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임경업(林慶業)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C784ACBDC5C5B1594X0
자(字)영백(英白)
호(號)고송(孤松)
시호(諡號)충민(忠愍)
생년1594(선조 27)
졸년1646(인조 24)
시대조선중기
본관평택(平澤)
활동분야무신 > 명장
임황(林葟)
출생지달천촌(達川村)
공신호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

[관련정보]

[상세내용]

임경업(林慶業)
1594년(선조 27)∼1646년(인조 24). 조선 중기의 명장. 본관은 평택(平澤). 자는 영백(英白), 호는 고송(孤松). 충주 달천촌(達川村) 출생(평안도의 价川에서 태어났다는 설도 있음.). 판서 임정(林整)의 7대손으로, 임황(林葟)의 아들이다.
1. 관직에 들어서다
1618년(광해군 10) 아우 임사업(林嗣業)과 함께 무과에 합격하고 함경도 갑산으로 추방(秋防: 새로이 무과에 합격한 자에게 관직을 제수하기 전에 의무적으로 부과하였던 일정기간의 赴防)을 위하여 나갔다가 1620년 삼수소농보권관(小農堡權管)으로 부임하여 군량과 군기를 구비하는 데 공을 세워 절충장군에 승서되었다.

그뒤 첨지중추부사로서 인조반정공신인 김류(金瑬)의 막하에서 있다가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출정을 자원하여 정충신(鄭忠信)의 휘하로 들어가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 1등이 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이듬해 행첨지중추부사 겸 우림위장(行僉知中樞府事兼羽林衛將)을 거쳐 방답첨사(防踏僉使)로 임명되었고, 1626년 전라도 낙안군수로 부임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전라병사 신경인(申景禋)좌영장(左營將)에 임명하고 청군을 무찌르기 위하여 서울로 향하였으나 이때는 이미 주화파에 의하여 강화가 성립된 뒤여서 싸움 한번 하지도 못하고 군졸을 이끌고 낙안군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체찰부(體察府)별장이 되었다.

1629년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으로 체찰부별장을 겸하고, 이듬해에는 평양중군에 임명되었다.

1631년 검산산성(劒山山城) 방어사에 임명되어 정묘호란 이후 퇴락한 용골(龍骨)운암(雲暗)능한(凌漢)산성 등을 수축하였으며, 정주목사에 승서되었다. 그의 이와같은 활약에도 불구하고 당시 조정에서는 청천강 북쪽인 서북로의 군사력은 정묘호란 이후 큰 타격을 입어 한때 청북포기의 의논이 일어났다.

즉, 그 방어선을 청천강 이남으로 후퇴시켜 안주중심의 방어를 펴는 동시에 강도(江都)남한산성(南漢山城)을 수축하여 수도권 방어에 전념하려 하였다. 이에 대하여 청천강 북쪽의 백성들은 맹렬한 반대를 하였는데, 이와같은 청북인의 반대운동을 임경업이 뒤에서 조종하였다 하여 탄핵을 받고 구금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1633년 2월 기복(起復: 상중에 벼슬에 나아감.)하여 청북방어사(淸北防禦使)에 임명되고 곧 안변부사를 겸하였다.

이때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웅거하면서 이를 수축하고 방비를 튼튼히 하였다. 그해 4월 명나라의 반장(叛將)인 공유덕(孔有德)경중명(耿仲明)이 우가장(牛家莊) 앞바다를 경유하여 구련성(九連城)으로 들어가 후금군과 통하려고 하였다. 이에 의주부윤 윤진경(尹進卿)과 함께 이 사실을 명나라 대도독 주문욱(朱文郁)에게 연락하여 이를 협격, 섬멸하였으나 명나라 장군간의 싸움으로 이들 반장을 사로잡는 데는 실패하였다. 이 공로로 명나라 왕으로부터 금화(金花)와 많은 상을 받았고, 명나라총병(摠兵)벼슬을 받아 이때부터 임총병으로 명나라에도 크게 알려졌다.

