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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현왕후(仁顯王后)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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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효경숙성장순(孝敬淑聖莊純)
이명(異名)의열정목(懿烈貞穆)
생년1667(현종 8)
졸년1701(숙종 27)
시대조선중기
본관여흥(驪興)
활동분야왕실 > 비빈
민유중(閔維重)
은진송씨(恩津宋氏)
외조부송준길(宋浚吉)
묘소명릉(明陵)

[상세내용]

인현왕후(仁顯王后)
1667년(현종 8)∼1701년(숙종 27). 숙종의 계비. 성은 민씨(閔氏). 본관은 여흥(驪興).

부친은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이며, 모친은 은진송씨(恩津宋氏)송준길(宋浚吉)의 딸이다.

1681년(숙종 7) 가례(嘉禮)를 올리고 숙종의 계비가 되었다.

예의가 바르고 덕성이 높아 국모로서 만백성의 추앙을 받았으나, 왕자를 낳지 못하여 왕의 총애를 잃게 되었다.

특히, 장소의(張昭儀)에게서 왕자 균(昒: 경종)이 출생하자, 숙종의 총애는 장소의에게 쏠리게 되었다.

1689년에 숙종이 왕자 을 원자로 봉하고 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송시열(宋時烈) 등 노론파 인사들이 소를 올려 이에 반대함으로써 숙종과 심하게 대립하였다. 숙종은 이들을 면직, 사사시키고, 이현기(李玄紀)남치훈(南致薰) 등 남인들을 등용하는 이른바 기사환국이 일어났으며, 지위가 오른 희빈 장씨(禧嬪張氏)의 간계로 폐서인이 되어 안국동 본댁(本宅: 感古堂)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뒤 숙종이 폐비에 대한 처사를 후회하고 있던 중에 1694년 소론파의 김춘택(金春澤)한중혁(韓重爀) 등이 폐비복위운동을 일으키자, 이를 저해하려는 남인 민암(閔黯)김덕원(金德遠)권대운(權大運) 등을 유배, 사사시키는 갑술옥사를 거쳐 다시 복위되었다.

그뒤 덕을 베풀고 희빈 장씨와 화기(和氣)를 도모하면서 살았으나, 원인모를 질병으로 1701년에 35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

존호는 효경숙성장순(孝敬淑聖莊純), 휘호는 의열정목(懿烈貞穆), 능호는 명릉(明陵)이다. 한 궁녀가 그를 주인공으로 하여 쓴 소설 『인현왕후전』이 전한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景宗實錄
英祖實錄
璿源系譜

[집필자]

박정자(朴定子)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