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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정(李象靖)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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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경문(景文)
호(號)대산(大山)
시호(諡號)문경(文敬)
생년1711(숙종 37)
졸년1781(정조 5)
시대조선후기
본관한산(韓山)
활동분야학자 > 유생
이태화(李泰和)
재령이씨(載寧李氏)
외조부이재(李栽)
출생지안동 일직현
저서『퇴도서절요(退陶書節要)』
저서『심동정도(心動靜圖)』
저서『이기휘편(理氣彙編)』
저서『경재잠집설(敬齋箴集說)』

[상세내용]

이상정(李象靖)
1711년(숙종 37)∼1781년(정조 5).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경문(景文), 호는 대산(大山).

부친은 이태화(李泰和)이며, 모친은 재령이씨(載寧李氏)이현일(李玄逸)의 손녀이며 이재(李栽)의 딸이다. 안동 일직현에서 출생하였다.

14세에 외할아버지 이재를 사사하였다. 학문에 크게 힘써 문장‧율려(律呂) 등 제도문물에 대하여 연구하고 경학에 침잠하였다.

1735년(영조 11) 사마시와 대과에 급제하여 가주서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739년 연원찰방(連原察訪)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9월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대산서당(大山書堂)을 짓고 제자교육과 학문연구에 힘썼다.

1753년 연일현감이 되었는데, 그 사이에 『퇴도서절요(退陶書節要)』『심동정도(心動靜圖)』『이기휘편(理氣彙編)』『경재잠집설(敬齋箴集說)』 등 사상적 기초를 정립한 여러 저술을 남겼다.

38세 때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시묘하던 중에 『사례상변통고(四禮常變通攷)』『약중편(約中編)』을 편찬하였다. 연일현감으로 있을 때는 민폐를 제거하고 교육을 진흥하는 데 진력하였다.

2년2개월 만에 사직하려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자, 그대로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고신(告身)을 박탈당하였다.

그뒤로는 오직 학문에만 힘을 쏟아 사우들과 강론하고, 제자를 교육하는 데 전념하였다.

특히, 최흥원(崔興遠)과 친교를 맺고 아들 이완(李琬)을 그에게 배우게 하였다. 그는 사상을 정리하여 『심무출입설(心無出入說)』『주자어절요(朱子語節要)』『밀암선생연보(密庵先生年譜)』『심경강록간보(心經講錄刊補)』『연평답문속록(延平答問續錄)』 등을 저술, 편찬하였다.

그는 이황(李滉)이후 기호학파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침체하던 영남학파에서 이황의 계승을 주창하고 일어난 이현일이재로 이어진 영남 이학파의 중추적 인물이다.

외할아버지를 통하여 영남 이학파의 학풍을 계승하는 한편, 그 근원이 되는 이황의 사상을 계승하고 정의하는 입장에서 사상적 터전을 마련하였다.

특히, 이황의 존리적(尊理的)인 입장을 견지하면서 『독성학집요(讀聖學輯要)』 등의 저술을 통하여 기호학파의 이기를 대등하게 보는 태도를 거부하였다.

다만, 이황의 존리적인 태도를 하나의 이념으로 받아들여 일방적인 주리론을 펴는 것을 반대하여, 이(理)의 동정(動靜)과 이기(理氣)의 선후(先後) 등이 가지는 의미를 해명하고 본뜻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또한 성명이기(性命理氣)에 대한 논의보다는 덕성을 배양하는 일용궁행(日用躬行)의 실천적 공부에 치중하여야 함을 강조, 일용평상(日用平常)의 도리인 유학의 본지로 돌아가는 일을 몸소 실천하였다.

그의 학문적 흐름은 아우인 이광정(李光靖)남한조(南漢朝)를 통하여 유치명(柳致明)으로 이어지고, 다시 이진상(李震相)에 이르러 유리론(唯理論)으로 전개되었으며, 한말에 이르러서는 곽종석(郭鍾錫)으로 계승되었다. 정조가 왕위에 오른 뒤 병조참지예조참의 등에 발탁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고종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뒤에 고산서원(高山書院)에 봉안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참고문헌]

大山先生文集
朝鮮儒學史(玄相允, 玄音社, 1982)
韓國哲學史(劉明鍾, 日新社, 1984)
朝鮮儒學史草稿(李丙燾, 서울大學校文理科大學 國史硏究室編)

[집필자]

권정안(權正顔)
대표명이상정(李象靖)
성명이상정(李象靖)
시호문경(文敬)
경문(景文)
대산(大山)

성명 : "이상정(李象靖)"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掌禮院日記v4君魚有龜故統制使閔濟章故河寧君李穰故都捴管徐丙瑞贈內部大臣權正忱故花山君千萬里贈提學崔益男贈吏曹判書李象靖贈提學李象秀贈內部大臣奇正鎭故判書申正煕故農商大臣嚴世永故判書徐相雨故判書李淳翼故參政大臣趙秉式故內
掌禮院日記v4萬里諡號忠壯慮國忘家曰忠勝敵克亂曰壯○贈奎章閣提學崔益男諡號忠獻慮國忘家曰忠行善可紀曰憲○贈吏曹判書李象靖諡號文敬道德博聞曰文夙夜儆戒曰敬○贈奎章閣提學李象秀諡號文簡道德博聞曰文一德不懈曰簡○孝文公韓章錫改
秋曹褒貶謄錄n1-1책獄署官員等襃貶本曹參議例與該房承旨同爲 磨勘而參議李象靖在外未肅拜不得一體磨勘以入之意 敢啓傳曰知道
秋曹褒貶謄錄n1-1책六月初十日) 同日襃貶判書金魯鎭進參判洪秀輔進參議李象靖在外未肅拜正郞成雲柱醇謹自持上 朴一源惜屈郞潛上
國朝人物志v3世子選爲左翊贊卒年八十二有孝行己酉旌閭墓誌子周鎭字公甫號東溪大山李象靖門人
國朝人物志v3之門聰明強記十行俱下常脫略疏曠遊物之外一日忽喟然曰人之不能有爲者習害之也作祛習箴以自警見大山李象靖歸以四子洛閩書一撥便轉粹然一移於正己巳卒年六十六自少弘毅英達有膽略倜倘多大節東遊楓岳
國朝人物志v3語公不覺失笑投卷而起曰名我固當因號曰癡庵嘗曰科擧之文如木客之淸音魑魅之夜嘯受業于大山李象靖文科官至正言默齋集誌銘
國朝人物志v3意雖黽勉應擧中司馬非其好也赴擧一日忽念季氏在疾中悵然曰吾不與吾弟偕而獨赴耶遂還山李象靖見之曰人間和氣盡在此矣後除明陵參奉陞僉知中樞府事立齋集
東國名儒錄n1책(李象靖)李象靖字靑立號大山諡文莊公本韓山英宗朝文章道德學識 高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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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