그뒤 아버지의 탈상을 위하여 고향에 왔다가 1634년 부호군에 복직되고, 곧 의주부윤청북방어사에 임명되었으며 의주진병마첨절제사까지 겸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근거지인 백마산성을 방어하기에는 인적‧물적 어려움이 많았다. 그는 조정으로부터 백금(白金: 은을 말함.) 1,000냥과 비단 100필을 받아 중국상인과 무역을 하여 이(利)를 축적하는 동시에 유민(流民)을 모아 12곳에 둔전을 개설하여 안집해 살도록 하였다. 이 공로로 1635년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랐다.

그러나 이와같은 무역거래는 지나치게 이익을 추구하였다는 책임을 물어 파직되었다.

이에 당시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은 강력하게 그의 복직을 주장하여, 1636년 다시 가선대부로 자급을 내린 채 의주부윤에 복직되어 압록강 맞은편의 송골산(松鶻山)봉황산(鳳凰山)에 봉화대를 설치하는 등 국방태세를 강화하였다.
2. 병자호란때의 선전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송골봉황의 봉화대에서 연락을 받고 산성을 굳게 지켜 적의 진로를 둔화시키는 데 진력하였다. 청군은 임경업이 지키는 백마산성을 포기하고 직접 서울로 진격하였으며, 인조남한산성으로 피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결국, 이듬해 정월에 주화론자인 최명길(崔鳴吉) 등의 주장으로 굴욕적인 화의를 성립시켰다.

그뒤 청나라 태종은 조카인 요퇴(要魋)로 하여금 300기의 정예기병을 이끌고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는데 그는 이 요퇴군을 맞아 압록강에서 쳐 무찌르고 잡혀가던 우리 백성 남녀 120여명과 말 60여필을 빼앗는 전과를 올렸다. 이후 청나라명나라를 칠 전초전으로서 눈의 가시였던 가도(椵島)에 주둔한 명군을 치기 위하여 1637년 2월 조선에 병력동원을 청해왔다.

이때 그는 수군장(水軍將)에 발탁되었으나 철저한 친명배금파(親明排金派)였으므로 선봉에 서는 것을 주저하였으며 명나라의 도독 심세괴(沈世魁)에게 내통, 그들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게 하였다.

한편, 피폐한 의주의 물적‧인적 자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다시 상인들을 심양에 보내 물화교역으로 이를 해결하려 하였으나, 이것이 청인에게 발각되어 인조의 노여움을 사, 평안도철산으로 유배되었다.
3. 의 요청으로 출전
한편, 청나라에서는 여러 차례 명나라를 치기 위한 병력의 동원을 요청해왔으나 조정에서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청나라는 이것이 조약에 명시된 사항이라 하여 질책이 대단하였다.

비변사에서는 임경업의 죄를 용서하고 마침내 조방장(助防將)으로 기용하여 그로 하여금 명나라를 치도록 하였다. 그는 군사 300명을 이끌고 구련성으로 나아가 진격하는척하면서 군사동원과 군량조달의 어려움을 들어 심양으로 나아가 이 사명을 완수하였다. 이 공로로 인조로부터 숙마(熟馬) 한필을 하사받고 의주부윤으로 복귀하였다가 9월 평안병사수군절제사안주목사로 승서되었다.

1639년말부터 청나라명나라의 근거지인 금주위(錦州衛: 지금의 盛京지방)를 공격하기 위하여 다시 병력동원과 군량미의 원조를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조정에서는 청나라의 요청에 의하여 임경업주사상장(舟師上將), 황해병사 이완(李浣)부장(副將)으로 삼았다.

이듬해 4월 그는 전선(戰船) 120척, 격군(格軍: 조선시대 水夫의 하나로 沙工의 일을 돕던 사람) 1,323명, 사수(射手) 1,000명, 포수(砲手) 4,000명, 화약 1만근, 철환(鐵丸) 4만2000개, 조총(鳥銃) 4,170정, 군량미 1만 7,160석, 그리고 세공청국미(歲貢淸國米) 1만석을 싣고 안주를 출발하여 금주위로 향하였다.

한편, 재상이었던 최명길과 밀의하여 승려 독보(獨步)를 보내어 이 사실을 등주의 명군문 홍승주(洪承疇)에게 통고하게 하고 애써 싸우게 하지 않았다.

