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서봉(洪瑞鳳)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D64DC11CBD09B1572X0 |
자(字) | 휘세(輝世) |
호(號) | 학곡(鶴谷) |
시호(諡號) | 문정(文靖) |
생년 | 1572(선조 5) |
졸년 | 1645(인조 23)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남양(南陽[唐])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홍천민(洪天民) |
조부 | 홍춘경(洪春卿) |
공신호 | 정사공신(靖社功臣) |
공신호 | 영사공신(寧社功臣) |
[관련정보]
[상세내용]
홍서봉(洪瑞鳳)
1572년(선조 5)∼1645년(인조 2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唐]). 자는 휘세(輝世), 호는 학곡(鶴谷).
조부는 황해도관찰사 홍춘경(洪春卿)이며, 부친은 도승지 홍천민(洪天民)이다.
1590년(선조 23) 진사가 되고 1594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600년 사서가 되고 이어서 정언‧부수찬, 1602년 이조좌랑, 이듬해 성주목사를 역임하였다. 경기도 암행어사로 다녀와 1606년 사예가 되고 1608년(광해군 즉위) 중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한 뒤 사성‧응교를 역임하고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610년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이듬해 동부승지가 되었는데 김직재옥사(金直哉獄事)에 장인인 황혁(黃赫)이 연루되어 삭직당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을 주동,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에 책록되고 익녕군(益寧君)에 봉해졌다. 병조참의‧이조참의‧대사간‧동부승지‧부제학‧대사헌‧병조참판을 차례로 역임하고 1626년 도승지가 되었으며, 1628년 유효립(柳孝立)의 모반을 고변, 영사공신(寧社功臣) 2등에 책록되고 지의금부사가 되었다.
예조판서를 거쳐, 1630년 다시 대사헌이 되어 흉년으로 안팎이 곤궁할 때 사치가 심함을 지적, 이의 시정을 진언하였다. 이어서 우참찬‧이조판서‧좌빈객‧병조판서를 역임하고 1634년 다시 예조판서가 되어 부묘도감제조(祔廟都監提調)를 겸하였다.
이듬해 좌참찬‧대제학이 되고, 1636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이 되었는데 그해 겨울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화의(和議)를 주장, 최명길(崔鳴吉)‧김신국(金藎國)‧이경직(李景稷) 등과 청나라 군사진영에 빈번히 내왕하며 화의를 위한 실무를 수행하였다.
1639년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지고, 이듬해 영의정에 올라 한재(旱災)로 인한 기민(饑民)의 구제를 위하여 부민(富民)들에게 실직(實職)을 주어 모속(募粟)할 것을 주장하였다.
1640년부터 1645년까지 영의정과 좌의정을 번갈아 역임하며 복잡한 대내외 사건의 해결에 적극적으로 국왕을 보필하였는데, 1645년(인조 23) 청나라에서 귀국한 소현세자(昭顯世子)가 급사하자 세손을 잇는 것이 상도(常道)임을 들어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인조의 의사에 반대하였다.
일찍이 시명을 떨쳐 『청구영언』에 시조 1수가 전한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조부는 황해도관찰사 홍춘경(洪春卿)이며, 부친은 도승지 홍천민(洪天民)이다.
1590년(선조 23) 진사가 되고 1594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600년 사서가 되고 이어서 정언‧부수찬, 1602년 이조좌랑, 이듬해 성주목사를 역임하였다. 경기도 암행어사로 다녀와 1606년 사예가 되고 1608년(광해군 즉위) 중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한 뒤 사성‧응교를 역임하고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610년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이듬해 동부승지가 되었는데 김직재옥사(金直哉獄事)에 장인인 황혁(黃赫)이 연루되어 삭직당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을 주동,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에 책록되고 익녕군(益寧君)에 봉해졌다. 병조참의‧이조참의‧대사간‧동부승지‧부제학‧대사헌‧병조참판을 차례로 역임하고 1626년 도승지가 되었으며, 1628년 유효립(柳孝立)의 모반을 고변, 영사공신(寧社功臣) 2등에 책록되고 지의금부사가 되었다.
예조판서를 거쳐, 1630년 다시 대사헌이 되어 흉년으로 안팎이 곤궁할 때 사치가 심함을 지적, 이의 시정을 진언하였다. 이어서 우참찬‧이조판서‧좌빈객‧병조판서를 역임하고 1634년 다시 예조판서가 되어 부묘도감제조(祔廟都監提調)를 겸하였다.
이듬해 좌참찬‧대제학이 되고, 1636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이 되었는데 그해 겨울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화의(和議)를 주장, 최명길(崔鳴吉)‧김신국(金藎國)‧이경직(李景稷) 등과 청나라 군사진영에 빈번히 내왕하며 화의를 위한 실무를 수행하였다.
1639년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지고, 이듬해 영의정에 올라 한재(旱災)로 인한 기민(饑民)의 구제를 위하여 부민(富民)들에게 실직(實職)을 주어 모속(募粟)할 것을 주장하였다.
1640년부터 1645년까지 영의정과 좌의정을 번갈아 역임하며 복잡한 대내외 사건의 해결에 적극적으로 국왕을 보필하였는데, 1645년(인조 23) 청나라에서 귀국한 소현세자(昭顯世子)가 급사하자 세손을 잇는 것이 상도(常道)임을 들어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인조의 의사에 반대하였다.
일찍이 시명을 떨쳐 『청구영언』에 시조 1수가 전한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肅宗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大東野乘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肅宗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大東野乘
[집필자]
이원근(李元根)
대표명 | 홍서봉(洪瑞鳳) |
명 | 봉서(鳳瑞), 서봉(瑞鳳) |
봉호 | 영양부원군(寧陽府院君), 익녕부원군(益寧府院君), 익녕부원군(益寕府院君) |
성명 | 홍서봉(洪瑞鳳), 홍서봉(洪瑞鳯) |
시호 | 문정(文靖) |
자 | 휘세(輝世) |
호 | 학곡(鶴谷) |
명 : "봉서(鳳瑞)"에 대한 용례
전거 | 용례 |
---|---|
郯述v01 | 庚午進父鳳瑞癸酉第 吏議 |
수정일 | 수정내역 |
---|---|
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