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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두수(尹斗壽)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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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자앙(子仰)
호(號)오음(梧陰)
시호(諡號)문정(文靖)
생년1533(중종 28)
졸년1601(선조 34)
시대조선전기
본관해평(海平)
활동분야문신 > 문신
윤변(尹忭)
저서『오음유고』
저서『기자지(箕子誌)』
공신호광국공신(光國功臣)
공신호호성공신(扈聖功臣)

[상세내용]

윤두수(尹斗壽)
1533년(중종 28)∼1601년(선조 34).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자앙(子仰), 호는 오음(梧陰).

군자감정 윤변(尹忭)의 아들이며, 윤근수(尹根壽)의 형이다. 이중호(李仲虎)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55년(명종 10) 생원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1558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간 다음, 예문관검열홍문관정자저작을 역임하였다.

1563년 이조정랑에 재임중 권신(權臣) 이량(李樑)이 그의 아들 이정빈(李廷賓)이조좌랑에 천거한 것을 박소립(朴素立)기대승(奇大升) 등과 함께 반대하였다. 이로 인하여 대사헌 이감(李戡)의 탄핵을 받아 삭직되었으나, 그해 영의정 윤원형(尹元衡), 우의정 심통원(沈通源)의 상계(上啓)로 무죄임이 밝혀진 뒤 수찬에 다시 서용(敍用)되었다.

그뒤 이조정랑의정부검상사인사헌부장령성균관사성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내고, 1565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천거로 부응교에 임용된 뒤 동부승지우승지를 거쳐, 1576년(선조 9) 대사간에 이르렀다.

이듬해 사은사(謝恩使)명나라에 다녀온 뒤 도승지가 되었으나, 이종동생 이수(李銖)의 옥사에 연좌, 아우 윤근수와 함께 파직되었으며, 대사간 김계휘(金繼輝)의 주청으로 복직되어 연안부사로 나갔다.

1581년 황해감사의 서장(書狀)에 의하여 재령군수 최립(崔岦) 등과 함께 구황(救荒)을 잘하였다 하여 옷 한벌을 하사받았다.

이후 한성좌윤오위부총관형조참판을 역임하고, 1587년 왜구가 전라도 지방을 침범하여 지역 인심이 흉흉해지자,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하여 수사‧수령의 기강쇄신, 범죄자 처벌에 노력하였으며, 1589년 평안감사를 지내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종계(宗系)를 변무(辨誣)한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이 되어 해원군(海原君)에 봉하여졌다.

그뒤 대사헌호조판서를 역임하고, 1591년 5월 석강(夕講)에서 도요토미(豊臣秀吉)의 답서를 명나라에 구주(具奏)하여 그 진상을 보고할 것인가의 여부에 대하여, 병조판서 황정욱(黃廷彧)과 함께 보고할 것을 주장하다가 양사의 합계(合啓)로 정철(鄭澈)에게 당부(黨附)하였다 하여 파면되고, 이미 건저문제(建儲問題)로 정철이 화를 당할 때 같은 서인으로 연루되어 회령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그뒤 그의 견해가 올바른 것임을 안 선조는 그의 공을 인정하는 뜻에서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재기용되어, 어영대장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이해 평양 행재소(行在所)에 임진강의 패보(敗報)가 전해지자,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자는 주장이 있자 그는 이를 반대하고 우리의 힘으로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해 이조판서 이원익(李元翼),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등과 함께 평양성을 지켰다. 그 이듬해 삼도체찰사(三道體察使)를 겸하였다.

1595년 판중추부사가 되었고, 해원부원군(海原府院君)에 봉하여졌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영의정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난국을 수습하였다.

이듬해 좌의정이 되고 영의정에 이르렀으나, 대간의 계속되는 탄핵으로 사직하고 남파(南坡)에 물러났다.

1605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봉하여졌다. 그는 평소 온화하고 화평하였으나, 큰일을 당하였을 때에는 직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임진왜란‧정유재란의 국가적 위기 극복에 노력하였다.

저서로는 『오음유고』『기자지(箕子誌)』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大東野乘
典故大方
壬辰戰亂史(李炯錫, 壬辰戰亂史刊行委員會, 1974)

[집필자]

장동익(張東翼)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