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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화(鄭太和)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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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유춘(囿春)
호(號)양파(陽坡)
시호(諡號)충익(忠翼)
생년1602(선조 35)
졸년1673(현종 14)
시대조선중기
본관동래(東萊)
활동분야문신 > 문신
정광성(鄭廣成)
5대조정광필(鄭光弼)
외조부황근중(黃謹中)
저서『양파유고』
저서『양파연기』

[상세내용]

정태화(鄭太和)
1602년(선조 35)∼1673년(현종 1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유춘(囿春), 호는 양파(陽坡).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5대손으로, 형조판서 정광성(鄭廣成)의 아들이며, 모친은 황근중(黃謹中)의 딸이다.

좌의정 정치화(鄭致和)예조참판 정만화(鄭萬和)의 형이다.

1624년(인조 2)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어 1628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로 벼슬살이를 시작하였다.

1637년 세자시강원보덕이 되어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따라 심양(瀋陽)에 가기까지, 당하관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홍문관에서는 수찬교리응교를, 사간원에서는 정언헌납사간을, 사헌부에서는 집의를, 세자시강원에서는 설서사서필선을, 성균관에서는 사예사성을 각각 지냈다.

또, 행정부서에서는 예조좌랑, 이조좌랑정랑, 의정부사인, 예빈시(禮賓寺)제용감(濟用監)장악원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면서 1631년 시강(試講)에서 우등으로 뽑혀 숙마(熟馬) 1필을 수상하는 문재를 보였고, 또 사간으로 있던 1636년 청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여 설치된 원수부종사관에 임명되어 도원수 김자점(金自點)휘하에서 군무(軍務)에 힘쓰다가 병자호란을 맞자 황해도의 여러 산성에서 패잔병을 모아 항전하는 무용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듬해 비변사가 유장(儒將)으로 합당한 인물 4인을 천거하는 가운데 한 사람으로 뽑힌 것도 이 까닭이었다.

1637년말 심양으로부터 귀국하자 그 이듬해 충청도관찰사로 발탁되어 당상관에 올랐다.

그리고 6개월 만에 승정원동부승지가 되어 조정에 돌아온 이후 1649년 48세의 나이로 우의정에 오르기까지, 육조의 참의참판, 한성부우윤대사간, 평안도경상도관찰사, 도승지 등을 두루 지내다가 1644년말부터는 육조의 판서대사헌을 되풀이 역임하였다.

이 무렵은 소현세자의 죽음과 그 후계문제로 조정 정신(廷臣)들 사이에 심한 충돌이 일고 있었고, 그 결과 소현세자의 부인 강씨(姜氏)가 사사(賜死)되고 그 아들들이 제주에 유배되는 사태까지 빚어지고 있어서 중진관료로서의 처신이 매우 어려웠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조형조사헌부의 장관과 같은 난감한 직책을 되풀이 역임할 수 있었던 것은 성품이 온화하고 대인관계가 원만하여 적대세력을 두지 않았던 까닭으로 전하고 있다.

심지어는 뒷날에 사신(史臣)이 “조정의 의논이 자주 번복되어 여러 차례 위기를 맞았으나, 그의 영현(榮顯)은 바뀌지 않았으니, 세상에서는 벼슬살이를 가장 잘하는 사람으로 그를 으뜸으로 친다.”고 평할 정도였다.

우의정에 오른 직후 효종이 즉위하자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 연경(燕京)에 갔고, 그뒤 곧 좌의정에 승진되었으나 어머니의 죽음으로 취임하지 못하고 향리에 머무르다가, 1651년(효종 2)에 상복을 벗으면서 영의정이 되어 다시 조정에 나아갔다.

1673년(현종 14) 심한 중풍 증세로 사직이 허락되기까지 20여년 동안 5차례나 영의정을 지내면서 효종현종을 보필하였다.

북벌정책과 예송(禮訟)으로 신료들의 반목이 격화되던 시기여서 당색을 기피하였고, 또한 정치화정만화정지화(鄭知和) 등을 비롯한 일가 친족들이 현‧요직에 많이 올라 있었으므로 매우 고통스러운 세월이었다.

그리하여 “이 나라를 정가(鄭哥)가 모두 움직인다.”는 야유를 듣기도 하고, 또 “재주가 뛰어나고 임기응변에 능숙하여 나라일은 적극 담당하려 하지 않고 처신만을 잘하니, 사람들은 이를 단점으로 여겼다.”는 비평을 듣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이 시기의 예송에서 일어나기 쉬웠던 선비들의 희생을 예방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와 그의 형제들은 이 무렵 청나라와의 어려운 관계를 해결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청나라의 고위관원들과도 적절히 교유하였기 때문에 곤란한 경우를 당할 때마다 대체로 그나 그의 형제들에게 해결의 책무가 주어졌던 것이다.

그가 노구를 무릅쓰고 1662년에 진하 겸 진주사(進賀兼陳奏使)연경에 다시 다녀온 것도 이 까닭이었다.

1673년 다섯번째의 영의정 자리에서 물러난 지 6개월이 되던 달에 나이 72세로 죽으니, 현종은 3년 동안 늠록(廩祿)과 제수를 내리도록 특명하였으며, 그뒤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시‧문을 모아 엮은 『양파유고』 2권 2책과, 1656년(효종 7)까지의 일기인 『양파연기』 2권 2책이 있고, 또 시조 1수가 전한다. 시호는 익헌(翼憲)이다(뒤에 충익(忠翼)으로 바꿈.).

[참고문헌]

仁祖實錄
孝宗實錄
顯宗改修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淸選考
萬姓大同譜
閥閱政治(黃元九, 한국사 13, 국사편찬위원회, 1976)

[집필자]

한영국(韓榮國)

명 : "태화(太和)"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歷代總要v04駙馬東平尉鄭載崙翼孝公生一男一女○東萊人父左議政致和生父領議政翼憲公太和
紀年便攷v26鄭致和太和第光海庚戌生字聖䏻號棊洲仁祖戊辰登别試歴翰林舍人丁丑後以輔徳留潯陽孝宗置酒邀宮官致和曰朝紳於王子軆貌
國朝捷錄v01字聖能太和弟東萊人丁卯拜右號棊洲 仁廟時科
郯述v02戊辰太和弟 左相
郯述v02辛酉拜癸亥太和四代孫
國朝人物志v3祖甲子進士戊辰文科與弟致和聯壁丙子爲元帥從事丁丑正月師次兔山虜騎大至元帥遁大軍潰太和倉卒間收餘卒據縣館力戰殺傷多虜大挫而却人皆壯之六月按節湖西上面諭曰嘉卿兔山之事擢授方
國朝人物志v3夫人乃廣成姑氏女也孝宗甲午知其年高特命爲刑曹判書入耆社常以黨論爲恥言不及色目其子太和之爲相也謂曰自爾爲相吾寢不安甲午卒年七十九人物考
國朝人物志v3字一運東萊人領相太和弟聰明穎悟仁祖庚午年十七赴司馬試淸陰金文正月沙李文忠見其所製深加奬歎以
國朝人物志v3字聖能號棋洲東萊人太和弟仁祖戊辰文科與兄太和同榜補檢閱丁丑胡亂後以輔德留瀋陽孝宗置酒邀宮
國朝人物志v3字子高東萊人太和子自號松窩辛卯進士肅宗乙丑拜右議政壬申卒年六十一國朝榜目弟載崙尙孝宗
國朝人物志v3字善之號經山東萊人大司諫啓淳孫翼憲公太和六世孫純祖壬戌文科歷檢閱憲宗辛丑入相官至領議政諡文忠相臣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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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