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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宋時烈)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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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성뢰(聖賚)
자(字)영보(英甫)
호(號)우암(尤菴)
호(號)우재(尤齋)
시호(諡號)문정(文正)
생년1607(선조 40)
졸년1689(숙종 15)
시대조선중기
본관은진(恩津)
활동분야문신 > 문신
송갑조(宋甲祚)
선산곽씨(善山郭氏)
한산이씨(韓山李氏)
처부이덕사(李德泗)
외조부곽자방(郭自防)
출신지충청도 옥천군 구룡촌(九龍村)
저서『주자대전차의』
저서『주자어류소분』
저서『이정서분류(二程書分類)』
저서『논맹문의통고(論孟問義通攷)』
저서『경례의의(經禮疑義)』
저서『심경석의(心經釋義)』
저서『찬정소학언해(纂定小學諺解)』
저서『주문초선(朱文抄選)』
저서『계녀서』
저서『우암집(尤菴集)』
저서『송자대전(宋子大全)』

[상세내용]

송시열(宋時烈)
1607년(선조 40)∼1689년(숙종 15).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은진(恩津). 아명은 성뢰(聖賚).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菴) 또는 우재(尤齋).
1. 가계
부친은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 송갑조(宋甲祚)이며, 모친은 선산곽씨(善山郭氏)봉사 곽자방(郭自防)의 딸이다.

충청도 옥천군 구룡촌(九龍村) 외가에서 태어나 26세(1632)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으나, 후에는 회덕(懷德)송촌(宋村)비래동(飛來洞)소제(蘇堤) 등지로 옮겨가며 살았으므로 세칭 회덕인으로 알려져 있다.

8세 때부터 친척인 송준길(宋浚吉)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게 되어, 훗날 양송(兩宋)으로 불리는 특별한 교분을 맺게 되었다.

12세 때 아버지로부터 『격몽요결(擊蒙要訣)』『기묘록(己卯錄)』 등을 배우면서 주자(朱子)이이(李珥)조광조(趙光祖) 등을 흠모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1625년(인조 3) 도사 이덕사(李德泗)의 딸 한산이씨(韓山李氏)와 혼인하였다. 이 무렵부터 연산(連山)김장생(金長生)에게 나아가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고, 1631년 김장생이 죽은 뒤에는 그의 아들 김집(金集)문하에서 학업을 마쳤다.

27세 때 생원시(生員試)에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를 논술하여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이때부터 그의 학문적 명성이 널리 알려졌고 2년 뒤인 1635년에는 봉림대군(鳳林大君: 후일의 효종)의 사부(師傅)로 임명되었다. 약 1년간의 사부생활은 효종과 깊은 유대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병자호란으로 왕이 치욕을 당하고 소현세자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자, 그는 좌절감 속에서 낙향하여 10여년간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전야에 묻혀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2. 출사
1649년효종이 즉위하여 척화파 및 재야학자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그에게도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사헌부장령 등의 관직을 주어 불렀으므로 그는 비로소 벼슬에 나아갔다.

이때 그가 올린 「기축봉사(己丑封事)」는 그의 정치적 소신을 장문으로 진술한 것인데, 그 중에서 특히 존주대의(尊周大義)와 복수설치(復讎雪恥)를 역설한 것이 효종의 북벌의지와 부합하여 장차 북벌계획의 핵심인물로 발탁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다음해 2월 김자점(金自點) 일파가 청나라조선의 북벌동향을 밀고함으로써, 송시열을 포함한 산당(山黨) 일파는 모두 조정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뒤 1653년(효종 4)에 충주목사, 1654년에 사헌부집의동부승지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1655년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10년 가까이 향리에서 은둔생활을 보내게 되었다.

1657년 상을 마치자 곧 세자시강원찬선(世子侍講院贊善)이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대신 「정유봉사(丁酉封事)」를 올려 시무책을 건의하였다.

1658년 7월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찬선에 임명되어 관직에 나아갔고, 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다음해 5월까지 왕의 절대적 신임 속에 북벌계획의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1659년 5월 효종이 급서한 뒤, 조대비(趙大妃)의 복제문제로 예송(禮訟)이 일어나고, 국구(國舅) 김우명(金佑明) 일가와의 알력이 깊어진 데다, 국왕 현종에 대한 실망 때문에 그해 12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이후 현종 15년간 조정에서 융숭한 예우와 부단한 초빙이 있었으나 그는 거의 관직을 단념하였다. 다만 1668년(현종 9) 우의정에, 1673년 좌의정에 임명되었을 때 잠시 조정에 나아갔을 뿐 시종 재야에 머물러 있었다.
3. 유배생활
그러나 그가 재야에 은거하여 있는 동안에도 선왕의 위광과 사림의 중망 때문에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사림의 여론은 그에 의해 좌우되었고 조정의 대신들은 매사를 그에게 물어 결정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1674년 효종비의 상으로 인한 제2차 예송에서 그의 예론을 추종한 서인들이 패배하자 그도 예를 그르친 죄로 파직, 삭출되었고, 1675년(숙종 1) 정월 덕원(德源)으로 유배되었다가 후에 장기(長鬐)거제 등지로 이배되었다. 유배기간 중에도 남인들의 가중처벌 주장이 일어나, 한때 생명에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4. 경신환국 기사환국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자, 그는 유배에서 풀려나 중앙 정계에 복귀하였다. 그해 10월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영경연사(領經筵事)로 임명되었고 또 봉조하(奉朝賀)의 영예를 받았다.

1682년 김석주(金錫胄)김익훈(金益勳) 등 훈척들이 역모를 조작하여 남인들을 일망타진하고자 한 임신삼고변 사건에서 그는 김장생의 손자였던 김익훈을 두둔하였으므로 서인의 젊은 층으로부터 비난을 받았고, 또 제자 윤증(尹拯)과의 불화로 말미암아 1683년 노소분당이 일어나게 되었다.

1689년 1월 숙의 장씨(張氏)가 아들(후일의 경종)을 낳자 원자(元子: 세자 예정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하였는데, 이때 그도 세자책봉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그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5. 갑술환국
그러나 1694년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자 그의 억울한 죽음이 무죄로 인정되어 관작이 회복되고 제사가 내려졌다. 이해에 수원정읍충주 등지에 그를 제향하는 서원이 세워졌고, 다음해에는 시장(諡狀)없이 문정(文正)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때부터 덕원화양동을 비롯한 수많은 지역에 서원이 설립되어 전국적으로 약 70여개소에 이르게 되었고 그 중 사액서원만 37개소였다.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당파간에 칭송과 비방이 무성하였으나, 1716년의 병신처분(丙申處分)과 1744년(영조 20)의 문묘배향으로 그의 학문적 권위와 정치적 정당성이 공인되었고, 영조정조대에 노론의 일당전제가 이루어지면서 그의 역사적 지위는 더욱 견고하게 확립되고 존중되었다.
6. 학문연원
송시열의 학문은 전적으로 주자의 학설을 계승한 것으로 자부하였으나, 조광조이이김장생으로 이어진 조선 기호학파의 학통을 충실히 계승, 발전시킨 것이기도 하였다. 그는 언필칭 주자의 교의를 신봉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평생의 사업을 삼았다.

그러므로 학문에서 가장 힘을 기울였던 것은 『주자대전(朱子大全)』『주자어류(朱子語類)』의 연구로서, 일생을 여기에 몰두하여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 등의 저술을 남겼다.

따라서, 그의 철학사상도 주자가 구축한 체계와 영역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었으나, 다만 사변적 이론보다는 실천적 수양과 사회적 변용에 더 역점을 둔 것이었다.

