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정진(奇正鎭)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AE30C815C9C4B1798X0 |
이명(異名) | 기금사(奇金賜) |
자(字) | 대중(大中) |
호(號) | 노사(蘆沙) |
시호(諡號) | 문간(文簡) |
생년 | 1798(정조 22) |
졸년 | 1879(고종 16)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행주(幸州) |
활동분야 | 학자 > 성리학자 |
부 | 기재우(奇在祐) |
외조부 | 권덕언(權德彦) |
출신지 | 전라북도 순창 |
저서 | 『우기(偶記)』 |
저서 | 『노사집』 |
저서 | 『답문유편』 |
[상세내용]
기정진(奇正鎭)
1798년(정조 22)∼1879년(고종 16).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 본관은 행주(幸州). 초명은 기금사(奇金賜), 자는 대중(大中), 호는 노사(蘆沙).
1. 성장기 관력
전라북도 순창 출신. 판중추부사 기건(奇虔)의 후손이며, 부친은 기재우(奇在祐), 모친은 안동권씨로 권덕언(權德彦)의 딸이다.
7세에 이미 성리철학의 깊은 이치를 깨우쳤고, 10세에는 경서‧사서 등을 통독하였다.
1815년에 양친을 여의고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장성 하남(河南)으로 이사하여 장성에서 몇 차례 집을 옮기며 살았다.
1828년 향시에 응시하고, 1831년에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이를 계기로 명성이 조정에 알려져 1832년 강릉참봉(康陵參奉)이 주어졌고, 1835년에는 다시 현릉참봉(顯陵參奉)이 주어졌으며, 1837년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사옹원주부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의를 표하였다.
1842년에 전설사별제(典設司別提)로 임명되자 취임 6일 만에 칭병으로 사임하고 귀향하였다. 얼마 뒤 다시 평안도도사, 1857년에 무장현감, 1861년에 사헌부장령, 1864년 사헌부집의 등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취임하지 않았다.
7세에 이미 성리철학의 깊은 이치를 깨우쳤고, 10세에는 경서‧사서 등을 통독하였다.
1815년에 양친을 여의고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장성 하남(河南)으로 이사하여 장성에서 몇 차례 집을 옮기며 살았다.
1828년 향시에 응시하고, 1831년에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이를 계기로 명성이 조정에 알려져 1832년 강릉참봉(康陵參奉)이 주어졌고, 1835년에는 다시 현릉참봉(顯陵參奉)이 주어졌으며, 1837년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사옹원주부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의를 표하였다.
1842년에 전설사별제(典設司別提)로 임명되자 취임 6일 만에 칭병으로 사임하고 귀향하였다. 얼마 뒤 다시 평안도도사, 1857년에 무장현감, 1861년에 사헌부장령, 1864년 사헌부집의 등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취임하지 않았다.
2. 위정척사 활동
임술민란이 일어나자, 「임술의책(壬戌擬策)」을 써서 삼정(三政)의 폐단을 지적하고 이를 바로잡을 방략을 제시하려 했다. 그러나 이 소장을 조정에 제출하려던 중 말미에 이름을 쓰고 과거시험의 답안지처럼 봉하라는 조정의 지시에 상소할 것을 포기하였다.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서양세력의 침투를 염려한 끝에 그해 7월 흔히 「육조소(六條疏)」라 불리는 첫번째 「병인소(丙寅疏)」를 썼다. 이는 외침에 대한 방비책으로 여섯가지를 제시하고, 민족주체성의 확립을 주장하여 당시의 쇄국정책과 보조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그뒤에 나타나는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사상은 이 소에 이론적 기초를 두고 있었다. 이 소는 고종에게 받아들여지고, 조정에서 식견이 높이 평가되어 그해 6월 사헌부집의, 7월 동부승지, 8월 호조참의, 10월 가선대부의 품계와 함께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등이 주어졌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동지돈녕부사에 임명되자 그를 사양하는 소장으로 두번째의 「병인소」를 올렸다. 여기에서는 당시의 국가적 폐습을 준엄하게 비판하고 지도층인 사대부에게 청렴결백한 기풍이 없음을 우려하여 삼무사(三無私)를 권장하도록 강조하였다.
