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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항(金壽恒)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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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구지(久之)
호(號)문곡(文谷)
시호(諡號)문충(文忠)
생년1629(인조 7)
졸년1689(숙종 15)
시대조선중기
본관안동(安東[新])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광찬(金光燦)
조부김상헌(金尙憲)
저서『문곡집』

[상세내용]

김수항(金壽恒)
1629년(인조 7)∼1689년(숙종 1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新]). 자는 구지(久之), 호는 문곡(文谷).

조부는 좌의정 김상헌(金尙憲), 부친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김광찬(金光燦)이다.

1646년(인조 24) 반시(泮試)에 수석하고, 진사시에 장원했으며, 1651년(효종 2) 알성문과에 장원급제, 성균관전적이 되었다. 이어 병조좌랑사서(司書)경기도사지평정언을 거쳐, 1753년 동지사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정시에 5등으로 합격하여 효종으로부터 말을 하사받았으며, 이듬해 홍문관부수찬교리를 거쳐 이조정랑이 되었고, 중학(中學)한학교수(漢學敎授)를 겸하였다.

1655년 호당(湖堂)사가독서하고 수찬이 되었다가, 응교(應敎)사간보덕(輔德)을 지냈으며, 중시에서 을과로 급제, 형조참의승지부제학을 지냈다.

1659년(현종 즉위) 효종릉비의 전서(篆書)를 쓴 공로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도승지예조참판이조참판을 지냈으며, 1662년 왕의 특명으로 예조판서에 발탁되었다.

그뒤 육조의 판서를 두루 거쳤고, 특히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명사들을 조정에 선임하는 데 힘썼으며, 1672년 44세의 나이로 우의정에 발탁되고, 이어 좌의정에 승진하여 세자부(世子傅)를 겸하였다.

그러나 서인 송시열(宋時烈) 등이 왕의 경원을 받고 물러남을 보고 남인 재상 허적(許積)을 탄핵한 대간을 힘써 변호하다가 도리어 판중추부사로 물러났으며, 사은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74년 갑인예송에서 서인이 패하여 영의정이던 형 김수흥(金壽興)이 쫓겨나자, 대신 좌의정으로 다시 임명되고, 숙종 즉위 후 허적윤휴(尹鑴)를 배척하고 종실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복선군(福善君) 이남(李柟) 형제의 추문을 들어 그 처벌을 주장하다가 집권파인 남인의 미움을 받아 영암에 유배되고 1678년(숙종 4)에 철원으로 이배되었다.

1680년 이른바 경신대출척이 일어나 남인들이 실각하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복귀, 영의정이 되어 남인의 죄를 다스리는 한편, 송시열박세채(朴世采) 등을 불러들였다.

이후 8년 동안 영의정으로 있다가 1687년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체임되었고, 1689년 태조어용(太祖御容)을 전주에 모셔놓고 돌아오는 길에 기사환국이 일어나 남인이 재집권함으로써, 남인 명사를 남살하였다는 장령(掌令) 김방걸(金邦杰) 등의 탄핵을 받고 진도로 유배, 위리안치되었다.

뒤이어 예조판서 민암(閔黯)을 비롯한 6판서‧참판참의 등 남인 경재(卿宰) 수십인의 공격과 사헌부사간원의 합계(合啓)로 사사되었다. 이는 경신 이후의 남인 옥사를 다스림에 있어 그가 위관으로 있었고, 특히 소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인 재상 오시수(吳始壽)를 처형하였기 때문에 입게 된 보복이다.

그는 절의로 이름 높던 김상헌의 손자로 가학(家學)을 계승한데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인 송시열송준길(宋浚吉)과 종유하였다.

특히 송시열이 가장 아끼던 후배로 한때 사림의 종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할 때 송시열을 옹호하고 외척과 가까운 노론의 영수가 되었던 관계로, 소론 명류들로부터 배척을 받기도 하였다.

시문에 뛰어났고 그의 변려문(騈儷文)은 당대의 제일인자로 손꼽혔으며, 가풍을 이은 필법이 단아하여 전서와 해서‧초서에 모두 능하였다. 사후의 세평은 그가 조정에서 벼슬할 때 세 가지의 큰 절의를 세웠다고 찬양하는데, 첫째는 남인의 역모를 꺾음으로써 기강을 유지하게 하였다는 것이고, 둘째는 소론이 이론(異論: 남인에 대한 온건한 처벌주장을 말함.)을 일삼아 흉당(凶黨: 남인)을 기쁘게 할 때에도 홀로 옳은 것을 지켰을 뿐 아니라 화를 당하면서도 후회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셋째는 윤증(尹拯)송시열에게 배사(背師)한 죄를 통렬히 배척하여 선비의 갈길을 밝혀 사문(斯文)에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평은 물론 그가 속한 노론계의 주장이며, 반대로 소론측에서는 그가 송시열윤증 사이의 사사로운 일을 임금에게 아뢰어 조정을 시끄럽게 만들었고, 이로 인하여 마침내 사림을 분열시켜 놓았다고 비난하였다.

1694년에 신원, 복관되었다.

1886년(고종 23)에는 현종 묘정에 향배되었고, 진도봉암사(鳳巖祠), 영암녹동서원(鹿洞書院), 영평옥병서원(玉屛書院) 등에 제향되었으며, 양주석실서원(石室書院), 전주호산사(湖山祠)에 추가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문곡집』 28권이 전하고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참고문헌]

孝宗實錄
顯宗實錄
肅宗實錄
文谷集
黨議通略(李建昌)

[이미지]

[집필자]

정만조(鄭萬祚)

호 : "문곡(文谷)"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紀年便攷v25金壽恒光燦子壽興弟金琜外孫羅星斗壻仁祖己巳生字久之號文谷丙戌十八進壯孝宗辛卯魁謁聖選湖堂歷銓郞舍人副學丙申二十八登重試陞通政己亥三十一陞嘉善顯宗壬寅三十四陞
國朝人物志v3備禮遷葬因結廬墓側追服以終三年曰此雖禮經所無不如此無以伸吾情事己巳聞仁顯王后出宮尤菴文谷相繼被禍輅不勝憂憤有詩曰慟哭斯文多少淚不如今日死無知自創丙丁之禍終身不赴擧鄭澔撰墓志以上
國朝人物志v3字久之號文谷安東人文正公尙憲孫受家庭學最主於小學敬身一篇自少終日危坐未嘗箕踞肩背竦直不少跛
國朝人物志v3章極論始壽造言狀許積患之竄堦鏡城丙辰蒙放及庚申許堅事發堦以刑房承旨參鞫文谷金壽恒按獄而隨事必議上亦多咨詢許積家書札搜入而堦奏火之以安反側堅等伏誅積當坐上欲
國朝人物志v3人希逸曾孫肅宗辛酉進士壯元甲戌更化蔭仕歷忠淸監司刑曹判書嘗請益於同春尤菴文谷諸公講大學或問正萬升堂參講亡何有宮闈之變獨守臣節仍輟跡公車論者以爲難景宗壬寅
朝鮮科宦譜n1-6책領相衡文谷尙憲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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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