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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방(尹昉)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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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가회(可晦)
호(號)치천(稚川)
시호(諡號)문익(文翼)
생년1563(명종 18)
졸년1640(인조 18)
시대조선중기
본관해평(海平)
활동분야문신 > 문신
윤두수(尹斗壽)
저서『치천집』

[상세내용]

윤방(尹昉)
1563년(명종 18)∼1640년(인조 1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가회(可晦), 호는 치천(稚川).

영의정 윤두수(尹斗壽)의 아들이며, 이이(李珥)의 문인이다.

1582년(선조 15) 진사가 되고 158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에 보임되고 이어 예문관검열춘추관기사관을 거쳐 봉교예조좌랑이 되었다. 곧 사헌부정언으로 전직되어 병조판서 이양원(李陽元)의 인사부정을 탄핵하다가 성균관전적으로 체직되었다.

1591년 당쟁으로 아버지가 유배당하자 병을 칭하고 사직하였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 아버지가 재상으로 재기용되자, 예조정랑으로 발탁되어 선조를 호종하였다. 이어 병조정랑을 거쳐 홍문관수찬으로 특명에 의하여 곧 기복(起復)되어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뒤 이조좌랑을 거쳐 홍문관응교에 올랐으며, 당시 왜적의 만행이 극심한 가운데서도 몰래 숨어서 어머니 빈소에 다녀오는 효성을 보이기도 하였다. 곧 직강사예가 되고 다시 당론이 일어나 아버지가 파직당하자 스스로 파직을 요청하여 대각(臺閣)에서 물러났지만 곧 군기시첨정에 제수되었다. 이어 경상도순안어사(慶尙道巡按御史)로 나가 치적을 올리고, 군기감정(軍器監正)을 거쳐 평산부사를 지내고, 이몽학(李夢鶴)의 난이 끝나자 추관(推官)으로 활약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순안독찰(巡按督察)이 되어 군량운반을 담당하였으며, 곧 철원부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동부승지로 승진되어 돌아오자 그곳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워 그의 덕을 기렸다.

1601년 부친상을 마친 뒤 동지사(冬至使)명나라에 다녀와서, 곧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에 습봉(襲封)되었다. 이어 병조참판동지춘추관사에 보임되었다가, 도승지로 전직되었고, 다시 한성판윤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올랐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형조판서가 되고 이듬해 사은사(謝恩使)명나라에 다녀온 뒤 경기도경상도감사를 역임하였고, 이어 겸지춘추관사『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1615년(광해군 7) 다시 사은사명나라에 다녀왔다.

1618년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출하려는 폐모론이 일어나자 병을 칭하고 정청(政廳)에 불참하여 탄핵을 받고 사직, 은퇴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예조판서로 등용되고, 이어 우참판으로 판의금부사를 겸하였으며, 곧 우의정에 올랐다. 다시 좌의정으로 있을 때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고 민심을 수습하는 데 공헌하였으며, 1627년(인조 5) 영의정이 되었다. 그해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인조의 피난을 주장하여 강화에 호종하였고, 영의정에서 물러나 판중추부사를 역임하고 1631년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묘사제조(廟社提調)로서 40여 신주(神主)를 모시고 빈궁(嬪宮)‧봉림대군(鳳林大君)과 함께 강화로 피난하였다.

그러나 신주봉안에 잘못이 있었다 하여 탄핵을 받고 1639년 연안에 유배되었다.

2개월 후 전리방귀(田里放歸)되었다가 다시 영중추부사에 기용되었다.

인품이 중후하고 문장에 능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저서로는 『치천집』이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집필자]

이문기(李文基)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