이어 공조참판‧경연특진관(經筵特進官)에 위촉되었으나 사양하였고, 1877년 우로전(優老典)으로 가의대부(嘉義大夫)가 주어졌다. 그해에 장성 하리 월송(月松: 지금의 高山里)으로 이사하여 다음해 그곳에 담대헌(澹對軒)이라는 정사를 짓고 많은 문인과 함께 거처하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서양세력의 침투를 염려한 끝에 그해 7월 흔히 「육조소(六條疏)」라 불리는 첫번째 「병인소(丙寅疏)」를 썼다. 이는 외침에 대한 방비책으로 여섯가지를 제시하고, 민족주체성의 확립을 주장하여 당시의 쇄국정책과 보조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그뒤에 나타나는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사상은 이 소에 이론적 기초를 두고 있었다. 이 소는 고종에게 받아들여지고, 조정에서 식견이 높이 평가되어 그해 6월 사헌부집의, 7월 동부승지, 8월 호조참의, 10월 가선대부의 품계와 함께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등이 주어졌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동지돈녕부사에 임명되자 그를 사양하는 소장으로 두번째의 「병인소」를 올렸다. 여기에서는 당시의 국가적 폐습을 준엄하게 비판하고 지도층인 사대부에게 청렴결백한 기풍이 없음을 우려하여 삼무사(三無私)를 권장하도록 강조하였다.
이어 공조참판‧경연특진관(經筵特進官)에 위촉되었으나 사양하였고, 1877년 우로전(優老典)으로 가의대부(嘉義大夫)가 주어졌다. 그해에 장성 하리 월송(月松: 지금의 高山里)으로 이사하여 다음해 그곳에 담대헌(澹對軒)이라는 정사를 짓고 많은 문인과 함께 거처하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3. 학문과 사상‧저서
학문은 스승으로부터 직접 전수받거나 어느 학파에 연원을 둔 것이 아니라 송대의 철학자 주돈이(周敦頤)‧장재(張載)‧정이(程頤)‧주희(朱熹) 등의 성리학에 대한 독자적인 궁리와 사색에 의하여 대성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이황(李滉)‧이이(李珥) 이후 근 300년간 계속된 주리(主理)‧주기(主氣)의 논쟁을 극복하고 이일분수(理一分殊)의 이론에 의한 독창적인 이(理)의 철학체계를 수립하였다. 학문이 점차 원숙기에 들던 40세 이후 경학을 공부하려는 선비들이 모여들어 제자의 예를 갖추었지만, 한번도 스승으로 자처하지 않고 성현의 도를 닦고 성리(性理)의 학을 탐구할 뿐이었다.
저술이 많지는 않으나 성리학사상 중요한 저술들을 남겼다. 즉, 『태극도설(太極圖說)』 중의 ‘정(定)’자에 대한 해설인 「정자설(定字說)」과 사단칠정(四端七情)을 논한 『우기(偶記)』 (1845), 이기(理氣) 및 이이의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에 대하여 변론한 「이통설(理通說)」(1852), 철학에서 핵심이 되는 「납량사의(納凉私議)」(1874, 초고는 1843년에 작성)와 「외필(猥筆)」(1878) 등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철학사상은 그밖에 제자들과의 문답을 기록한 『답문유편(答問類編)』에도 잘 드러나 있다. 우주의 구성으로부터 인간본질의 해명, 사단칠정과 인심도심(人心道心) 등 심성의 문제,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의 문제, 선악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이일분수라는 이체이용(理體理用)의 논리로 일관하였다.
이로써 과거 우주현상을 이와 기로 설명하던 이기이원관(理氣二元觀)이 극복되고, 인간심성 내지 도덕의 문제가 가치상 우위에 있는 이의 작용으로 해명되었다.
또, 인물성동이의 문제 역시 이의 완전‧불완전으로 설명되어 종래의 주리론과 주기론적인 심성론과 인물성동이론이 종합 지양되었던 것이다.
학문과 사상은 손자인 기우만(奇宇萬)과 김녹휴(金錄休)‧기문현(奇文鉉)‧조성가(趙性家)‧정재규(鄭載圭)‧이희석(李僖錫)‧이최선(李最善)‧기삼연(奇參衍) 등의 제자에게 전수되었으며, 그밖에 많은 학자들이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저서로는 1882년에 『노사집』 22권, 1890년에 『답문유편』 15권이 편집되어, 뒤에 담대헌에서 활자본으로 간행되었고, 1902년 경상남도 단성(지금의 합천군 쌍백면 묵리) 신안정사(新安精舍)에서 목판본으로 간행되었으며, 1976년 서울에서 본집 22권, 부록 2권으로 영인본이 나왔다.