여기에는 조광조의 지치주의(至治主義)의 이념, 이이의 변통론(變通論), 김장생의 예학(禮學) 등 기호학파의 학문전통이 큰 작용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러한 정통 성리학의 입장에서 조선 중기의 지배적인 철학‧정치‧사회사상을 정립하였고, 이것은 조선 후기의 정치‧사회를 규제한 가장 영향력 있는 학문체계가 되었다.
7. 정치사상
한편, 그의 정치사상은 조선 중기의 사림정치 이념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정치의 원리를 『대학』에서 구하였는데, 그것은 수기치인(修己治人)으로 표현된다.

즉, 남을 다스리는 일은 자신의 수양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 때문에 그는 통치자의 도덕성 확립을 강조하였다.

특히, 임금은 만화(萬化)의 근본이므로 군덕의 함양이 정치의 제일 과제라고 믿어, 맹자의 “한번 임금을 바르게 하면 나라가 바르게 된다(一正君而國正).”는 주장을 자신의 정치활동에 지표로 삼았다.

따라서,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왕에게 수신‧제가‧면학을 강조하고 사심과 사은(私恩)을 억제할 것을 권하였다. 실제의 정책면에 있어서는 민생의 안정과 국력회복에 역점을 두었고, 그것을 위한 여러가지 대책을 건의하였다.

즉, 국가의 용도를 절약하여 재정을 충실하게 하고, 궁중의 연악과 토목공사를 억제하며, 공안(貢案)을 바로잡고, 군포를 감하여 양민(良民)의 부담을 줄이며, 사노비의 확대를 억제하여 양민을 확보하며, 안흥에 조창(漕倉)을 설치하자는 것 등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서정쇄신책은 이이의 변통론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민생안정과 국력양성 문제는 그 자체가 당면한 급선무였기도 하지만, 그는 이것이 북벌(北伐)실현을 위한 선결 과제로 인식하였다.

그의 정치사상에서 또하나 간과될 수 없는 것은 예치(禮治)의 이념이었다. 이는 공자의 통치철학이기도 하였지만 특히 김장생의 예학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예가 다스려지면 정치도 다스려지고, 예가 문란하게 되면 정치도 문란하게 된다.”고 강조하였다. 예는 유교정치에 있어서 교화의 수단일 뿐만 아니라 정치의 명분을 밝히는 것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그는 복제예송(服制禮訟)에 깊이 개입하였고, 만년에는 종묘제도의 이정과 문묘배향 문제, 정릉의 복위와 효종의 세실 문제, 만동묘의 설치 등 국가적 전례문제에 정력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8. 북벌사상
한편, 그는 효종대 북벌론의 중심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이 문제로 효종과 비밀대담〔獨對〕을 가지기도 하였고, 왕과 비밀서찰을 교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북벌계획은 그렇게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효종과의 비밀대담이나 서신왕래에서 그가 건의한 것은 극히 이념적이고 원론적인 것이었으며, 실제적 대책은 아니었다.

북벌론은 1659년 봄에 본격적으로 논의되었으나, 그는 당시 형편으로는 즉각적인 북벌의 실현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고 민생의 안정과 국력회복이 더 시급한 과제라고 역설하였다.

따라서 양민의 부담이 컸던 급료병(給料兵: 직업군인)을 줄이고 민병(民兵: 농민군)을 활용하자고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효종의 양병정책과 반대되는 것이었다. 그는 북벌의 실제 준비보다 그것이 내포한 이념성을 강조하였다.

명나라를 향한 존주대의와 병자호란의 복수설치문제는 한시도 잊을 수 없는 국가적 과제이며, 그것이 모든 정책의 기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물론 춘추대의의 관념에서 나온 유교적 명분론의 표현이기도 하였지만, 이러한 강력한 이념이 국내정치에 있어서 부패와 부정을 억제하고 기강의 확립과 행정의 효율을 위한 방편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북벌이념은 송시열 자신과 그 일파의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한 대의명분이 되기도 하였다.

그의 북벌론은 효종의 죽음과 함께 침묵되었다가 숙종 초기에 다시 제창되었는데, 효종대에 있어서 그의 북벌론은 그 이념성과 함께 부국안민의 정책을 내포하고 있었으나, 숙종대에 국가의 전례문제와 결부되어 다시 제창된 존주론(尊周論)에는 오직 당쟁에서 대의명분을 장악하기 위한 이념성만이 강조되었다.
9. 예론
그는 또한 김장생을 계승한 예학의 대가로서 중요한 국가전례문제에 깊이 관여하였는데, 이 때문에 예학적 견해차이로 인한 예송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1659년 5월 효종이 죽자, 계모인 자의대비(慈懿大妃: 趙大妃)의 상복을 3년(만 2)으로 할 것인가, 기년(朞年: 만 1)으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것은 인조의 차자로서 왕위를 계승한 효종을 적장자로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차자로 간주할 것인가 하는 중요한 문제와 결부되어 있었다.

이때 윤휴(尹鑴)『의례(儀禮)』 상복편의 소설(疏說)인 “제일자(第一子)가 죽으면 적처소생의 차장자를 세워 장자로 삼는다.”는 근거에 의하여 대비가 3년복을 입어야 할 뿐 아니라, 국왕의 상에는 모든 친속이 참최(斬衰)를 입는다는 설에 의하여 참최를 입을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송시열『의례』의 소설에 “서자(庶子)가 대통을 계승하면 3년복을 입지 않는다.”는 예외규정〔四種說〕을 들어 이에 반대하였다. 서자는 첩자(妾子)의 칭호이기는 하지만, 적장자 이외의 여러 아들을 지칭하는 용어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또, 국왕의 상에 친속들이 3년복을 입는 것은 신하로서의 복을 입는 것인데, 어머니인 대비는 아들인 왕의 신하가 될 수 없다고 하여 윤휴의 참최설을 배척하였다.

그러나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정태화(鄭太和) 등 대신들은 『의례』에 근거한 두 설을 다 취하지 않고, 『대명률』『경국대전』에 장자‧차자 구분없이 기년을 입게 한 규정, 즉 국제기년설(國制朞年說)에 따라 1년복으로 결정하였다.

1660년 3월 허목(許穆)이 또 차장자설을 주장하여 3년복으로 개정할 것을 상소하고, 윤선도(尹善道)는 기년설이 “효종의 정통성을 위태롭게 하고 적통과 종통을 두 갈래로 만드는 설”이라고 공격하였다.

그러나 송시열송준길은 ‘참최는 두번 입지 않는다(不貳斬)’는 설과 서자가 첩자를 뜻하지 않는다는 설을 논증하고, 제2‧3‧4자 등이 계속 죽을 경우에 생기는 차장자설의 모순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제1자가 죽고 차장자를 세워 장자로 간주하는 경우는 제1자가 미성년에 죽었을 때뿐이라고 단정하였다.

이 문제로 조정에서는 여러 차례 논의가 있었으나 기년설은 번복되지 않았고, 윤선도 등 남인들은 유배되거나 조정에서 축출되었다.

그러나 1674년 효종비의 상으로 다시 자의대비의 복제문제가 제기되어 서인들은 송시열의 설에 의하여 대공복(大功服: 9개월복)을 주장하여 시행되었으나 영남유생 도신징(都愼徵)의 상소로 인하여 기년복으로 번복되고 말았다.

