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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仁祖)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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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이종(李倧)
자(字)화백(和伯)
호(號)송창(松窓)
생년1595(선조 28)
졸년1649(인조 27)
시대조선중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왕실 > 왕
정원군(定遠君)
인헌왕후(仁獻王后)
인열왕후(仁烈王后)
장렬왕후(莊烈王后)
처부한준겸(韓浚謙)
처부조창원(趙昌遠)
외조부구사맹(具思孟)
묘소파주군 탄현면 갈현리

[상세내용]

인조(仁祖)
1595년(선조 28)∼1649년(인조 27). 조선 제16대왕. 재위 1623년∼1649년.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종(李倧). 자는 화백(和伯), 호는 송창(松窓).

선조의 손자로, 정원군(定遠君: 추존왕 元宗)의 아들이며, 모친은 좌찬성 구사맹(具思孟)의 딸인 인헌왕후(仁獻王后)이다. 비(妃)는 영돈녕부사 한준겸(韓浚謙)의 딸인 인열왕후(仁烈王后)이며, 계비(繼妃)는 영돈녕부사 조창원(趙昌遠)의 딸인 장렬왕후(莊烈王后)이다.
1. 가계
1607년(선조 40)능양도정(綾陽都正)에 봉해지고, 이어 능양군에 진봉(進封)되었다. 광해군 때에는 대북이 정권을 잡아 왕으로 하여금 영창대군(永昌大君) 의(㼁)를 죽이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게 하였으며, 또 여러 차례의 옥사를 일으켜 정치가 혼란하여지자, 1623년 서인 김류(金瑬)이귀(李貴)이괄(李适) 등이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출하고, 서궁(西宮)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의 윤허를 받아 왕위에 추대되어 경운궁에서 즉위하였다.
2. 즉위 후의 치적
즉위 후 광해군 때 희생된 영창대군임해군(臨海君) 진(珒),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 등의 관직을 복관시켰다.

또한, 반정공신들에 대한 논공행상에 있어서는 도감대장(都監大將) 이수일(李守一)을 내응(內應)의 공이 있다 하여 공조판서로 임명한 데 비하여, 이괄은 2등에 녹공하여 한성판윤, 이어 도원수 장만(張晩) 휘하의 부원수 겸 평안병사로 임명하자 이괄은 이에 불만을 품고 1624년(인조 2) 난을 일으켰다.

이괄의 군세가 자못 강하여 서울이 점령되자, 인조공주까지 남천(南遷)하였다가, 도원수 장만이 이끄는 관군에 의하여 격파된 뒤 환도하였다.

광해군 때에는 명나라금나라와의 관계를 병존시키는 중립정책을 써왔으나,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정권을 잡은 뒤 금나라에 대한 태도가 일변하여 친명배금정책(親明排金政策)으로 바꾸었다.
3.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이에 1627년 후금이 군사 3만여명으로 침략하여 의주를 함락시키고, 파죽지세로 평산(平山)까지 쳐들어오자 조정은 강화도로 천도하였으며, 최명길(崔鳴吉)의 강화주장을 받아들여 양국의 대표가 회맹(會盟), 형제의 의를 약속하는 정묘화약을 맺었다.

1636년 12월 형제의 관계를 군신의 관계로 바꾸자는 청나라의 제의를 거부하자, 10만여군으로 다시 침입하였다. 혹한 속에 질풍같이 쳐들어온 청군을 막지 못하고, 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과 비빈(妃嬪)을 강도(江都)로 보낸 뒤 길이 막혀 남한산성으로 물러가 항거하였다.

그때 척화파‧주화파간의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으나, 주화파의 뜻에 따라 성을 나와 삼전도(三田渡: 지금의 松坡)에서 군신의 예를 맺고, 소현세자(昭顯世子)봉림대군을 볼모로 하자는 청나라측의 요구를 수락하고 말았다. 이에 따라 청나라 태종은 두 왕자와 척화론자인 삼학사(三學士), 즉 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를 데리고 철병하고 조정은 환도하였다. 이로 인하여 임진왜란 이후 다소 수습된 국가기강과 경제상태가 악화되어, 당시의 사회상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4. 기타의 치적
그리고 낙당(洛黨)의 영수 김자점(金自點)이 척신으로 집권하여 횡포가 자심하였다.

1645년 오랜 볼모의 생활에서 벗어난 소현세자북경에서 돌아와 얼마 안 되어 의문의 변사를 당한 뒤, 소현세자의 아들을 후계자로 하지 않고 2남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세움으로써 현종숙종 때 예론(禮論)의 불씨가 되기도 하였다.

이듬해에는 소현세자의 빈(嬪) 강씨(姜氏)를 사사시켰다.

1624년 총융청(摠戎廳)수어청(守禦廳) 등 새로이 군영을 설치하여 북방(北防)과 해방(海防)에 유의하였다. 광해군경기도에 시험적으로 실시하였던 요역(徭役)과 공물의 미납화(米納化), 즉 대동법을 1623년에 이르러 강원도에 확대, 실시하였으며, 점차 지역을 넓혀나갔다.