1892년에 조성가가 그의 행장을, 1901년에 최익현(崔益鉉)이 신도비문을, 1906년에 정재규가 묘갈명을 지었다.
1927년에 고산서원(高山書院)이 건립되어 그 사우에 조성가 등 문인 6인과 함께 봉안되었고, 춘추로 제사를 지낸다.
1960년 『노사연원록(蘆沙淵源錄)』과 1968년 『고산서원지(高山書院誌)』가 간행되었으며, 1978년 고산서원 장판각(藏板閣)이 준공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그리하여 이황(李滉)‧이이(李珥) 이후 근 300년간 계속된 주리(主理)‧주기(主氣)의 논쟁을 극복하고 이일분수(理一分殊)의 이론에 의한 독창적인 이(理)의 철학체계를 수립하였다. 학문이 점차 원숙기에 들던 40세 이후 경학을 공부하려는 선비들이 모여들어 제자의 예를 갖추었지만, 한번도 스승으로 자처하지 않고 성현의 도를 닦고 성리(性理)의 학을 탐구할 뿐이었다.
저술이 많지는 않으나 성리학사상 중요한 저술들을 남겼다. 즉, 『태극도설(太極圖說)』 중의 ‘정(定)’자에 대한 해설인 「정자설(定字說)」과 사단칠정(四端七情)을 논한 『우기(偶記)』 (1845), 이기(理氣) 및 이이의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에 대하여 변론한 「이통설(理通說)」(1852), 철학에서 핵심이 되는 「납량사의(納凉私議)」(1874, 초고는 1843년에 작성)와 「외필(猥筆)」(1878) 등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철학사상은 그밖에 제자들과의 문답을 기록한 『답문유편(答問類編)』에도 잘 드러나 있다. 우주의 구성으로부터 인간본질의 해명, 사단칠정과 인심도심(人心道心) 등 심성의 문제,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의 문제, 선악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이일분수라는 이체이용(理體理用)의 논리로 일관하였다.
이로써 과거 우주현상을 이와 기로 설명하던 이기이원관(理氣二元觀)이 극복되고, 인간심성 내지 도덕의 문제가 가치상 우위에 있는 이의 작용으로 해명되었다.
또, 인물성동이의 문제 역시 이의 완전‧불완전으로 설명되어 종래의 주리론과 주기론적인 심성론과 인물성동이론이 종합 지양되었던 것이다.
학문과 사상은 손자인 기우만(奇宇萬)과 김녹휴(金錄休)‧기문현(奇文鉉)‧조성가(趙性家)‧정재규(鄭載圭)‧이희석(李僖錫)‧이최선(李最善)‧기삼연(奇參衍) 등의 제자에게 전수되었으며, 그밖에 많은 학자들이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저서로는 1882년에 『노사집』 22권, 1890년에 『답문유편』 15권이 편집되어, 뒤에 담대헌에서 활자본으로 간행되었고, 1902년 경상남도 단성(지금의 합천군 쌍백면 묵리) 신안정사(新安精舍)에서 목판본으로 간행되었으며, 1976년 서울에서 본집 22권, 부록 2권으로 영인본이 나왔다.
1892년에 조성가가 그의 행장을, 1901년에 최익현(崔益鉉)이 신도비문을, 1906년에 정재규가 묘갈명을 지었다.
1927년에 고산서원(高山書院)이 건립되어 그 사우에 조성가 등 문인 6인과 함께 봉안되었고, 춘추로 제사를 지낸다.
1960년 『노사연원록(蘆沙淵源錄)』과 1968년 『고산서원지(高山書院誌)』가 간행되었으며, 1978년 고산서원 장판각(藏板閣)이 준공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참고문헌]
蘆沙集
老柏軒文集
松沙文集
朝鮮儒敎淵源
朝鮮儒學史(玄相允, 民衆書館, 1949)
韓國儒學史(裵宗鎬, 延世大學校出版部, 1974)
韓國史硏究入門(韓國史硏究會編, 1981)
老柏軒文集
松沙文集
朝鮮儒敎淵源
朝鮮儒學史(玄相允, 民衆書館, 1949)
韓國儒學史(裵宗鎬, 延世大學校出版部, 1974)
韓國史硏究入門(韓國史硏究會編, 1981)
[집필자]
안진오(安晉五)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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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