그 결과 송시열은 ‘예를 그르친 죄’를 입고 파직삭출되었다가 변방으로 유배되고 말았다. 송시열의 예론은 『의례』에 근거를 두고 전개되기는 하였으나, 대체로 “제왕가의 예도 사서인(士庶人)과 다르지 않다.”는 성리학적 보편주의 예학의 정신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 때문에 왕위에 즉위하여 종묘를 주관하였던 효종의 제왕적 특수성에 관계없이 차자라는 출생의 차서만이 중시되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그의 본의와는 달리 왕실을 낮추고 종통과 적통을 두 갈래로 만들었다는 비난을 받아 정치적 위기를 겪게 되었던 것이다.
10. 사회사상
그의 사회사상을 살펴보면, 송시열은 매우 보수적인 정통 성리학자라고 할 수 있으나, 당시의 고질적인 사회문제에 대해서는 상당한 관심을 가졌고, 또 여러가지 대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사회신분문제에 있어서, 그도 양반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특권은 제한되어야 할 것으로 보았다. 우선 양민에게만 지워졌던 군역의 부담을 줄이고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제(戶布制)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또,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의 실시를 통해 양반의 노비증식을 억제하고 되도록 양민이 노비화되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그는 또 서북지방(평안도‧함경도) 인재의 등용과 서얼(庶蘖)의 허통을 주장하고 양반부녀자들의 개가를 허용할 것을 말하기도 하였다.

그가 가장 역점을 두었던 사회정책은 양민의 생활안정이었는데 이를 위하여 공안(貢案)을 개정하고 대동법(大同法)을 확대, 시행하며, 양민들의 군비부담을 줄이는 호포제의 실시를 주장하였고, 그 자신이 빈민의 구제를 위한 사창(社倉)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그도 노비제를 인정하기는 하였으나, 노비도 같은 인간임을 인식시켜 부당한 사역이나 가혹한 행위를 억제하도록 역설하였다. 충절이나 선행이 드러난 경우에는 서얼‧농민‧천민에 이르기까지 전기나 묘문‧제문을 지어 표창하였다.

여성문제에 있어서는 효행‧정절‧순종 등 전통적 미덕을 강조하였으나 동시에 가계의 관리와 재산 증식 등 주부권과 관련된 경제적 구실도 중시하였다.

사회풍속면에서는 중국적‧유교적인 것을 숭상하여 토속적‧비유교적인 것들을 개혁하고자 하였다. 혼례 등의 예속과 복식,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세속과 다른 중국습속들을 행하여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치를 배격하고 근면,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여 교화의 모범이 되기도 하였다.

그는 문장과 서체에서도 뛰어났는데, 문장은 한유(韓愈)구양수(歐陽修)의 문체에 정자(程子)주자의 의리를 기조로 하였기 때문에 웅장하면서도 유려하고 논리적이면서도 완곡한 면이 있었고, 특히 강건하고 힘이 넘치는 문장으로 평판이 높았다.

시‧부(賦)‧책(策)‧서(序)‧발(跋)‧소차(疏箚)‧묘문 등 모든 글에 능하였으나 특히 비(碑)‧갈(碣)‧지문(誌文) 등 묘문에 명성이 있어 청탁을 받아 지은 것이 수백편에 이르렀고, 그 중에서도 영릉지문(寧陵誌文: 효종릉의 지문)은 명문으로 손꼽힌다.

서체는 처음 안진경체(顔眞卿體)를 익히다가 뒤에 주자를 모방하게 되어 정체(正體)를 잃었으나 매우 개성적인 경지에 이르러 창고(蒼古)하고 힘에 넘치는 것으로 평판이 있었다. 그 글씨를 받아 간 사람들이 무수히 많았고 현재도 많이 전하고 있다.
11. 교우‧사승
그는 학문과 정계에서 가졌던 위치와 그 명망 때문에 교우관계가 넓었고 추종한 제자들도 매우 많았다.

교우의 중심은 역시 김장생김집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송준길이유태(李惟泰)유계(兪棨)김경여(金景餘)윤선거(尹宣擧)윤문거(尹文擧)김익희(金益熙) 등으로 이들과 함께 세칭 산당(山黨)으로 불렸고, 한때는 남인 권시(權諰)윤휴와도 절친한 적이 있었다.

벼슬에 나아간 뒤에는 김상헌(金尙憲)의 손자들인 김수증(金壽增)김수흥(金壽興)김수항(金壽恒)형제들, 민정중(閔鼎重)민유중(閔維重)형제, 이후원(李厚源)이시백(李時伯) 등 서인 권문세가 인사들과 정치를 같이하였고, 소론계인 남구만(南九萬)박세채(朴世采)이경석(李景奭)과도 친하였으나 후에 당이 갈려 멀어졌다.

그는 독선적이고 강직한 성품 때문에 교우관계에서 끝까지 화합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는데, 특히 이경석윤휴윤선거윤증 부자와의 알력은 정치적인 문제를 야기하여 당쟁의 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만년에는 사돈인 권시와도 틈이 생기고, 이유태와 분쟁을 일으키는가 하면 평생의 동반자였던 송준길마저도 뜻을 달리하게 되었다.

제자로는 윤증이 가장 촉망되었으나 그 아버지의 묘문문제로 마침내 노소분당을 야기하였고, 그의 학통을 이어받은 권상하(權尙夏) 외에 김창협(金昌協)이단하(李端夏)이희조(李喜朝)정호(鄭澔)이선(李選)최신(崔愼)송상민(宋尙敏) 등이 고제(高弟)로 일컬어진다.

그밖에 그의 문하에서 수시로 공부한 문인들은 수백명에 이르렀다. 권상하의 문하에서 송시열의 학통을 계승한 학자로는 한원진(韓元震)윤봉구(尹鳳九)이간(李柬) 등 이른바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들이 대표적이며, 이들의 문인들이 조선 후기 기호학파 성리학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이들을 통하여 송시열의 존주대의 이념이 계승되어 조선 말기의 척사위정론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송시열에 의하여 재정비된 정통성리학의 체계와 광범한 문인들의 활약 및 그 정치적인 비중 때문에 그의 학문과 사상은 조선 후기의 가장 강력한 지배이념으로서 작용할 수 있었다.
12. 저술
그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는데, 그 자신이 찬술하거나 편집하여 간행한 저서들과 사후에 수집되어 간행된 문집으로 대별된다.

저서로는 『주자대전차의』『주자어류소분』『이정서분류(二程書分類)』『논맹문의통고(論孟問義通攷)』『경례의의(經禮疑義)』『심경석의(心經釋義)』『찬정소학언해(纂定小學諺解)』『주문초선(朱文抄選)』『계녀서』 등이 있다.

문집은 1717년(숙종 43) 왕명에 의하여 교서관에서 처음으로 편집, 167권을 철활자로 간행하여 『우암집(尤菴集)』이라 하였고, 1787년(정조 11) 다시 빠진 글들을 수집, 보완하여 평양감영에서 목판으로 215권 102책을 출간하고 『송자대전(宋子大全)』이라 명명하였다.

