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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집(沈諿)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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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자순(子順)
호(號)남애(南崖)
시호(諡號)효간(孝簡)
생년1569(선조 2)
졸년1644(인조 22)
시대조선중기
본관청송(靑松)
활동분야문신 > 문신
심우정(沈友正)

[상세내용]

심집(沈諿)
1569년(선조 2)∼1644년(인조 2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자순(子順), 호는 남애(南崖).

부친은 목사(牧使) 심우정(沈友正)이다.

1596년(선조 29)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보직되고 예문관에 들어가 검열대교 등을 역임하면서 사정(邪正)을 논하였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한때 은거하였다.

1601년에 예문관검열로 복관되어 여러 요직을 역임하고 수원판관이 되었는데 당시 간관이었던 정홍익(鄭弘翼)과 함께 무고를 받은 성혼(成渾)을 변론하다가 옹진현령으로 좌천되었다.

1605년 전적예조정랑정언 겸 문학 등을 두루 거쳐 1607년에는 죽산부사(竹山府使)로 나아갔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장령으로 직언을 하다가 다시 면직되었다. 은계찰방(銀溪察訪)해운판관(海運判官)을 거쳐 고령현감이 되었으나, 정인홍(鄭仁弘)의 당이 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을 비방한 데 반발하다가 대간의 탄핵을 받아 다시 면직되었다.

1614년(광해군 6) 양호염철조도사(兩湖鹽鐵調度使)로 나갔다가 사예검상사인보덕 등을 역임하고, 폐모론이 일어나자 한때 관직에서 물러났다. 인조반정 후 병조참지가 되고, 왕의 신임을 얻어 도승지안변부사, 형조공조판서를 역임하고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1636년에는 형조판서로서 남한산성에 왕을 호종(扈從)하였다.

이때 화친의 조건이 되는 볼모로서 왕족인 능봉군(綾峰君)이 왕의 동생으로, 판서인 그가 대신으로 가장하여 회담에 참가하였으나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이듬해 이로 인하여 유백증(兪伯曾) 등의 탄핵을 받아 문외출송(門外黜送)되었으나 1638년에 용서받아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그러나 1644년 아들 심동구(沈東龜)심기원(沈器遠)의 모반사건에 연좌되어 유배되자 지병이 악화되어 죽었다. 뒤에 아들로 말미암아 직첩(職牒)을 환수당하였으나 숙종송시열(宋時烈) 등에 의하여 신원되었다. 시호는 효간(孝簡)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肅宗實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집필자]

차문섭(車文燮)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