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수(鄭命壽)
[상세내용]
정명수(鄭命壽)
미상∼1653년(효종 4). 조선 중기의 민족반역자. 평안도 은산(殷山) 출신. 천례(賤隷)출신으로 성품이 교활하였다.
1618년(광해군 10) 명나라가 요동을 침범한 후금(後金: 淸)을 토벌할 때 조선에 원병(援兵)을 요청하자, 조선에서는 강홍립(姜弘立)을 오도도원수로 삼고 김경서(金景瑞)를 부원수로 삼아 1만3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출정하게 하였는데, 그도 이때 강홍립을 따라 출정하였다.
1629년(인조 7) 강홍립의 군대는 명나라 제독 유정(劉綎)의 휘하에 들어갔으나 부차전투(富車戰鬪)에서 패배하자 후금에 항복하였는데, 이때 포로가 되었다.
이듬해 조선 포로들은 석방되었으나, 그는 청나라에 살면서 청국어를 배우고, 청나라에 우리나라 사정을 자세히 밀고하여 청나라 황제의 신임을 얻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청나라 장수 용골대(龍骨大)‧마부대(馬夫大)의 통역으로 입국하여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하는 데 앞잡이 노릇을 하였다.
그뒤 청나라의 세력을 믿고 조정에 압력을 가하여 영중추부사에까지 올랐다. 이에 조정에서는 그를 두려워하여 뇌물을 주고, 그의 친척들에게도 벼슬을 주어 비위를 맞추었다.
그러나 그는 또 1639년 그의 처족인 정주의 관노(官奴) 봉영운(奉永雲)을 정주군수로 임명하도록 강청(强請)하고, 이어 병조의 관리들을 구타하는 등 갖은 행패를 부리며 조정을 좌우하다가 청나라로 건너가 살았다.
그곳에서도 왕을 모독하고 갖은 행패를 부렸으며 청나라로 보내는 세폐(歲幣)를 노략질하였다.
1653년(효종 4) 심양(瀋陽)에서 시강원서리(侍講院書吏) 강효원(姜孝元), 성주포수(星州砲手) 이사용(李士用), 시강원필선 정뇌경(鄭雷卿) 등에게 모살(謀殺)되었다.
1618년(광해군 10) 명나라가 요동을 침범한 후금(後金: 淸)을 토벌할 때 조선에 원병(援兵)을 요청하자, 조선에서는 강홍립(姜弘立)을 오도도원수로 삼고 김경서(金景瑞)를 부원수로 삼아 1만3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출정하게 하였는데, 그도 이때 강홍립을 따라 출정하였다.
1629년(인조 7) 강홍립의 군대는 명나라 제독 유정(劉綎)의 휘하에 들어갔으나 부차전투(富車戰鬪)에서 패배하자 후금에 항복하였는데, 이때 포로가 되었다.
이듬해 조선 포로들은 석방되었으나, 그는 청나라에 살면서 청국어를 배우고, 청나라에 우리나라 사정을 자세히 밀고하여 청나라 황제의 신임을 얻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청나라 장수 용골대(龍骨大)‧마부대(馬夫大)의 통역으로 입국하여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하는 데 앞잡이 노릇을 하였다.
그뒤 청나라의 세력을 믿고 조정에 압력을 가하여 영중추부사에까지 올랐다. 이에 조정에서는 그를 두려워하여 뇌물을 주고, 그의 친척들에게도 벼슬을 주어 비위를 맞추었다.
그러나 그는 또 1639년 그의 처족인 정주의 관노(官奴) 봉영운(奉永雲)을 정주군수로 임명하도록 강청(强請)하고, 이어 병조의 관리들을 구타하는 등 갖은 행패를 부리며 조정을 좌우하다가 청나라로 건너가 살았다.
그곳에서도 왕을 모독하고 갖은 행패를 부렸으며 청나라로 보내는 세폐(歲幣)를 노략질하였다.
1653년(효종 4) 심양(瀋陽)에서 시강원서리(侍講院書吏) 강효원(姜孝元), 성주포수(星州砲手) 이사용(李士用), 시강원필선 정뇌경(鄭雷卿) 등에게 모살(謀殺)되었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顯宗實錄
肅宗實錄
正祖實錄
承政院日記
燃藜室記述
顯宗實錄
肅宗實錄
正祖實錄
承政院日記
燃藜室記述
[집필자]
이희권(李羲權)
명 : "명수(命壽)"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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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