그뒤 9대손 송병선(宋秉璿)송병기(宋秉虁) 등에 의하여 『송서습유(宋書拾遺)』 9권, 『속습유(續拾遺)』 1권이 간행되었다. 이들은 1971년 사문학회(斯文學會)에서 합본으로 영인, 『송자대전』 7책으로 간행하였고, 1981년부터 한글 발췌 번역본이 민족문화추진회에서 14책으로 출간되고 있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孝宗實錄
顯宗實錄
肅宗實錄
英祖實錄
正祖實錄
燃藜室記述
黨議通略
宋子大全
明齋遺稿
白湖全書
寒水齋文集
東儒學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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尤庵 哲學思想硏究(蔡茂松, 斯文學報 1, 1973)
李朝儒敎政治와 山林의 存在(李佑成, 東洋學學術會議論文集, 成均館大學校, 1975)
北伐論의 思想史的 檢討(李離和, 創作과 批評 38,1975, 겨울)
禮論의 諸學派와 그 論爭(柳正東, 韓國哲學硏究 中, 1978)
尤庵學의 民衆史的 再定立(崔昌圭, 百濟硏究 10, 1979)
北伐과 春秋大義(趙鐘業, 百濟硏究 10, 1979)
尤庵宋時烈의 哲學思想(柳南相, 忠南大論文集 V1―1, 1979)
宋尤菴의 哲學思想硏究(郭信煥, 國際大論文集 7, 1979)
尤菴 宋時烈과 懷德鄕案(成周鐸, 韓國史論 8, 서울大學校, 1980)
尤庵 直思想의 人間學的 硏究(郭信煥, 思索 7, 1981)
宋尤庵의 理氣心性觀(郭信煥, 道源柳承國博士華甲紀念論文集, 1983)
尤庵 宋時烈의 尊周思想(李迎春, 淸溪史學 2, 1985)
朝鮮後期 禮訟硏究(池斗煥, 釜大史學 11, 1987)
宋尤庵學述(錢穆, 退溪學報,11, 1976)
十七世紀 朝鮮에 있어서의 正統과 異端―宋時烈과 尹鑴(三浦國雄, 民族文化 8, 1982)

[집필자]

이영춘(李迎春)

