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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무적(洪茂績)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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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면숙(勉叔)
호(號)백석(白石)
시호(諡號)충정(忠貞)
생년1577(선조 10)
졸년1656(효종 7)
시대조선중기
본관남양(南陽[唐])
활동분야문신 > 문신

[상세내용]

홍무적(洪茂績)
1577년(선조 10)∼1656년(효종 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唐]). 자는 면숙(勉叔), 호는 백석(白石).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615년(광해군 7) 생원으로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를 받은 정조(鄭造)윤인(尹訒)이위경(李衛卿) 등이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론을 제기하자 이에 반대, 이들을 목벨 것을 상소하고, 폐모론에 반대하는 이원익(李元翼)이 유배되자 정택뢰(鄭澤雷)김효성(金孝誠) 등과 서로 잇따라 소를 올려 이원익의 충절을 밝히고 폐모론자를 목벨 것을 주장하다가 거제도로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석방, 창녕현감에 기용되고 이듬해 진천현감이 되었다.

1632년(인조 10) 지평수찬을 거쳐 김제군수가 되었으며, 이어 공주목사를 역임하였다.

1639년 장령으로 병자호란에 대한 복수설치(復讐雪恥)와 강화도의 수축을 상소하였다.

1641년 사간이 되었는데 “과거에 급제하지 않은 자로 언관에 기용함은 전고소무(前古所無)한 일이라.”는 상신(相臣)들의 반대로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듬해 우부승지로 사인(士人)들이 염치를 모르고 회뢰(賄賂)가 공행(公行)하며 언로가 막혀 있음을 지적하는 등 시폐(時弊)를 논하였다. 우승지병조참판을 거쳐 1643년 대사헌이 되어 좌의정 심기원(沈器遠)의 탐종무기(貪縱無忌)하고 교만함을 들어 탄핵하였다.

1644년 판결사가 되고 사은부사(謝恩副使)청나라에 다녀와 행호군대사헌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다시 병조참판이 되었는데 백도(白徒) 한신남(韓信男)의 말만 믿고 그를 겸사복장(兼司僕將)에 의망(擬望)한 데 책임지고 파직되었다.

1646년 대사헌으로 강빈(姜嬪: 昭顯世子嬪)의 옥사에 “강빈을 죽이려면 신을 먼저 죽여달라.”고 극간하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소현세자의 세 아들이 제주도에 유배되자 이들과 격리시키기 위하여 남해로 이배되고, 다시 갑산에 이배되었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사면되어 전리(田里)에 방귀(放歸)되고, 이듬해 한성우윤에 기용되고, 이어서 대사헌 지의금부사를 거쳐 1652년(효종 3) 공조판서에 오른 뒤 대사헌우참찬좌참찬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孝宗實錄
燃藜室記述
國朝人物考

[집필자]

이원근(李元根)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