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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량(李樑)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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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공거(公擧)
생년1519(중종 14)
졸년1563(명종 18)
시대조선전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대(李對)

[상세내용]

이량(李樑)
1519년(중종 14)∼1563년(명종 1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거(公擧). 효령대군의 5대손으로, 현령 이대(李對)의 아들이며, 명종인순왕후(仁順王后) 심씨(沈氏)의 외숙이다. 정사룡(鄭士龍)의 문인이다.

1552년(명종 7) 정사룡고시관이 되자, 그의 후원에 의하여 성균관유생으로 곧바로 식년문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그리하여 승정원주서가 되고, 1555년 역시 정사룡의 추천으로 독서당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58년 병조정랑이 되고, 이어서 그해에 사간원헌납홍문관수찬교리사헌부지평병조정랑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홍문관으로 다시 옮겨 부응교응교를 지내고, 윤원형(尹元衡)이 척신임을 기화로 횡포가 심하자, 이를 견제하려는 명종에게 중용되어 승정원동부승지를 거쳐 홍문관부제학으로 승진하였다.

1560년 사간원대사간이 되고, 이어 병조참지예조참판동지중추부사이조참판동지성균관사에 올랐다. 과거에 급제한 지 8년 만에 당상관에 올랐다. 그는 명종의 신임을 바탕으로 이감(李戡)신사헌(愼思獻)권신(權信)윤백원(尹百源) 등과 결당하여 세력을 기르고 정치를 농단하였다.

한때 세력을 더욱 키우고자 자기 당파의 김명윤(金命胤)을 재상으로 삼기 위하여 우의정 이준경(李浚慶)사직을 상소하기까지 하였다. 축재에도 힘써 그의 집 앞은 시장과 같았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윤원형심통원(沈通源)과 더불어 3흉(凶)이라 불렀다. 이에 명종도 이를 무마하기 위해서 평안도관찰사로 내보냈다.

그러나 1562년 다시 공조참판홍문관제학에 중용되고, 이조참판에 제수되었다. 그는 더욱 무리를 늘려 그의 세도는 절정에 달하였다. 이어 예조판서의정부우참찬공조판서를 역임하고 이듬해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에 사림이 그의 비리를 폭로하고 비판을 가하자, 1563년 몇몇 무리들과 모의하여 박소립(朴素立)기대승(奇大升)허엽(許曄)윤두수(尹斗壽)윤근수(尹根壽)이산해(李山海) 등 사림을 제거하려 하였다.

그러나 조카인 심의겸(沈義謙)에게 발각되고, 기대항(奇大恒)에 의하여 탄핵받게 되어 그 무리와 함께 삭탈관직되었다. 이어서 평안도강계 로 귀양가서 적소에서 죽었다.

초기에는 정사룡김홍도(金弘度)김계휘(金繼輝) 등과 교유하였고, 세도를 펴면서는 정유길(鄭惟吉)고맹영(高孟英)이령(李翎)김백균(金百鈞) 등이 모두 그 당여였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志
燃藜室記述

[집필자]

최완기(崔完基)

명 : "량(樑)"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國朝人物志v2公虔玄孫庚子進士丙午文科薦入翰苑癸亥爲副提學時臺閣受李樑嗾欲嫁禍士林公率同僚抗箚劾擅權之罪竝論兩司不職上大悟卽命黜樑遞兩司是日拜大司憲與諫院極陳禍根請竄樑支黨隨其
國朝人物志v2科在司諫也李樑以戚里張甚驟得峻擢公欲擧正之遂被其敲撼出爲長湍府使癸亥上用言者竄召公爲右承旨嘗侍上宴宰執于內苑上問左右飮孰多公曰臣亦頗長于此上命以巨觥至大醉使中使
國朝人物志v2縣令對子丙午生員進士明宗壬子文科吏曹判書初元衡擅威福上內畏之欲植以敵元衡也李乃國舅沈鋼妻弟爲人愚而多氣儕流嗤笑自小官驟陞不數年正卿一時嗜利之輩
國朝人物志v2壯元明宗戊午文科拜銓郞時李樑以其子干薦斗壽堅不可以是獲罪褫奪職名屛居坡州敗敍復修撰戊寅有姊弟李銖獄事與弟根壽坐罷大司諫金繼輝言不得以曖昧累人自後不安在
國朝人物志v2停之李樑用事泓與同僚黃三省言其騃妄必敗附麗者秋蠅聚陽三省洩其語泓將被其害會敗事得已泓嗜讀書藏書萬卷爲詩文瞻敏立就談藝者以爲難錄光國平難二勳封杞城府院君入耆社甲午
國朝人物志v2必能成就爲吏曹正郞時李樑以權姦用事勢焰熏灼其子廷賓當擬銓郞仁涵力沮而不能得及敗有不悅者反誣謂廷賓之八銓仁涵有力焉遂落職尹斗壽朴素立同僚席熟知其不然以不能直冤
國朝人物志v2科輔國行吏曹判書諡懿憲同上李忠養字孝叔號後溪完山人郡守瀚子從曾孫丙申文科參議同上任碩齡字汝壽號石江初名鶴齡豐川人承旨呂孫丙申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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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