과 실천에 모범이 되는 우뚝한 봉우리였다.

1610년(광해군 2) 문묘에 종사되었고, 경주옥산서원(玉山書院) 등에 배향되고 있다.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참고문헌]

晦齋集
李彦迪의 철학사상(劉明鍾, 韓國哲學硏究 중권, 1978)
李彦迪의 哲學思想(柳正東, 韓國哲學史 중권, 1978)
李晦齋의 학문과 그 영향(李丙燾, 韓國儒學史, 亞細亞文化社, 1987)

[집필자]

김장태(琴章泰)

명 : "언적(彦迪)"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國朝編年v07者方和附安老且嘗被朴紹之斥於是合謀擠之遷爲司成李彦迪又入朝力言其不可與無擇意不合無擇遞正言而物論旋訾彦迪立異又左遷爲司藝一日過彦慶兄弟彦光曰司藝何以知安老之爲小人乎彦迪曰安老尹東京慶州別號時熟觀其處心行事
國朝編年v08光準欲論劾爲下僚所止不得發啓請分輕重罪之彦弼曰灌仁淑可遽任稍存形跡當竄光漢曰上新卽位危疑之際當務鎭定彦迪曰擧事當顯明不然恐士林多有橫罹禍者慈殿敎曰禍生士林非所可疑也天威震疊皆惴惴彦迪又曰今者一國大小臣民皆
國朝編年v16儒生朴濬哲等八十餘人上疏辨明高敬履疏中之意有曰成渾所取正者李滉也李滉之所尊尙者李彦迪也欲救成渾而反斥彦迪則是猶沃其葉而斧其根也又曰先王以彦迪乙巳之事不許從祀本道儒生裂裳褁足伸救彦迪於北闕之下半是敬履等疏中
東國歷代總目v02癸丑前右贊成李彦迪卒○彦迪字復古號晦齋慶州人中宗朝登第爲諫官力斥金安老被劾罷歸安老敗死復召用及尹任等獄事作彦迪抗辭力救尹元衡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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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