그해 7월 청나라범문정(范文程)을 통하여 심양에 있는 세자에게 항의하였다. 그들은 임경업의 함대를 전진시키려 하나 전진하지 않고, 세폐미를 요하 입구까지 운반하라고 하였으나 거절하고, 또한 명나라 배를 만났으나 싸우지 않았으며, 배가 표류하였다고 속여 두 사람을 몰래 명나라로 보내어 내통하였으므로 우리 조정과 서로 짜고 명나라와 내통한 것이라고 힐책하였다. 소현세자(昭顯世子)는 모르는 사실이라고 극부 부인하였다.

이에 따라 범문정은 그들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재삼 임경업을 달래었으나 듣지 않았다.

7월 14일 부장 이완은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임경업은 나머지 50척의 배와 1,500명의 선군 및 격군을 이끌고 개주위(蓋州衛)에 이르러 배에 있던 세폐와 군량미를 모두 버리고, 다시 해주위(海州衛)이주위(伊州衛)금주위대승보(大勝堡) 등지로 진주하였으나 다만 청나라 장수의 지휘에 따라 진퇴를 같이 하였을 뿐, 그 동안 한번도 명군과 싸우지 않았다.
4. 에 비협조한 죄로 피신
1641년 정월임경업은 배를 버리고 육로로 요양심양압록강까지 청나라의 허와 실을 일일이 정탐하면서 서울로 돌아왔다. 청나라에서는 그가 명나라와 내통하고 있는 사실을 눈치는 채고 있었으나 확증을 잡지 못하여 고민하였으며 조정에서는 청나라의 압력으로 삭탈 관직하였으나, 그해 12월에는 행동지중추부사(行同知中樞府事)로 임명하였다.

1642년에 임경업청나라에 대한 비협조의 사실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청나라금주위 공격으로 명장 홍승주청나라에 투항하자 그의 부하인 예갑(倪甲)선천부사 이계(李烓)의 실토로 임경업이 승려 독보명나라로 파견한 전말을 알게 되었다.

또한 그해 10월에는 정주고충원(高忠元)심양 감옥에서 이 사실을 목격하였다고 증언함으로써 그가 청나라에 협력하지 않은 죄상이 드러났다. 이러한 확증에 의한 청나라의 압력으로 조정에서는 형조판서 원두표(元斗杓)로 하여금 임경업을 체포하여 청나라로 압송하도록 하였다.

압송도중 11월 6일 그 일행이 황해도 금천군 금교역(金郊驛)에 이르렀을 때 임경업은 밤을 틈타 도망하였는데, 그는 붙잡히기 전에 심기원(沈器遠)을 만나 그에게서 은 700냥과 승복(僧服) 및 체도(剃刀)를 얻어 기회를 노리다가 붙잡혀 압송되던 도중 도망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는 명나라로 망명할 수 있는 기회를 잡기 위하여 처음 양주 회암사(檜巖寺)에 맡겨두었던 승복을 찾아 포천가평의 경계지대에서 승복으로 갈아입고 중이 되어 양구현의 어느 골짜기에서 초막을 치고 겨울을 지냈다.

이듬해 정월 양양으로 갔으나 복병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양구로 돌아왔다가 사잇길로 상원(祥原)으로 갔다가 다시 회암사로 숨어들어 탈출의 기회를 노렸다. 그 동안 조정에서는 청나라의 독촉에 못이겨 그의 처를 비롯하여 형제 등 가족을 체포하여 청나라로 압송하였으며, 그의 처 이씨는 그 이듬해 9월 심양옥에서 자살하였다.
5. 에서 평로장군에 임명
한편, 임경업은 1643년 5월 26일 김자점의 종이었던 상인 무금(無金, 일명 孝元)의 주선으로 배 한척과 사공 10명, 그리고 그의 군관이었던 이형남(李亨男)박수원(朴守元: 일명 車自龍)과 일찍이 사귀어온 임성기(林成己)최수명(崔守明)의 두 승려(일설에는 知明‧小明이라고도 함.)를 대동하고 상선을 가장하여 서울마포(麻浦: 일설에는 泰安이라고도 함.)를 출발하여 황해로 나아갔다. 그해 가을 중국 제남부(濟南府)해풍도(海豊島)에 표착하였다. 그곳에서 명나라의 수비대 군관인 곽이직(郭以直)의 조사를 받고 등주도독(登州都督) 황종예(黃宗裔)군문의 총병인 마등고(馬騰高)의 휘하에 들어가니 명나라에서는 그에게 평로장군(平虜將軍: 일설에는 부총병)을 내리고 4만의 병사를 이끌도록 하였다고 한다.
6. 청군에 의해 본국 송환
그러나 청나라는 마침내 북경(北京)을 함락하였고 청 태종산해관(山海關)으로 들어가니 도독 황종예남경으로 도망쳤다. 임경업마등고와 함께 석성(石城)으로 들어가 재기의 기회를 노렸다. 명나라 조정은 남경으로 갔으나 그곳도 곧 함락되자 마등고청나라에 항복하고 말았다.

