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단(沈檀)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C2ECB2E8FFFFB1645X0 |
자(字) | 덕여(德輿) |
호(號) | 약현(藥峴) |
호(號) | 추우당(追尤堂) |
생년 | 1645(인조 23) |
졸년 | 1730(영조 6)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청송(靑松)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심광면(沈光沔) |
모 | 해평윤씨(海平尹氏) |
외조부 | 윤선도(尹善道) |
[관련정보]
[상세내용]
심단(沈檀)
1645년(인조 23)∼1730년(영조 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덕여(德輿), 호는 약현(藥峴)‧추우당(追尤堂).
청성백(靑城伯)의 후손이고, 평시령(平市令) 심광면(沈光沔)의 아들이며, 모친은 해남윤씨(海南尹氏)로 예조참의 윤선도(尹善道)의 딸이다.
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외조부인 윤선도 밑에서 교육을 받고 자라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1662년(현종 3) 진사가 되고, 1673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75년(숙종 1)에 승정원주서‧전적을 거쳐, 1677년 홍문관수찬이 되고 이조좌랑‧숙녕현감(肅寧縣監)‧교리‧이조정랑‧검상‧사인‧응교를 역임하였다.
그러나 1680년 남인세력이 서인세력에 의하여 쫓겨나는 경신대출척으로 인하여 양덕에 유배되어 10년간 지내다가 1689년 남인이 득세하는 기사환국으로 다시 풀려나 교리‧부응교‧수원부사 등을 역임하면서 유배생활의 경험을 백성편에서 진소(陳訴)하여 왕의 인정을 받았다.
당시 인현왕후(仁顯王后) 민비(閔妃)가 쫓겨남에 박태보(朴泰輔) 등이 이를 반대하다가 참살을 당하자 비록 반대파 처지이기는 하지만 그의 충성을 칭찬하기도 하였다.
그뒤 이조참의‧병조참판‧도승지‧대사간을 거쳐 대사헌이 되어서는 장성현(長城縣)의 민전(民田)이 궁방전(宮房田)으로 빼앗기자 이를 상소하여 민전으로 환급시켰다.
또, 평안도관찰사로 나가서는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인심을 얻었으며, 이어서 대사간과 경기도관찰사를 지냈다.
1694년 민비복위와 동시에 갑술옥사를 통하여 남인세력이 모두 축출당할 때 파직당하고 이듬해에 어머니상을 당하였다.
1699년 삼척부사를 잠깐 지냈으나 1701년 민비가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죽자 그나마 명맥이 남아 있던 남인세력이 완전히 제거당할 때 같은 남인이던 민언량(閔彦良)의 무고를 입어 해남현에 유배되고, 1703년 영해에 옮겼다가 1711년에 풀려났다.
그뒤 1713년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고, 1720년 지중추부사가 되어 기로소에 들어갔다.
1721년(경종 1)에 이조판서‧예조판서 등을 역임하면서 경종과 세제인 영조에게 우애하기를 항상 권장하였고, 당시 소론의 강경파 김일경(金一鏡)이 중심이 되어 환관 박상검(朴尙儉)을 매수하여 왕세제를 해치려 하였던 사건을 크게 비난한 바도 있다. 이어서 대사헌‧판의금부사를 거쳐 한성판윤과 세제우빈객(世弟右賓客)을 겸하면서 왕세제를 보도(輔導)하였다.
이어서 우참찬‧형조판서‧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영조즉위 후에는 판의금부사‧판중추부사‧도총관 등을 역임하였으나 1728년(영조 4) 재집권한 노론의 탄핵으로 삭주에 유배되었다가 1729년 영조의 탕평책으로 풀려나 공조‧형조의 판서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그러나 그해에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급히 궁궐로 달려가서 안민(安民)하고 학리(虐吏)를 제거할 것, 제도(諸道)의 사조(私租)를 조사하여 군액(軍額)에 충당할 것, 주전(鑄錢)을 하지 말 것, 제궁가(諸宮家)와 각 관아가 침탈하는 법외사세(法外私稅)를 혁파할 것 등의 시무(時務)를 올렸다.