명 : "시열(時烈)"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紀年便攷v26疏說旣有立次長亦為三年之明文則大王大妃之服齊哀三年實無亳髪可疑何必更責必得次長不為庶子之明文於許穆也時烈之議称長子成人而死者至再至三而其緊要㫁定之語曰長子雖成人而次長皆名長子服斬則嫡統不嚴云盖其言必欲歸重
紀年便攷v26尹善道竄配命下之後權諰上䟽曰大王大妃今日當為三年之制必然無疑今雖義起可質百世惜乎時烈浚吉棨之賢而未察當為三年之義故今日此議發於朝廷之上而諸人猶且執迷而不曰時烈所謂先王不害為庶子之言則謬
紀年便攷v26何可保也文王雖立武王而伯邑考有後則文王之嫡統猶在於伯邑考之後乎然則天下之羣志未定而武王之子孫何可保也時烈以宗統歸於主廟社之君而以嫡統歸於已死之長子乎然則嫡統宗統歧而貳之也又豈有此理也嗚呼自先朝所倚重而委任
紀年便攷v26上以穆所進問議於宋時烈時烈又㩀禮辨明上遂従朞服之議
紀年便攷v26然無疑今雖義起可質百世惜乎時烈浚吉棨之賢而未察當為三年之義故今日此議發於朝廷之上而諸人猶且執迷而不曰時烈所謂先王不害為庶子之言則謬之甚矣一世舉知其非而不言此所以来善道之讒也善道之詆讒媚嫉之收極為可惡而不計
紀年便攷v26䟽曰尹善道曾以宋時烈議禮之失投䟽攻斥朝論大發因此圍置極邉然其宗統嫡統之說實為明白的確不可易之論也時烈雖以山林宿徳望重一世然其議禮之錯固不可掩也今之護時烈者專為覆盖其失至欲使人不敢議斥善道者至謂搆禍士林
紀年便攷v26圍置極邉然其宗統嫡統之說實為明白的確不可易之論也時烈雖以山林宿徳望重一世然其議禮之錯固不可掩也今之護時烈者專為覆盖其失至欲使人不敢議斥善道者至謂搆禍士林直以凶賊目之善道之言過當則固有之亦豈有搆禍士林之意哉
紀年便攷v26称道實有愧人心者然其立朝清白庚寅一事為足可称故金尙憲諸賢皆與之友善而時烈䟽末有曰孫従臣云云景奭大怒以時烈䟽示宋浚吉浚吉亦不勝駭歎
紀年便攷v26遭不幸近是矣時時烈適有嫌不敢冒進行在只出次全義聞景奭之劄乃有此䟽初時烈名重一世景奭自仁祖朝屡薦請召致時烈亦入都以布衣草履造門景奭必待以下士之禮及孝廟新服又首請招俫擬共國事時烈名位既崇而敬重尊尙之意每見於辭
紀年便攷v26事極意醜詆盖景奭昔作三田碑文其所称道實有愧人心者然其立朝清白庚寅一事為足可称故金尙憲諸賢皆與之友善而時烈䟽末有曰孫従臣云云景奭大怒以時烈䟽示宋浚吉浚吉亦不勝駭歎
紀年便攷v26上問曰頃者李尙真為慶尙監司啓請漏籍之人雖或被殺不以殺人之罪罪之此言何如時烈對曰此乃大明太祖之法必有此法然後可無漏籍之患也
紀年便攷v26人所非則其為象人之鄙笑何如哉今臣所遭不幸近是矣時時烈適有嫌不敢冒進行在只出次全義聞景奭之劄乃有此䟽初時烈名重一世景奭自仁祖朝屡薦請召致時烈亦入都以布衣草履造門景奭必待以下士之禮及孝廟新服又首請招俫擬共國事
紀年便攷v26綱見称則或反有哀之者而時有庸陋之甚者行身無忕乃反為其人所非則其為象人之鄙笑何如哉今臣所遭不幸近是矣時時烈適有嫌不敢冒進行在只出次全義聞景奭之劄乃有此䟽初時烈名重一世景奭自仁祖朝屡薦請召致時烈亦入都以布衣草
紀年便攷v26名重一世景奭自仁祖朝屡薦請召致時烈亦入都以布衣草履造門景奭必待以下士之禮及孝廟新服又首請招俫擬共國事時烈名位既崇而敬重尊尙之意每見於辭氣書牘之間至是以景奭劄中納履等語誤認指已而發乃上一䟽至引孫覿事極意醜詆
紀年便攷v26詰遂以凶言誣告宋時烈宋浚吉徐必遠等設鞫嚴問語皆虚妄或謂世直失性之人必有隂嗾者世直果自服誣告而㐲誅世直時烈踈戚庶屬
紀年便攷v26空魑魅莫逃罪之首従於是乎判矣附邪論之金夀興猶被編配倡邪論之宋時烈豈漏憲章乎一正㓛服之失而壊禮亂統之罪時烈自不能辭矣時烈孝廟之罪人也先王之罪人也豈可使兩朝罪臣濫握彤管以溷先王之盛徳也時烈差製顯宗誌文之役至是
紀年便攷v26先王之盛徳也時烈差製顯宗誌文之役至是命金錫冑代撰領議政許積奏曰服制既釐正無容更議而世楗假此為說作為攻時烈之資盖其意不在論禮而可見心術之不正矣請施以儒罰使知上意不動於彼言則自然妥貼矣都承旨金錫冑之言亦如領相
紀年便攷v26䟽曰頃者執貳之論祖述己亥庶子朞服則庶子之說實倡時烈是以先王以為㤀先王附托他論又曰阿附前後之論白日當空魑魅莫逃罪之首従於是乎判矣附邪論之金夀興猶被編配倡
紀年便攷v26時烈差製顯宗誌文之役至是命金錫冑代撰
紀年便攷v26上以世楗為忠言主論遝収時烈誌文製追之命時䥴黨得志授䥴掌令授洪汝河司諌兩司南天漢李沃李宇弼睦昌明等合啓時烈壊禮之罪請罷職依允又請削黜依允判中樞府事鄭知和上劄曰十六年之後有此追罪之舉此何舉措也云云
紀年便攷v26郭世楗䟽出後上以世楗為忠言主論遝収時烈誌文製追之命時䥴黨得志授䥴掌令授洪汝河司諌兩司南天漢李沃李宇弼睦昌明等合啓時烈壊禮之罪請罷職依允又請
紀年便攷v26首従於是乎判矣附邪論之金夀興猶被編配倡邪論之宋時烈豈漏憲章乎一正㓛服之失而壊禮亂統之罪時烈自不能辭矣時烈孝廟之罪人也先王之罪人也豈可使兩朝罪臣濫握彤管以溷先王之盛徳也時烈差製顯宗誌文之役至是命金錫冑代撰領
紀年便攷v26而言也且我朝以来亦無已行之例難容别議矣上下教曰立第二長者亦名長子者昭在禮經註孝廟已承正統則當服斬哀而時烈隂懐貶降之心㫁為朞制及至先朝末命赫然覺悟釐正宗統予雖未究禮經大王大妃之於先王雖有祖孫之分既登至尊之位
紀年便攷v26其樂善愛士素所蓄積斯實錄也謂宋時烈曰聖主有有為志此千載一時然必湏先固邦本事出萬全不可徑桃大禍以取覆亡時烈笑曰以義覆亡何恨維城曰然則朱子何無直渡江撃虜之請耶相與大笑甲辰卒年六十九謚忠貞孫齊斗見下孫齊賢蔭郡守
紀年便攷v26終不赴孝宗嘉之終始眷注判六曺顯宗丁未入相至左素不喜宋時烈其兄每掩之肅宗乙卯時烈配徳源也致和以左相論救時烈丁巳卒年六十九謚翼獻系子載崙見下
紀年便攷v26軆貌自别雖在異域不可従酒所終不赴孝宗嘉之終始眷注判六曺顯宗丁未入相至左素不喜宋時烈其兄每掩之肅宗乙卯時烈配徳源也致和以左相論救時烈丁巳卒年六十九謚翼獻系子載崙見下
紀年便攷v26駕南漢是年魁别試歴銓郞舍人顯宗甲寅入相至左入耆社上昇遐後追罪宋時烈壊禮知和以判府事劄救承嚴批臺諌請以時烈之罪上告太廟知和奏以不可肅宗戊辰卒年七十六系子載禧見下
紀年便攷v26用隧道之制獻納閔維重請其罪維重旋出外臺閣畏勢厭避宋時烈掌銓黜斥其畏避者金家之㤪怒專移時烈癸丑佑明大斥時烈寕陵表石請建事肅宗乙卯䟽陳紅袖事杜門屏客有孝友篤行病酒以卒年五十七贈領相謚忠翼子錫翼錫衍見下曽孫聖應