한편, 본국에서는 그의 후원자인 심기원의 옥사가 일어나 임경업이 연루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었으니 그는 갈 곳을 잃어버렸다. 임경업은 이곳에서 탈출하기 위하여 독보에게 배의 주선을 부탁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마침내 그의 부하였던 장련포수(長連砲手) 한사립(韓士立)의 밀고로 1645년 정월 명나라의 항장(降將) 마홍주(馬弘周)에게 잡혀 북경으로 압송되었다. 청나라는 당시 섭정자 예친왕(睿親王)이 집권하면서 대사령을 내리고 임경업에 대하여도 그 재략(才略)을 아껴 과거의 일을 불문에 붙이려 하였다.

그러나 역관 정명수(鄭命壽)이형장(李馨長), 그리고 조신 김자점 등 반역 부청배(附淸輩)가 결탁하여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7. 본국배반의 죄로 처형
1646년 6월임경업은 죄인이 되어 사은사 이경석(李景奭)에 의하여 본국으로 송환되었으며, 18일에 서울에 이르러 인조의 친국을 받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임경업심기원의 옥사에 관련시키려 하였다. 그는 심기원으로부터 은 700냥과 승복 및 체도를 받은 것은 시인하였으나 역모가담은 극력 부인하였다.

그러나 임경업이 달아날 당시 형조판서로 있다가 그 사건으로 파직되었던 원두표와, 임경업과 지난날 가장 가까웠던 김자점이 이를 반대하고 죽여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김자점임경업평안병사 겸 의주부윤으로 있을 때 도원수로서 서북면의 방어에 전책임을 지고 있었고 임경업은 그의 막하로서 그를 따랐으며, 임경업이 상인 잠송사건을 일으켰을 때에도 적극적으로 그를 옹호하여 형벌을 면하게 해준 장본인이었는데, 임경업을 죽여야 된다고 주장한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었다.

즉, 임경업에게 배를 알선하였던 무금은 그의 첩인 매환(梅環)의 오라비였고, 이들은 모두 김자점의 종이었으며, 임경업마포에서 탈출할 때 무금의 처에게 탈출사실을 김자점이나 그의 아들 김식(金鉽)에게 알리라고 하였던 것이다.

결국, 임경업이 살아서 문초를 받게 되면 무금의 처도 문초해야 되고 무금의 처가 김자점에게 알렸다고 하면 김자점임경업의 탈출을 도운 결과가 되며, 그러면 심기원의 당으로 몰려 자기도 죽어야 된다는 논리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그해 6월 20일 임경업은 심기원사건의 연루 및 자기 나라를 배반하고 남의 나라에 들어가서 국법을 어겼다는 죄를 뒤집어쓴 채 형리(刑吏)의 모진 매에 이기지 못하여 마침내 숨지고 말았다. 그의 나이 53세였으며 고향인 충주달천에 장사지냈다.

임경업은 당시 친명반청의 사회분위기와 함께 우국충정에 뛰어난 충신이요 무장이었다.

그러나 가장 불행한 장수였다. 그가 명성을 떨치면서도 한번도 청나라와 싸움다운 싸움을 해보지 못한 불운의 명장이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분위기대로 의리와 명분에 투철하고 고집 센 무장이었지만, 당시 실제적인 국제정세, 즉 역사의 흐름에 어두운 장군이었다.

그러나 이는 그가 무능한 것이 아니라 이를 충족시켜주지 못한 그의 조국이 무능하였던 것이다. 그는 이미 망해가는 명나라와 힘을 합쳐 청나라에 저항하여 병자호란의 부끄러움을 씻으려 하였지만 그의 조국이 이를 뒷받침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당시의 국민이나 조정의 감정과 함께 충의‧지조, 그리고 용기 등으로 점철되어 민족의 마음속에 자리하였으니 뒤에 그의 무용담을 소재로 한 고대소설 「임경업전」이 널리 읽혀졌던 것으로도 알 수 있다.