1730년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정조의 말에 의하면 “영조는 그가 충신이라고 항상 칭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태어난 시대가 당쟁이 심하던 때이고 남인이던 그의 외조부의 영향을 직접 받아 관직생활 57여년 동안 당쟁의 파란을 많이 겪었다.
청성백(靑城伯)의 후손이고, 평시령(平市令) 심광면(沈光沔)의 아들이며, 모친은 해남윤씨(海南尹氏)로 예조참의 윤선도(尹善道)의 딸이다.
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외조부인 윤선도 밑에서 교육을 받고 자라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1662년(현종 3) 진사가 되고, 1673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75년(숙종 1)에 승정원주서‧전적을 거쳐, 1677년 홍문관수찬이 되고 이조좌랑‧숙녕현감(肅寧縣監)‧교리‧이조정랑‧검상‧사인‧응교를 역임하였다.
그러나 1680년 남인세력이 서인세력에 의하여 쫓겨나는 경신대출척으로 인하여 양덕에 유배되어 10년간 지내다가 1689년 남인이 득세하는 기사환국으로 다시 풀려나 교리‧부응교‧수원부사 등을 역임하면서 유배생활의 경험을 백성편에서 진소(陳訴)하여 왕의 인정을 받았다.
당시 인현왕후(仁顯王后) 민비(閔妃)가 쫓겨남에 박태보(朴泰輔) 등이 이를 반대하다가 참살을 당하자 비록 반대파 처지이기는 하지만 그의 충성을 칭찬하기도 하였다.
그뒤 이조참의‧병조참판‧도승지‧대사간을 거쳐 대사헌이 되어서는 장성현(長城縣)의 민전(民田)이 궁방전(宮房田)으로 빼앗기자 이를 상소하여 민전으로 환급시켰다.
또, 평안도관찰사로 나가서는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인심을 얻었으며, 이어서 대사간과 경기도관찰사를 지냈다.
1694년 민비복위와 동시에 갑술옥사를 통하여 남인세력이 모두 축출당할 때 파직당하고 이듬해에 어머니상을 당하였다.
1699년 삼척부사를 잠깐 지냈으나 1701년 민비가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죽자 그나마 명맥이 남아 있던 남인세력이 완전히 제거당할 때 같은 남인이던 민언량(閔彦良)의 무고를 입어 해남현에 유배되고, 1703년 영해에 옮겼다가 1711년에 풀려났다.
그뒤 1713년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고, 1720년 지중추부사가 되어 기로소에 들어갔다.
1721년(경종 1)에 이조판서‧예조판서 등을 역임하면서 경종과 세제인 영조에게 우애하기를 항상 권장하였고, 당시 소론의 강경파 김일경(金一鏡)이 중심이 되어 환관 박상검(朴尙儉)을 매수하여 왕세제를 해치려 하였던 사건을 크게 비난한 바도 있다. 이어서 대사헌‧판의금부사를 거쳐 한성판윤과 세제우빈객(世弟右賓客)을 겸하면서 왕세제를 보도(輔導)하였다.
이어서 우참찬‧형조판서‧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영조즉위 후에는 판의금부사‧판중추부사‧도총관 등을 역임하였으나 1728년(영조 4) 재집권한 노론의 탄핵으로 삭주에 유배되었다가 1729년 영조의 탕평책으로 풀려나 공조‧형조의 판서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그러나 그해에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급히 궁궐로 달려가서 안민(安民)하고 학리(虐吏)를 제거할 것, 제도(諸道)의 사조(私租)를 조사하여 군액(軍額)에 충당할 것, 주전(鑄錢)을 하지 말 것, 제궁가(諸宮家)와 각 관아가 침탈하는 법외사세(法外私稅)를 혁파할 것 등의 시무(時務)를 올렸다.
1730년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정조의 말에 의하면 “영조는 그가 충신이라고 항상 칭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태어난 시대가 당쟁이 심하던 때이고 남인이던 그의 외조부의 영향을 직접 받아 관직생활 57여년 동안 당쟁의 파란을 많이 겪었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景宗實錄
英祖實錄
正祖實錄
純祖實錄
星湖文集
國朝榜目
景宗實錄
英祖實錄
正祖實錄
純祖實錄
星湖文集
國朝榜目
[집필자]
박정자(朴定子)
명 : "단(檀)"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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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