紀年便攷v26衛大将葬其父堉僣用隧道之制獻納閔維重請其罪維重旋出外臺閣畏勢厭避宋時烈掌銓黜斥其畏避者金家之㤪怒專移時烈癸丑佑明大斥時烈寕陵表石請建事肅宗乙卯䟽陳紅袖事杜門屏客有孝友篤行病酒以卒年五十七贈領相謚忠翼子錫翼
紀年便攷v26人十一歲遭胡亂奉屡世神主而避禍仁祖甲申後廢舉業洪命夏薦以學行拜參奉不就孝宗朝宋時烈䝺大計時陳討復十䇿時烈掌銓薦授江原都事䟽請通問永暦皇帝顯宗壬子上萬言封事論王伯公私之分古今道統之傳肅宗辛酉以金錫冑薦除公牧
紀年便攷v27天貶穪猝加其曰不害為庶子又曰嫡統不嚴安有候至尊主宗廟十年之君而不以嫡統許之者乎宋浚吉李惟泰之獻議依㨾時烈之繭蘆䧺唱雌和協勢助威昨春仁宣王后之喪大王大妃服制又降為衆子婦大㓛之服盖時烈初以軆而不正断之故禮官不
紀年便攷v27李袤吳挺昌趙嗣基兪夏益李沉諌院睦昌明権煥合啓請荐棘従之又命宋浚吉追削官爵李惟泰奪爵門黜幼學李涔上䟽請時烈之罪告廟不許
紀年便攷v27中矣宋浚吉平生性本柔和又無瑕疵身後似不可追奪其職矣兵曺判書李尙真大司成南九萬上䟽論救領議政許積上劄曰時烈孝廟之臣也報主彜性犬馬攸同渠雖旡状寧有薄於厚而反生貶薄之理乎臣愚以為今之罪案若不刪去貶降一欵旡以服時
紀年便攷v27烈孝廟之臣也報主彜性犬馬攸同渠雖旡状寧有薄於厚而反生貶薄之理乎臣愚以為今之罪案若不刪去貶降一欵旡以服時烈之心矣持平吳挺昌司諌金賓獻納李宇鼎正言眭昌明䓁請對力陳遠竄之典公議益激乃命德源府遠竄大司憲尹鐫啓請移
紀年便攷v27乎宋浚吉李惟泰之獻議依㨾時烈之繭蘆䧺唱雌和協勢助威昨春仁宣王后之喪大王大妃服制又降為衆子婦大㓛之服盖時烈初以軆而不正断之故禮官不敢矛盾其議耳父子相継之謂軆嫡妻所生之謂正不正二字何以加於孝廟㢤顯宗一怒斯赫嫡
紀年便攷v27舉子䓁言顯意大有觸諱不可著述不得已政題以試之右議政許穆上剳言披陰附時烈亂統之說用意旡狀上命罷榜試官李正英李弘淵尹深䓁并㝎配秦輔以最末試官乃以廢少立長之文出題試士特命遠竄
紀年便攷v27言辭剴切深陳諸臣誤事之咎論斥尹鐫悖理之言憂國愛君赤心皦然而不賜叙究孤忠來未暴罪網橫加一落尖陬屡經寒暑時烈之安寘今巳四年瘴海荐棘疾病沉嬰深恐一朝溘然使聖明有殺賢士之名惟殿下興哀於垂死之喘俾得歸死於故里焉
紀年便攷v27今之論者以貶薄君父為宋時烈之罪案離間骨肉為金壽恒之罪案夫君臣大義天地之綱常也臣而貶君果近於人情乎况如時烈林下之一寒士蒙孝廟不世之遇義則君臣恩猶父子其所報效之誠必萬倍恒人而加之以此䓁罪目不為天下至寃乎金壽恒
紀年便攷v27尙敏備述禮論始末作一冊子且陳尹鐫䓁誣悖之狀上䟽以進下備忘記曰典禮已正之後時烈之血黨攘臂念恚造意興謗靡所不至今者公麽尙敏投進䟽冊上以語及先王下以誣䧟朝廷其負國死黨之罪不可不正卽命
紀年便攷v27知凶謀根抵之己深故羣議皆以為劇賊旣己正刑則不可不告廟頒赦玄下詢諸臣而䖏之権大運曰告廟祝辭及頒教文以因時烈軰所倡宗統嫡統之說釀成此變之意措辭製進宜矣上従之
紀年便攷v27趙持謙留累日審言益勳誘致叛逆之設心時烈亦以為旡狀雖死不惜有共斥之意少輩遂大喜以爲長者所見亦與吾輩同及時烈入京金錫冑閔鼎重金壽恒俱仲益勳金萬基一家俱来訴時烈乃曰如此則益勳非其罪且曰沙溪孫宜寘宥典少輩乃大憤曰
紀年便攷v27死不惜有共斥之意少輩遂大喜以爲長者所見亦與吾輩同及時烈入京金錫冑閔鼎重金壽恒俱仲益勳金萬基一家俱来訴時烈乃曰如此則益勳非其罪且曰沙溪孫宜寘宥典少輩乃大憤曰長老亦有偏私變其初見乎持謙泰東一隊自此角立老少之論
紀年便攷v27此則益勳非其罪且曰沙溪孫宜寘宥典少輩乃大憤曰長老亦有偏私變其初見乎持謙泰東一隊自此角立老少之論始此主時烈之論為老主持謙泰東之論者為少
紀年便攷v27致反誅不是益勳曰誘致叛逆者其設心甚於叛逆云云時宋時烈在驪江偕来承旨趙持謙留累日審言益勳誘致叛逆之設心時烈亦以為旡狀雖死不惜有共斥之意少輩遂大喜以爲長者所見亦與吾輩同及時烈入京金錫冑閔鼎重金壽恒俱仲益勳金萬
紀年便攷v27終䧟坑塹必如佔之於寒暄矣始生角立之計而不得其援及得朴世米然後始有背叛之跡矣曽於甲寅年間拯請其父墓誌於時烈時烈只引重世采所述行狀而不自為總論銘之結辭曰允矣和叔世采字極其揄掦我述不作楬此銘章拯與世采屡請改而終
紀年便攷v27樂聞遂卽入亰日不離時烈恭執子弟之禮世采曰尹子仁可招而来時烈曰子仁肯来否世采曰先生與小子在此渠安得不來時烈曰第招之也世采卽白上招拯拯来至果川羅良佐家辭職不来世采曰吾當徃見與之偕入遂徃見拯拯與同寢謂曰進錄勳削
紀年便攷v27時烈自驪江赴名至京江邀朴世采諭以同入之意世采樂聞遂卽入亰日不離時烈恭執子弟之禮世采曰尹子仁可招而来時烈曰子仁肯来否世采曰先生與小子在此渠安得不來時烈曰第招之也世采卽白上招拯拯来至果川羅良佐家辭職不来世采
紀年便攷v27諰子三達李懰之子俱是南人中所傑也之言以為隨時烈則大禍将至世采大惑旡氣而入来時烈己知為拯之所中世采不稟時烈直入榻前力排徽號之議還走坡山時烈見事機瓦觧自高陽入金剛仍歸華陽拯先是聞庚中之獄金錫冑之事於愭三達以金
紀年便攷v27者不除則吾無可入之路也因留世采三日盡道其所聞於愭三達愭権之諰子三達李懰之子俱是南人中所傑也之言以為隨時烈則大禍将至世采大惑旡氣而入来時烈己知為拯之所中世采不稟時烈直入榻前力排徽號之議還走坡山時烈見事機瓦觧
紀年便攷v27之言以為隨時烈則大禍将至世采大惑旡氣而入来時烈己知為拯之所中世采不稟時烈直入榻前力排徽號之議還走坡山時烈見事機瓦觧自高陽入金剛仍歸華陽拯先是聞庚中之獄金錫冑之事於愭三達以金錫冑為後日禍魁且自意宋時烈自臣濟
紀年便攷v27時烈自驪江赴名至京江邀朴世采諭以同入之意世采樂聞遂卽入亰日不離時烈恭執子弟之禮世采曰尹子仁可招而来時烈曰子仁肯来否世采曰先生與小子在此渠安得不來時烈曰第招之也世采卽白
紀年便攷v27諫時宋時烈起自竄謫為上下所傾望而言議多不厭衆心後進之士稍稍自異或謂後輩欲立私黨以排大老泰維原䟽己傳於時烈之門人弟子見之者甚恨怒矣執義李厷欲彈泰維与掌令尹彬爭時趙持謙韓泰東申琓吳道一等并直泰維時烈上䟽自訟
紀年便攷v27時烈自驪江赴名至京江邀朴世采諭以同入之意世采樂聞遂卽入亰日不離時烈恭執子弟之禮世采曰尹子仁可招而来時烈曰
紀年便攷v27者扶之此風除而後可以做事兄能之否世采曰不能益追錄指金益勳李師命輩也外戚指金錫冑閔鼎重金萬基輩也時態指時烈也拯曰此三者不除則吾無可入之路也因留世采三日盡道其所聞於愭三達愭権之諰子三達李懰之子俱是南人中所傑也
紀年便攷v27原䟽己傳於時烈之門人弟子見之者甚恨怒矣執義李厷欲彈泰維与掌令尹彬爭時趙持謙韓泰東申琓吳道一等并直泰維時烈上䟽自訟
紀年便攷v27奉朝賀宋時烈上剳請追上祖大王尊號上命大臣諸宰會議賓廰諸臣多以為崇奉尊極之道不在徽號之字数多寡時烈又進剳曰我太祖之開國垂統至今三百年鞏固維持者實基於威化回軍大義昭如日月也今於尊號諡號皆旡此意臣意欲以