1697년(숙종 23) 12월 숙종의 특명으로 복관되었다. 충주충렬사(忠烈祠), 선천충민사(忠愍祠), 백마산성현충사(顯忠祠) 겸천(兼川)충렬사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瀋陽狀啓
瀋陽日記
恕菴集
明陪臣考
林忠愍公實記
朝鮮名將傳
燃藜室記述
顯忠祠誌
林慶業傳(京枝本)
林慶業(張德順, 韓國의 人間像 2, 新丘文化社, 1980)

[집필자]

차문섭(車文燮)

성명 : "임경업(林慶業)"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歷代總要v04淸人將攻椵島論令柳琳林慶業爲將入送朝廷依其言以兩人爲將率舟師赴之
紀年便攷v21一疋米一斗則進上貢物本道雜役皆在其中而更無催徵之弊請令廟堂議處上特命行之竟以議不一未果行○賜義州府尹林慶業內廏馬慶業入京將還任特賜馬○冊封趙氏昌遠女爲王妃
紀年便攷v21先是淸徵師將侵天朝遣柳琳林慶業等赴之以師不及期驅逐之是歲又徵師助攻登萊命浣等發舟師往赴浣密令三船至登州喩意於都督軍門至北汛口與明兵
紀年便攷v21二年命諸道恤鰥寡孤獨賑飢餒埋骴骼頒救荒撮要於中外○命禮曹抄擇志學而有行者使之恒留泮宮○淸徵舟師遣李浣林慶業等往赴之先是淸徵師將侵天朝遣柳琳林慶業等赴之以師不及期驅逐之是歲又徵師助攻登萊命浣等發舟師往赴浣密令
紀年便攷v21初關西人崔孝一車禮亮安克諴自丙子以後常憤悒欲雪國恥孝一僞得罪於主將林慶業浮海逃入大明時一皓以府尹義而厚資送之孝一至登州說陳洪範不從乃往依於吳三桂爲把摠時以書相通問本州諸豪將
紀年便攷v21可旣與人同事今何忍臨死生地委人而自免乎明發渡江至鳳城淸將盛兵威庭詰之鳴吉曰我爲首相事之大小獨我主張而林慶業爲兵使故使之裝船以送旣非主上所知諸臣亦無知者淸將曰崔閣老事自當可謂鐵石肝腸遂以書送于瀋陽淸主令李敬輿
紀年便攷v21沈不可知欲得一信使更暴小邦情事戊寅秋江邊邏卒得一僧名獨步本以我人留洪承疇幕下爲詗東事出來者也平安兵使林慶業卽報于鳴吉鳴吉招見與語爲人慷慨可托以事乃與機密宰臣議具奏文付獨步由水路入送中國別具一咨抵洪承疇而慶業
紀年便攷v21遂入主中國是爲淸世祖改元順治是時世子隨九王出古長城値此亂又隨入燕京六月還瀋八月又入燕京○殺前平安兵使林慶業初慶業以裝送獨步事亦被淸人責送進發至高陽歎曰天生男子今乃就死於虜庭乎遂於中路逃躱變服爲僧往來江湖間得
紀年便攷v21淸人大怒鳴吉自當赴瀋淸人義而釋之主和議執送三學士不免淸議之唾罵然而與秦檜誤國之心有異嘗拒助攻天朝又與林慶業裝送獨步僧於天朝以通事情君子以爲功罪相半獨步久不還鳴吉時罷相家居作懷仙詞寄平安監司鄭太和以探曰雲海微
紀年便攷v21有西憂又命起復丙子以遂安郡守赴正方山城元帥金自點營擊破虜兵於洞仙嶺庚辰淸兵將西犯錦州請舟及糧餉於我與林慶業承命領舟師往赴虜怒其違拒移書本朝勿收用遂入德源以耕牧爲終老計嘗置所乘馬於窓外芻豆必親執以飼曰常擬朝夕