또한, 1634년 삼남(三南)에 양전(量田)을 실시하여, 전결(田結)수를 증가시켜 세원(稅源)을 확보하고, 세종 때 제정되었던 연등구분의 전세법(田稅法)을 폐지하여 전세의 법적인 감하(減下)를 주지(主旨)로 하는 영정법(永定法)과 군역(軍役)의 세납화(稅納化)를 실시하였다.

1633년 상평청을 설치하여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하고, 청인과의 민간무역을 공인하여 북관(北關)회령 및 경원개시(慶源開市), 압록강의 중강개시(中江開市)가 행하여졌는데, 개시에 있어서는 상고(商賈)의 수, 개시기간, 유왕일수(留往日數), 매매총수(買賣總數) 등을 미리 결정하였다.

또한, 1641년에는 군량조달을 위하여 납속사목(納粟事目)을 발표하고, 납속자에 대한 서얼허통(庶孽許通) 및 속죄(贖罪)를 실시하였다.

1628년 벨테브레(Weltevree)가 표착하여왔는데, 그는 이름을 박연(朴淵, 혹은 朴燕)으로 고치고 병자호란 때 훈련대장 구인후(具仁垕)의 휘하에서 대포의 제작법과 사용법을 지도하여 큰 공헌을 하였다.

정두원(鄭斗源)소현세자청나라에서 돌아올 때 화포‧천리경(千里鏡)‧과학서적‧천주교서적 등을 가지고 왔으며, 특히 소현세자샬(Shall, A., 湯若望)과 사귀기도 하였다. 서양의 역법(曆法)인 시헌력(時憲曆)을 송인룡(宋仁龍)김상범(金尙範) 등이 청나라에서 수입하여, 그뒤 1653년(효종 4)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학문에도 힘써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동사보편(東史補編)』『서연비람(書筵備覽)』 등 서적을 간행하였고,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김육(金堉)김집(金集) 등 우수한 학자를 배출하여 조선 후기 성리학의 전성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능은 장릉長陵)으로 경기도 파주군 탄현면 갈현리에 있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孝宗實錄
璿源系譜
燃藜室記述
大東野乘
仁祖代政治勢力의 動向(吳洙彰, 韓國史論 13, 1985)

[집필자]

공원영(孔黿泳)

능호 : "장릉(長陵)"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紀年便攷v3十一月七日誕降丁未封綾陽都正尋封君天啓三年癸亥卽位己丑五月八日昇遐在位二十七年春秋五十五有七男一女 長陵交河舊治後子坐己丑初葬坡州北雲川里英祖七年移葬于此妃正裕明德貞順仁烈王后韓氏籍清州領敦寧府事西平府院
紀年便攷v3府院君文翼公浚謙女甲午宣祖二十七年七月朔日誕降庚戌封清城縣夫人癸亥冊封王妃乙亥十二月九日昇遐誕五男 長陵同原丙子初葬坡州北雲川里祖七年移葬繼妃慈懿恭慎徽獻康仁淑穆貞肅温惠莊烈王后趙氏籍楊州領敦寧府事漢原府
紀年便攷v20子許多張皇熒惑天聴脅持臺閣 沮遏公議之計吁亦巧且慘矣夫外挾强寇之勢以內刼其主是可忍耶疏入不報○四月葬長陵在坡州誌文張維撰○送小譯朴仁範賫檄徃瀋陽探虜情金汗言爾國若不於十一月二十五日前入送王子大臣及斤和人則
紀年便攷v21陳箚請釋命幷量移近畿無何幷釋之○命領敦寧金尙憲令宦寺扶腋上殿以李景奭爲領議政金尙憲爲左議政九月葬長陵在坡州後移葬行錄孝宗御制行狀李景奭撰誌文趙絅撰○命賜額于先正臣趙光祖龍仁書院曰深谷右議政金堉上箚請
紀年便攷v25初金自點遭臺論免相後晤嗾親密首譯李馨長潛告于淸國日本國退黜舊臣引用山林之人將謀北伐且送長陵誌文以不書僞號故也淸大疑之以重兵壓境淸使六人以査事爲名連續出來上大驚曰何以處之領議政李景奭曰臣受國厚
紀年便攷v25峯江陰兩縣合爲金川郡從道臣之請也○定中宗世室○冊封王世孫爲王世子仍行冠禮○冊封金氏佑明女爲世子嬪○幸長陵水原府使率兵入衛上見其軍服皆闊袖敎曰此是閒者之服豈枕戈戎嚴之意乎命更其制又以駕過之時鞫躬祗迎非介冑之
紀年便攷v25入侍審理減死減等赦宥者一百八十餘人○六月左議政金尙憲卒○王世子入學博士蔡裕後○命春秋謁陵永爲恒式○幸長陵始行辭陵禮○命以禁軍爲騎隊擇授箭郊牧馬及外邑分養馬仿唐之左右武衛大將差秩高武將二人爲內三廳都別將分領
紀年便攷v30堰堂上郞廳一人專管備局之有堤堰堂上始此○分命備堂八人勾管八道賑事○經筵官尹東源陳䟽告歸○八月移葬坡州長陵于交河大王與仁烈王后韓氏元妃同移同原先是有言陵所多䖳者命大臣審視果然遂决意遷厝欲親詣奉審而不卜日筵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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