紀年便攷v27拯先是聞庚中之獄金錫冑之事於愭三達以金錫冑為後日禍魁且自意宋時烈自臣濟来若聞錫冑之事則必與錫冑有異及時烈上来乃曰錫冑不無衛社之功拯乃大驚曰此爺所見何為如此若従此爺則終䧟坑塹必如佔之於寒暄矣始生角立之計而不
紀年便攷v27坑塹必如佔之於寒暄矣始生角立之計而不得其援及得朴世米然後始有背叛之跡矣曽於甲寅年間拯請其父墓誌於時烈時烈只引重世采所述行狀而不自為總論銘之結辭曰允矣和叔世采字極其揄掦我述不作楬此銘章拯與世采屡請改而終引拯
紀年便攷v27大臣備堂引見兵曺判書閔黯奏曰時烈窮凶極惡彰著旡餘不待鞫問可知其罪且祖宗朝未嘗有鞫問大臣之事上問諸領議政権大運對曰當初設鞫臣所未曉時烈
紀年便攷v27時烈䟽曰昔宋哲宗十歲尙在藩王之位至於神宗有疾而始冊為太子以帝王大舉措常貴於于于也上下備忘記曰噫儲嗣已建君
紀年便攷v27鞫臣所未曉時烈罪犯凶逆而年過八十不必鞫問自上斟酌䖏分焉左議政睦來善右議政金德遠䓁皆如大運言上乃命賜死時烈被拿至井邑受命是夜奎星隕地也
紀年便攷v27時烈窮凶極惡彰著旡餘不待鞫問可知其罪且祖宗朝未嘗有鞫問大臣之事上問諸領議政権大運對曰當初設鞫臣所未曉時烈罪犯凶逆而年過八十不必鞫問自上斟酌䖏分焉左議政睦來善右議政金德遠䓁皆如大運言上乃命賜死時烈被拿至井邑
紀年便攷v27渡文字盛穪其功德與宋臣孫覿之為金人作某文相類故時烈因宋子所記孫覿事以䂓諷之君子論人自有公案則此非出於時烈之私意而宲朱子之遺㫖也上令禮曺禀啓判書金鎮龜覄奏請以世堂所改四書註說及景奭碑文投之水火以嚴斥之上従之
紀年便攷v27耶無乃毀時烈之罪反有甚於侮朱子耶其發怒者非但碑文一事世堂之子泰輔遺文纔付剞劂而其中言語文字多有切逼於時烈者一種議論惡之若芒剌觸背特以其人己没無所洩怱今乃移怒其老父欲令髦昏乘絶之喘不得安於蓬華之下其亦不仁甚
紀年便攷v27自作反卒於聖賢之門時烈又被罔極之誣於世堂益景奭嘗於三田渡文字盛穪其功德與宋臣孫覿之為金人作某文相類故時烈因宋子所記孫覿事以䂓諷之君子論人自有公案則此非出於時烈之私意而宲朱子之遺㫖也上令禮曺禀啓判書金鎮龜覄
紀年便攷v27真是為斯文闢衛則何不於論著流聞之初登庸之時明目張膽以卞之必待碑文撰出之後始乃撰索明洗而苛論之耶無乃毀時烈之罪反有甚於侮朱子耶其發怒者非但碑文一事世堂之子泰輔遺文纔付剞劂而其中言語文字多有切逼於時烈者一種議
紀年便攷v27宋時烈噫世堂此事非其始俑而有所従来䥴賊乃敢凌轢宋子誣辱中庸今世堂不以為戒而尋其前轍自作反卒於聖賢之門時烈又被罔極之誣於世堂益景奭嘗於三田渡文字盛穪其功德與宋臣孫覿之為金人作某文相類故時烈因宋子所記孫覿事以
紀年便攷v27䟽曰元良誕降宲萬世無彊之休遵春秋立長之義而朱時烈動穪春秋而獨於此乃有徐徐之言其或見賣於人而不自覺其歸於爛熳乎及夫坤位旣復之後有一春澤者敢自以為㓛國人
紀年便攷v28不見外客早有學行深於禮說與宋時烈為道義交尊慕事如師又與尹拯相合調停両間自䖏以明道李珥而實近胡廣之中庸時烈後命時望哭行素帶三月之制拯聞之深懷恨憾至有憤懟之說甲戌以左䝺成拜左相告身書偽號則不屈自書崇禎年號後始
紀年便攷v28入相至領賜几杖入者社己巳廢母時以首相半日庭請而罷終無一言匡正宋時烈之就拿也中路病重有徑卒之憲大運奏曰時烈罪逆彰著不必待鞫問請即為賜死従之甲戌被竄蒙放己卯卒年八十七自上特為復爵孫重經見下子珪字徳章 肅宗乙卯
紀年便攷v28耆社賜几杖状貌清癯奇古如枯楂為文簡古䏻於篆籀聞天下名入茟苑朴知誡倡追崇議以學儒罰之甞以論禮詆斥宋時烈時烈曰両尹全出禍心許則似是所見之誤而至扵國本未定之說亦是禍心為人作墓文言李适䖏曰李适兵敗死汝立則前後舉論
紀年便攷v28憲時崔慎上䟽發公私書為宋時烈辨誣而論拯背師至及於其父朴世釆疏論其誣罔大臣金夀恒閔鼎重奏言尹拯以私憾詆時烈不當復待以待賢之禮上允之己丑八十一拜右相甲午卒年八十六諡文成墓石勿書大官只書以徴士為遺戒丙申削官後或
紀年便攷v28石谷受業于宋時烈宋浚吉顯宗戊申生貟志節堅確學行篤實時烈甚倚重之肅宗即位甲寅以後鐫穆莗假借禮論搆成士禍時烈自业而南遷禍将不測尚敏進論禮冊子以萬言封事為師辨誣大忤羣㐫己未卒于桁楊年五十四暴屍金吾門三日無人收殮
紀年便攷v28宋尚敏愉九世孫嘉善時興子時烈十三寸姪字子慎號石谷受業于宋時烈宋浚吉顯宗戊申生貟志節堅確學行篤實時烈甚倚重之肅宗即位甲寅以後鐫穆莗假借禮論搆成士禍時烈自业而南遷禍将不測尚敏進論禮冊子以萬言封事為師辨誣
紀年便攷v28宋尚敏愉九世孫嘉善時興子時烈十三寸姪字子慎號石谷受業于宋時烈宋浚吉顯宗戊申生貟志節堅確學行篤實時烈甚倚重之肅宗即位甲寅以後鐫穆莗
紀年便攷v28漢英陽人磼子字章于居安東仁祖丙戌以生貟登明經科肅宗乙卯以掌令與正言李壽慶合啓論宋時烈宋浚吉李惟泰又以時烈栫棘絶島告廟事發論以此挺身擔當之故即通大司憲官止参議兄弟文科
紀年便攷v28崔邦彦徳之後孫字美伯號養正堂宋時烈門人時烈器重之蔭仕止僉正壽陞同中樞李箕洪辨師誣被罪邦彦請與同罪嘗受業於尹宣舉故斥拯甚嚴而前後儒䟽語及宣舉戒子
紀年便攷v28著時烈大加奨許勸之仕終不應顯宗壬寅進士壬子登别試隷成均除六邑俱不赴權奸柄國以亢厲見忤被謫及慈國母遜位時烈被禍退居堤川之林湖杜門不出官止司藝所著有絕韋餘編中庸演義震史通考戊寅卒年七十李玄逸載寧人参奉時朋子字
紀年便攷v28朴守儉義興人景湛子仁祖己巳生字養伯號林湖又四愚亭學于趙錫胤宋時烈家貧好讀行誼大著時烈大加奨許勸之仕終不應顯宗壬寅進士壬子登别試隷成均除六邑俱不赴權奸柄國以亢厲見忤被謫及慈國母遜位時烈被
紀年便攷v28隠翁宋時烈門人以學行除洗馬遷監察并不仕以壽陞僉中樞連宋尚敏之獄酷被刑訊不無援引之辭或以是短之而學識為時烈所推許肅宗丁酉卒年八十九
紀年便攷v28蔡之沔壽五世孫字漢卿號漱菴遊宋時烈宋浚吉申碩蕃之門以篤學聞時烈書給漱菴登科輒罷榜登判未授職而卒
紀年便攷v28銓郞肅宗即位甲寅宋時烈栫棘宋浚吉追削奎濂以司諌奏曰両臣之寃天地鬼神實所鑑臨始命罷職已而削黜及浚吉復爵時烈敦召奎濂在野已十九年始膺命為吏議歷副學不楽在朝除東伯不赴官止崇政禮判入耆社容貌如玉性恬雅簡潔己巳後退
紀年便攷v28李楘外孫尹柔婿仁祖丁丑生字士威號守正齋又龍村尹宣舉門人以遺浼進官止賛善與羅良佐齊名而友善攻宋時烈尤甚時烈曾作緯韓墓文有貶議故也肅宗辛卯卒年七十五従曾孫榆宗漢子英祖乙亥杖斃
紀年便攷v28癸酉於甲戌拜諮議丙子拜持平歷掌令執義兼書筵官官止掌楽正皆不就春秋之義邪正之辨一遵宋時烈遺䂓直字之號即時烈单傳之訣也戊子卒年六十八子蓍聖見下