紀年便攷v22起義兵而勤王己卯因筵臣奏除典牲主簿邦俊雖處士有志當世王室有急未嘗不赴命之召有時而就與虜和親後遂不肯仕林慶業入蓋州邦俊上疏言其非庚辰疏斥和議之非甲申拜持平掌令孝宗癸巳除工議爲成渾李珥上疏辨誣與趙憲素昧而集其遺
紀年便攷v23達濟光州金益熙温陽鄭雷卿坡州尹文擧安東金壽翼全義李行遇南陽洪瑑等十一人請行丁丑道臣繫送翼漢於虜營灣尹林慶業解裘裝送繫瀋陽三月三日有詩曰陽坡細草坼新胎孤鳥樊籠意轉哀荊俗踏靑心外事錦城浮白夢中來風翻夜石隂山動雪
紀年便攷v23義士撃虜敗之天子賞以米布明春聞上下城痛哭幾絶是以拜清北校授不赴常憤憤有討復之志聞崔孝一義勇與之交甞從林慶業入錦州具知遼東虛實形便而歸孝一內附于皇明禮亮潜入瀋陽欲圖內外挾攻之計而事已露清使歸瀋陽執禮亮及同謀者
紀年便攷v23愼軾玄孫秀南以文行著子字汝恕與弟禮亮并卓犖有大節仁祖丁卯亂倡同志入㨿蝶島通椵島爲聲援毛文龍義之丙子從林慶業築劒山城丁丑與義兵將智得男等赴戰奪其俘千餘人及媾成慨然謂禮亮曰吾家世守名節不可屈於虜遂與崔孝一等日夕
紀年便攷v23禮亮等置酒諭所以擧事以米百斛白金百兩布五百桶助孝一行己卯秋孝一浮海去全家內附中國一皓以孝一獲罪於兵使林慶業慍而逃去之意報于朝事得無究然淸人疑之未幾孝一事發初虜詐爲孝一書抵其甥張厚健厚健答書稱黃府君思恤且曰若
紀年便攷v23子之亂常憤悒思爲天下一灑於是惟孝一泛海入明禮亮與兄忠亮及克誠居爲後圖也詳見黃一皓傳孝一至安州見節度使林慶業曰孝一將報皇恩雪國耻而無故浮海而去國人必疑之願得罪於將軍藉口而絶人疑慶業亦大喜乃以事杖孝一衆中廢爲卒
紀年便攷v23謹克誠率精銳救長山朝廷論倡義功浚讓功不居克諧拜直長克計拜奉事克諴超拜副正丁丑以後克諴憤慨不事生業甞從林慶業於錦州而還與崔孝一車禮亮結爲兄弟孝一之入中國也禮亮鬻田宅買舟克諴以米百斛助之潜備戰具市寶劒以俟及事泄
紀年便攷v23天朝授以游擊守備兩資及銀佩朝廷聞其倡義殲賊特加通政除彌串僉使賜錦緞以旌之丙子邊報日急衆推爲大將亦屢勝林慶業柳琳之行以先鋒斥堠將偕往又於慶業李浣之行以中營將偕往出奇制勝有不忘尊周之義再爲彌串再爲宣沙僉使甲申龍
紀年便攷v23孫重蕃上疏訟冤復官賜祭贈左贊諡忠愍正祖朝命不祧改旌其閭曰有明總兵朝鮮國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諡忠愍公林慶業贈貞敬夫人全州李氏忠烈雙成之閭
紀年便攷v23林慶業亨業弟宣祖甲午生字伯英號孤松光海戊午登武科歷防踏樂安定州寧邊承命攻皇明叛賊耿仲明等大破之天子下璽書奬
紀年便攷v24李尙敬琢子登武科仁祖丁丑侍從世子于瀋陽忠義功節與林慶業李浣及斥和諸臣相上下八典州郡九握梱節官止統制使淸白廉謹事載國乘顯宗甲寅卒年六十玄孫柱國見下
紀年便攷v24朴敏道密陽人字性之志氣跅弛年十一讀史至項籍請學萬人敵擊卷歎曰此大夫事也登武科拜宣傳官時淸人索林慶業甚急慶業道亡朝廷命敏道跡捕之敏道見平安觀察使鄭太和曰慶業之亡非畏死將有爲也朝廷縱畏彼強公獨不爲義士地
