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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백증(兪伯曾)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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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자선(子先)
호(號)취헌(翠軒)
시호(諡號)충경(忠景)
생년1587(선조 20)
졸년1646(인조 24)
시대조선중기
본관기계(杞溪)
활동분야문신 > 문신
유대일(兪大逸)
외조부이종린(李宗麟)
저서『취헌소차(翠軒疏箚)』
공신호정사공신(靖社功臣)

[상세내용]

유백증(兪伯曾)
1587년(선조 20)∼1646년(인조 2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자선(子先), 호는 취헌(翠軒).

좌찬성 유대일(兪大逸)의 아들, 모친은 이종린(李宗麟)의 딸이다.

1612년(광해군 4) 진사로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1621년 병조좌랑이 되었으나 이이첨(李爾瞻) 등 권신들에게 아부하지 않아 한직에 머물렀고,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에 반대하여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때 공을 세워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으로 기평군(杞平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사간으로 김신국(金藎國)조성(趙誠)박로(朴𥶇) 등을 탄핵하고, 그뒤 부응교로서 공서파(功西派)의 영수였던 이조판서 김류(金瑬)가 북인 남이공(南以恭)대사헌으로 삼으려는 데 반대하다가 이천현감(伊川縣監)으로 좌천되었다.

1627년(인조 5)에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강화도로 찾아가 사도시정(司䆃寺正)에 임명된 뒤 후금(後金)과의 화의의 잘못을 상소하였다.

1629년 박정(朴炡)나만갑(羅萬甲) 등과 노서(老西)로 지목되고 공서를 공격하다가 가평군수로 좌천되고, 이어 이조참의가 되었으나 김류윤방(尹昉) 등 대신들의 무능과 안일을 비난하다가 수원부사로 또다시 좌천되었으며, 이어 1631년에는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이듬해에는 대사간으로 이조판서 이귀(李貴)박지계(朴知誡)지평으로 추천하자 참판 이성구(李聖求), 좌랑 구봉서(具鳳瑞) 등과 함께 이를 반대하였으며, 1634년에는 인조의 친아버지인 정원군(定遠君)의 추숭 논의가 분분하자 추숭의 찬성에 적극 가세하여 이를 성사시켰다.

이듬해 경상도관찰사가 되고 이어 병조참지를 역임한 뒤 1636년에는 이조참판이 되었다.

이해 겨울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부총관으로 왕을 남한산성에 호종, 화의를 주장한 윤방김류 등을 처형할 것을 주장하다 다시 파직되었다.

이듬해 화의가 성립된 뒤 대사성으로 등용되고, 이어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가 되어 다시 윤방김류 등의 전후의 무사안일한 행실과 반성이 전혀 없음과 김경징(金慶徵)이민구(李敏求)강도(江都)방어 실패의 죄를 탄핵하였다.

그뒤 대사헌이 되어 다시 윤방이 종묘의 신주를 모독한 죄를 탄핵하고 자강책 10여조를 상소하였다. 성품이 강직하여 여러 번 직언을 하다가 화를 당하기도 하였으나 굽히지 않고 계속하여 밀고 나감으로써 그의 충직함이 인정되어 그때마다 복직되기도 하였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저서로는 『취헌소차(翠軒疏箚)』 3권 3책이 있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淸選考

[집필자]

정하명(鄭夏明)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