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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회빈강씨(愍懷嬪姜氏)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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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미상)
졸년1646(인조 24)
시대조선중기
본관금천(衿川)
활동분야왕실 > 비빈
강석기(姜碩期)

[상세내용]

민회빈강씨(愍懷嬪姜氏)
미상∼1646년(인조 24). 조선시대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빈(嬪). 본관은 금천(衿川).

우의정 강석기(姜碩期)의 딸이다.

1627년(인조 5) 가례(嘉禮)를 올려 소현세자빈이 되었다. 병자호란 뒤인 1637년 세자와 함께 심양(瀋陽)에 볼모로 갔다가 1644년에 귀국하였다.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갔던 소현세자는 심관(瀋館)에서 국왕의 대리자로서 많은 재량권을 행사하였고 측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귀국하게 되자 인조는 세자에게 전위(傳位)를 강요당하거나 세자 대신 입조(入朝)의 요구를 받게 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세자는 환국 후 두달 만에 병증(病症)이 있은 지 3일 만에 34세로 급서(急逝)하였다. 세자의 독살혐의가 짙은데도 인조는 입관(入棺)을 서두르고 강빈(姜嬪)과 대신들의 간청도 뿌리치고 장례를 매우 간소하게 지냈다. 그해 봉림대군(鳳林大君)이 귀국하여 세자가 되었고, 소현세자의 원손(元孫)은 왕위계승자격을 잃게 되었다.

여기에다 인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강빈과 반목질시하던 조소용(趙昭容)강빈인조를 저주하였다고 무고하여 그의 형제들을 모두 유배시키자, 강빈은 인조거실(仁祖居室)근처에 가서 통곡하고 그때부터 왕에게 조석문안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왕의 수라상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도 받게 되어 후원별당에 유치(幽置)되었다가 조정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646년 3월에 사사(賜死)되었다.

이어 세자의 어린 세 아들은 귀양가게 되고, 강빈의 노모와 4형제는 모두 처형 혹은 장살(杖殺)되는 비극이 전개되었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昭顯世子硏究(金龍德, 史學硏究 18, 1964)

[집필자]

김용덕(金龍德)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