紀年便攷v24爲上將柳琳爲副灌與田闢充從事官灌曰兵事縱有所講助攻錦州義不敢出托病不赴杖配南漢明年宥還庚辰虜又徵舟師林慶業爲上將李院副之淸譯鄭命壽請備文從事李溟抉私憾白上曰許灌前固托病今不行請以軍律繩之慶業歎曰許公何罪置之
紀年便攷v24戊寅秋爲詗東事出來江邊邏卒得獨步時崔鳴吉以宗社詘意圖存狀將爲移咨轉聞皇上而海路遼夐欲得一信使平安兵使林慶業卽報于鳴吉鳴吉招見獨步與語慷慨善辭令可托大事丁丑後不復通中國上每正朝西向哭左右皆泣及得獨步具奏聞付送
東國歷代總目v02皇朝○初朝廷因相臣崔鳴吉議以丁丑事情具文移咨陳都督洪範冀聞皇明久未得報至是又具奏咨付僧獨步令平安兵使林慶業裝遣涉海傳達得回咨有曰貴國苦情天人共鑑
震史記略v4南獲柳大用時亮捕柳濯洪振英安益信等數百人斬于京師餘黨悉平五月錄功諸人司臺啓幷碩只碩龍附錄於寧社功臣○林慶業初依黃宗藝於登州平海島劇賊及副將馬和周降金宗藝逃一城皆降慶業亦走爲淸將荊山所執矢死抗節終不屈稱爲義士
震乘總v9崔鳴吉自瀋獄還李烓伏誅金自點殺林慶業初鳴吉議將丁丑被寇事情移咨都督陳弘範冀僧獨步達天聽久未得報會平兵林慶業捕得謀僧獨步蓋以我人往洪承疇依洪承疇幕下者也具奏咨付送令平安兵使林慶業裝送涉貴國苦情天人共鑑李烓謁本
震乘總v9範冀僧獨步達天聽久未得報會平兵林慶業捕得謀僧獨步蓋以我人往洪承疇依洪承疇幕下者也具奏咨付送令平安兵使林慶業裝送涉貴國苦情天人共鑑李烓謁本朝陰事海傳達得回咨有曰貴國苦情天人共鑑及李烓爲宣川府使潛商事發淸人執囚
震乘總v9大將自前兵曹單望御將三望受點李烓伏誅自點殺林慶業啓下始自備局三望受點○崔鳴吉自瀋獄還李烓伏誅金自點殺林慶業初鳴吉議將丁丑被寇事情移咨都督陳弘範冀僧獨步達天聽久未得報會平兵林慶業捕得謀僧獨步蓋以我人往洪承疇依
震乘總v9御將三望受點李烓伏誅自點殺林慶業
震乘總v9經史官兼春秋曾經史官別兼春秋應薦○殺前義州府尹黃一皓崔孝一者黃芝所被殺崔孝一浮海歸州之大豪也嘗受罪於林慶業全家浮海歸明朝爲把摠時以南朝書相通問本州諸豪將以送船迎諸豪諸豪卽將盡發一州士民縛取府尹李敏樹泛海內附
見睫錄v1義州白馬山城卽古之威遠鎭也舊有石城崩頹崇禎壬申防禦使林慶業領南兵修築因爲邑居古有長流淸泉在內城中而改築時新經兵火人民極小難於廣築縮舊改築泉在城外是以丙子陷於胡
國朝事略v1 爲莊烈妃漢原府院君昌遠 女也淸執前判書金尙憲 囚瀋陽獄號淸陰 嘗斥和被執不屈六年乃歸官左相平安兵使林慶業 以裝遣僧獨步 事爲李烓 所訴被本國拿送慶業 路遁浮海向南京至登州依本鎭將黃宗藝 未幾爲裨將馬登 所
南漢解圍錄v1猝入孤城終得全身及今果驗云左相洪瑞鳳 遭母喪以李聖求 爲左相崔鳴吉 爲右相淸兵至關西整頓舟楫將與柳琳林慶業 攻椵島要使兩將充前行慶業 等欣然應諾曰椵島乃陸海珍藏天幸吾屬爲前部財物可盡得但是征戰所得雖片瓦決不
丙子錄v1我國合勢以犯椵島有者德仲明初以唐將習於舟師曾叛據山東爲天朝所擊浮海投賊者卽所謂孔耿也我國以柳琳爲首將林慶業爲副隨孔耿同犯椵島島在海中非但伯船甚難周沒火炮賊累日不敢犯問策於我國兩將辭以不知賊或威或誘慶業曰島之
