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보(李鼎輔)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74C815BCF4B1693X0 |
자(字) | 사수(士受) |
호(號) | 보객정(報客亭) |
시호(諡號) | 문간(文簡) |
생년 | 1693(숙종 19) |
졸년 | 1766(영조 42)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연안(延安)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이우신(李雨臣) |
외조부 | 윤빈(尹彬) |
[관련정보]
[상세내용]
이정보(李鼎輔)
1693년(숙종 19)∼1766년(영조 4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사수(士受), 호는 삼주(三洲) 또는 보객정(報客亭).
부친은 호조참판 이우신(李雨臣)이며, 모친은 승지 윤빈(尹彬)의 딸이다.
1721년(경종 1) 진사시에 합격하고 익릉참봉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퇴하였다.
1732년(영조 8)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검열‧대교를 거쳐 1734년 봉교가 되었다.
1736년 병조좌랑‧정언‧경기도사를 거쳐 지평이 되었는데, 탕평책을 반대하는 시무십일조(時務十一條)를 상소하였다가 면책을 받고 사직하였다.
1737년 부수찬‧교리가 되고 이조좌랑‧교서관교리에 전임되었으며, 1738년 이조정랑‧응교‧형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이어 동부승지‧병조참의를 거쳐 1740년 수원부사가 되어 부성(府城)을 쌓고 목장을 설치하여 전마를 기르고 군비를 충실히 하였다.
1742년 승지‧부제학‧대사성을 거쳐 이듬해 대사간‧병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748년 함경도관찰사에 임명되어 상벌을 공평히 하고 비용을 절감하여 변경을 안정시켰다.
이듬해 한성좌윤‧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도총관‧비변사제조에 선임되었으며, 1750년 도승지로 다시 탕평책을 반대하다가 인천부사로 좌천되었다.
1752년 동지경연사‧성천부사를 거쳐 이듬해 좌부빈객(左副賓客)이 되고, 1754년 한성판윤 겸 오위도총관‧형조판서를 지냈다.
1755년 우참찬‧예조판서‧판의금부사‧동지성균관사 등의 중직을 역임하고, 1756년 공조판서로 홍문관‧예문관의 제학과 지경연사‧좌빈객을 겸하였다.
1758년 이조판서로 지춘추관사‧판돈녕부사를 겸하고 이어 좌참찬‧세손의 사부가 되었으며 1761년 이조판서로 수어사(守禦使)를 겸하였다.
1762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1763년 예조판서‧대제학‧지성균관사에 이어 판중추부사로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승진되었다. 성품이 엄정하고 강직하여 바른 말을 잘 하여 여러 번 파직되었다.
글은 주의(奏議)에 능하였으며 생각하는 일은 반복하여 상소하고 사륙문(四六文)에 뛰어나 시조 78수의 작품을 남겼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부친은 호조참판 이우신(李雨臣)이며, 모친은 승지 윤빈(尹彬)의 딸이다.
1721년(경종 1) 진사시에 합격하고 익릉참봉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퇴하였다.
1732년(영조 8)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검열‧대교를 거쳐 1734년 봉교가 되었다.
1736년 병조좌랑‧정언‧경기도사를 거쳐 지평이 되었는데, 탕평책을 반대하는 시무십일조(時務十一條)를 상소하였다가 면책을 받고 사직하였다.
1737년 부수찬‧교리가 되고 이조좌랑‧교서관교리에 전임되었으며, 1738년 이조정랑‧응교‧형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이어 동부승지‧병조참의를 거쳐 1740년 수원부사가 되어 부성(府城)을 쌓고 목장을 설치하여 전마를 기르고 군비를 충실히 하였다.
1742년 승지‧부제학‧대사성을 거쳐 이듬해 대사간‧병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748년 함경도관찰사에 임명되어 상벌을 공평히 하고 비용을 절감하여 변경을 안정시켰다.
이듬해 한성좌윤‧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도총관‧비변사제조에 선임되었으며, 1750년 도승지로 다시 탕평책을 반대하다가 인천부사로 좌천되었다.
1752년 동지경연사‧성천부사를 거쳐 이듬해 좌부빈객(左副賓客)이 되고, 1754년 한성판윤 겸 오위도총관‧형조판서를 지냈다.
1755년 우참찬‧예조판서‧판의금부사‧동지성균관사 등의 중직을 역임하고, 1756년 공조판서로 홍문관‧예문관의 제학과 지경연사‧좌빈객을 겸하였다.
1758년 이조판서로 지춘추관사‧판돈녕부사를 겸하고 이어 좌참찬‧세손의 사부가 되었으며 1761년 이조판서로 수어사(守禦使)를 겸하였다.
1762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1763년 예조판서‧대제학‧지성균관사에 이어 판중추부사로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승진되었다. 성품이 엄정하고 강직하여 바른 말을 잘 하여 여러 번 파직되었다.
글은 주의(奏議)에 능하였으며 생각하는 일은 반복하여 상소하고 사륙문(四六文)에 뛰어나 시조 78수의 작품을 남겼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志
江漢集
國朝榜目
國朝人物志
江漢集
[집필자]
김용국(金龍國)
성명 : "이정보(李鼎輔)"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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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