紀年便攷v28炯胤従孫仁祖辛巳生字汝九號直齋初名箕疇宋時烈門人初従李之濂學天姿和粹氣度剛方肅宗即位甲寅與同門諸人訟時烈寃及時烈竄入加平峽中杜門謝世丁卯以經明行修薦除孝陵参奉羅良佐上䟽侮辱宋時烈箕洪呈病遞職戊辰被選經學士
紀年便攷v28孝陵参奉羅良佐上䟽侮辱宋時烈箕洪呈病遞職戊辰被選經學士己巳坤殿遜位時吳斗寅䓁上䟽力争是除司圃别提不就時烈自濟州被拿乃㐲闕抗䟽配會寧癸酉於甲戌拜諮議丙子拜持平歷掌令執義兼書筵官官止掌楽正皆不就春秋之義邪正之
紀年便攷v28仁祖辛巳生字汝九號直齋初名箕疇宋時烈門人初従李之濂學天姿和粹氣度剛方肅宗即位甲寅與同門諸人訟時烈寃及時烈竄入加平峽中杜門謝世丁卯以經明行修薦除孝陵参奉羅良佐上䟽侮辱宋時烈箕洪呈病遞職戊辰被選經學士己巳坤殿
紀年便攷v28為罪流光陽甲戌放自會寧移居南方甞䟽請李沃之罪甲子上䟽卞宋時烈之誣斥尹拯背師之罪為人剛毅木訥篤學實踐為時烈高弟戊子卒年六十七贈執義憲宗朝贈吏議大皇帝庚辰加贈吏参壬午加贈吏判諡文簡
紀年便攷v28仁祖壬午生字君輔號龜川朴世釆門人世采門下以學識称講禮書剖柝儀文肅宗即位甲寅将加極律於宋時烈世弼素不識時烈而以布衣倡率多士白其寃上震怒配靈光戊子蒙放翌年以經學薦除昌陵参奉不就又除童教又用薦陞六品職丙子拜書筵
紀年便攷v28敬叔號景寒齋宋浚吉門人又事宋時烈肅宗朝金壽恒李端夏以經明行修交薦之拜齊陵参奉己巳以王子英祖師傳棄官去時烈有後命上章訟寃及仁顕后廢黜遂挈家入泰安士慕其徳名出財力搆成講齋於海門後又拜穆陵参奉辭歸又拜利仁察訪曾
紀年便攷v28以司直上䟽曰自殿下在儲時烈以不滿之意倡之於前春澤以動撓之計和之於後今者龍民喜器即春澤之支黨頣集健泰即時烈之徒黨臣謂時烈之追奪春澤之孥藉断不可已英祖丙午卒年八十三子垽以子天永戊申謀逆緣㘴絞
紀年便攷v28濟湜曾孫教官涬号閑存齋子仁祖甲申生字聖會肅宗己巳以前参奉登增廣官止左尹景宗壬寅以司直上䟽曰自殿下在儲時烈以不滿之意倡之於前春澤以動撓之計和之於後今者龍民喜器即春澤之支黨頣集健泰即時烈之徒黨臣謂時烈之追奪春
紀年便攷v28殿下在儲時烈以不滿之意倡之於前春澤以動撓之計和之於後今者龍民喜器即春澤之支黨頣集健泰即時烈之徒黨臣謂時烈之追奪春澤之孥藉断不可已英祖丙午卒年八十三子垽以子天永戊申謀逆緣㘴絞
紀年便攷v28魁庭試歷奉教三司官止執義以淸白世其家與趙持謙俱有時望庚申獄後宋時烈曰淸城光南不無衛社之切尹拯大驚遂叛時烈於是諸名士貳於時烈者皆附於尹拯遂為老少黨論之分歧宋時烈金壽恒䓁以老成人主宋者為老論韓泰東趙持謙以少年
紀年便攷v28止執義以淸白世其家與趙持謙俱有時望庚申獄後宋時烈曰淸城光南不無衛社之切尹拯大驚遂叛時烈於是諸名士貳於時烈者皆附於尹拯遂為老少黨論之分歧宋時烈金壽恒䓁以老成人主宋者為老論韓泰東趙持謙以少年論議援附尹拯主尹者
紀年便攷v29宋疇錫時烈孫蔭同敦基泰子孝宗庚寅生字叙九號鳳谷肅宗癸亥登增廣歷翰林南床官止校理文章徳望比以孔門之子思壬申卒年四
紀年便攷v29徳源謫所因師事之肅宗己未以純陵參奉登明經科歷察訪官止縣監己巳以宋時烈門人削仕版甲戌拜兵曺正郞羅良佐誣時烈宅正與韓聖輔諸人上䟽伸辨以㐫人棐姪㘴廢英祖丁未卒年七十七
紀年便攷v29鄭纉祖夢周十一世孫龜徵子孝宗己亥生字孝伯號睡隠弱冠學於尹拯始滋惑於宋時烈及熟講時烈文字實知為正大君子備陳於拯冀其悔悟其意終落落纉祖曰従此蹤跡永絶門下門下自護仍不相従然而以此䖏義而不仕
紀年便攷v29宋時烈為一代儒宗且曰己亥議禮非為貶薄大憲尹䥴者白上論其罪又因許積面禀兩儒生發遣羅将拿来上曰弼明徒知有時烈不知有大孝廟也即令設鞫嚴問凶䟽必有製給之人期於摘發傳曰萬亨邊遠定配因許積言定配還收施以儒罰弼明刑問一
紀年便攷v29郭世楗䞭曾孫居晉州甲寅顯宗昇遐後誌文令宋時烈製進世揵以儒生乙卯上疏以為時烈大孝廟之罪人也大先王之罪人也豈可使大兩朝罪臣濫握彤管以溷先王之盛徳也時烈之握此筆難矣大憲閔蓍重等請世
紀年便攷v29烈製進世揵以儒生乙卯上疏以為時烈大孝廟之罪人也大先王之罪人也豈可使大兩朝罪臣濫握彤管以溷先王之盛徳也時烈之握此筆難矣大憲閔蓍重等請世楗令攸司嚴鞫勘㫁因大臣筵奏世楗停舉時烈因此䟽下去傳曰今此誌文令判府事上来
紀年便攷v29大兩朝罪臣濫握彤管以溷先王之盛徳也時烈之握此筆難矣大憲閔蓍重等請世楗令攸司嚴鞫勘㫁因大臣筵奏世楗停舉時烈因此䟽下去傳曰今此誌文令判府事上来製進其勢未易以預差撰進泮儒李胤岳䟽斥世楗答曰世楗之忠言至論斥以為凶
紀年便攷v29道以為拔身之計而後以渾為宣舉之外祖移怒誣辱請追奪官爵以彰誣師誣賢之罪金昌恊忘其祖尚憲山仰成渾之意附合時烈列書諸賢道徳而獨於渾不数之亦追奪以正背祖黨奸誣賢之罪五道儒生尹俔慶尚道儒生鄭萬源并䟽救時烈俔巨濟島配
紀年便攷v29時烈門人
紀年便攷v29権以鎮時烈外孫前承㫖李喬岳時烈門人并䟽卞四道儒生崔鐸等䟽論時烈為斯文之賊因斥以鎮喬岳進士郭鎮緯等䟽卞時烈有曰太學請享䟽出於甲戌回啓於乙亥舉行於丙子陞享於正月十二日而趾善之䟽十五日乃入故政院既已舉行之啓乃在
紀年便攷v29時烈外孫
紀年便攷v29喬島遠竄安允中曾於上年上䟽痛陳師生之卞請使丙申䖏分無敢更撓政院論斥不捧至是允中邊配畿儒金弘錫等上䟽誣時烈曰口誦珥渾之道以為拔身之計而後以渾為宣舉之外祖移怒誣辱請追奪官爵以彰誣師誣賢之罪金昌恊忘其祖尚憲山仰
紀年便攷v29䟽其時公論不滿可知公論既發不當仍存依允承㫖権以鎮時烈外孫前承㫖李喬岳時烈門人并䟽卞四道儒生崔鐸等䟽論時烈為斯文之賊因斥以鎮喬岳進士郭鎮緯等䟽卞時烈有曰太學請享䟽出於甲戌回啓於乙亥舉行於丙子陞享於正月十二日
紀年便攷v29渾之意附合時烈列書諸賢道徳而獨於渾不数之亦追奪以正背祖黨奸誣賢之罪五道儒生尹俔慶尚道儒生鄭萬源并䟽救時烈俔巨濟島配萬源興陽羅老島島配
東國歷代總目v02尹䥴忌忮之倡言大喪大妃宜服三年而定爲期制是卑主貳宗嗾善道疏訐上焚其章竄北邊而許穆洪宇遠趙絅先後持其說時烈已歸宋浚吉至是亦退
郯述v01甲子生時烈五代孫父應相恩津副率
國朝人物志v3爲湖南都事甲寅爲大司諫朝局新變一番人論罪宋時烈同僚將欲加律之翼執不可立異引避曰竊見時烈之爲人非無好善之心而多有固滯之處非無愛士之志而引進同色之人所執多滯故當大禮而不能精究所親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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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