野乘v12與我囯合勢以犯椵島有徳仲明初以唐将習扵舟師曽叛據山東為天朝㪽撃浮海殺賊者卽㪽謂孔耿也我囯以柳琳為首将林慶業為副随孔耿同犯椵島島在海中非但泊舟甚難周設火砲賊不敢犯問策扵我囯両将辭以不知賊或成或誘慶業曰島之一海
漢瀋日記抄)二十日二十日陪坐東宮時語及我朝將才曰臣與前 府尹林慶業佐戎于守禦使李時伯知其爲人智謀 智謀英勇無比於世而
國朝捷錄v01林慶業
郯述v01謝免運米送船謝出送林慶業謝出送漂民
鞠廳日記v1上御時敏堂親鞫罪人林慶業
鞠廳日記v1䅘啓曰自楊州入來罪人任有彦始來到闕下何罪人先問乎上曰大臣推官進前今番獄事無適見矣罪人等承服招內擧名林慶業者多矣而其間或慮有抑冤者中夜思之自爾無寐矣諸卿等意則以爲何如自點曰小臣則昨日鉤問時各別扣問詰其乘舡之
鞠廳日記v1實人必不疑以此見之則應有同謀之狀矣慶業率軍兵遮截義州之言必是餙辭欲爲發明亡命之罪乃爲此言矣李時楷進曰林慶業物故單子來呈矣
閔文忠公奏議v4百金唐布宣川人車禮亮龍川人安克諴爲孝一備大舶載米百斛孝一慮無故亡命易致人疑且恐貽禍朝廷故受重杖於兵使林慶業人莫之知也孝一乃揚言於衆曰丈夫辱矣何面目復齒鄕黨唯當滅影山谷與世絶耳遂挈妻子匿禮亮家己卯八月孝一將發
閔文忠公奏議v4城結被擄灣人夜襲韓潤營斬順巖等數十級順巖卽義州官奴藏匿潤俾投虜者也丙子虜直犯京城游騎往來以絶援兵府尹林慶業兵寡入保白馬城孝一說慶業出擊游騎於鴨江上大破之斬其貴將堯虎明年和議成孝一鬱鬱不樂會芝所黃公尹義州察其
大事編年v11乘夜逃去鳴吉到鳳城淸將列坐盛兵衛庭詰之曰送僧明朝何人主張鳴吉曰我爲首相事之大小皆關於我此事我獨主張而林慶業爲平安兵使故使之裝船以送旣非主上所知諸臣亦旡知者座上漢人解文字者書送于瀋陽遂以兵圍守淸將來昭顯館言曰
大事編年v11烓欲賣國以蔪生盡告移咨事仍書我國宰臣崔鳴吉等及名流十餘人以與虜淸人迫令來置對君臣上下莫不危懼申景禛納林慶業議以爲雖有嘖言旣無可證之端不如諱之鳴吉以爲彼旣偵知漢船往來狀而有此擧今若不以實言是益其疑且天下事未可
大事編年v11瑞備將鳴吉置對說話啓聞未幾淸主回答至同時被拘諸宰竝被放釋鳴吉獨加鎻杻入瀋陽幽諸北館北館者死囚所拘也○林慶業聞命裝束仗劍就道嘆曰吾稟天地之氣不爲物而爲人不爲婦人而爲男子惜乎此生偏邦將局束以送一生也遂於中路逃脫
大事編年v11上親見慰諭使賜五百金以助行資仍賜豹裘鳴吉倍道疾馳到灣參判朴潢査問使鄭致和尹順之諸人幷來會明燭而語潢曰林慶業則職是西閫前後裝船送僧皆出其手萬無全活之理今若委於林則禍可以紓且相公之於林輕重懸殊而亦非有負於林也鳴
國朝人物志v3生二子辛未春我國使臣入明還到登州英哲請同歸歸其故鄕庚申虜犯蓋州請兵於我上將林慶業陰使英哲乘小船往遺明將書約我軍銃去丸明兵亦去矢鏃合戰良久我故受圍而降合力破虜使片甲不還明將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