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택뢰(鄭澤雷)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815D0DDB8B0B1585X0 |
자(字) | 휴길(休吉) |
호(號) | 화강(花岡) |
시호(諡號) | 충결(忠潔) |
생년 | 1585(선조 18) |
졸년 | 1619(광해군 11)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하동(河東) |
활동분야 | 기타 > 지사 |
부 | 정득열(鄭得悅) |
모 | 강씨(姜氏) |
[상세내용]
정택뢰(鄭澤雷)
1585년(선조 18)∼1619년(광해군 11). 조선 중기의 지사(志士).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휴길(休吉), 호는 화강(花岡).
영의정 정인지(鄭麟趾)의 7대손이다. 증조부는 정인국(鄭仁國)이고, 조부는 정희영(鄭希永)이며, 부친은 현감 정득열(鄭得悅)이다. 외조부는 강종경(姜宗慶)이고, 처부는 정사경(鄭思敬)이다(주1)
.
1612년(광해군 4)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615년 이이첨(李爾瞻)이 정조(鄭造)‧윤인(尹訒)‧이위경(李偉卿) 등을 사주하여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론을 제기하자, 은둔생활을 하고 있던 이원익(李元翼)이 그 부당성을 극력 논박하다가 유배당하였다.
이에 대하여 유생 홍무적(洪茂績)‧김효성(金孝誠) 등과 더불어 이른바 논척조인(論斥造訒)의 상소를 올려 이원익을 변호하고, 이이첨 일파를 치죄할 것을 극력 주장하였다.
이로 인하여 남해의 절도에 유배되었으며, 어머니 강씨(姜氏)가 함께 배소에 기거하다가 1616년에 죽자 애통 끝에 실명하여 그곳에서 죽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이후에 지평, 순조조에 이조판서로 추증되었고, 부여의 의열사(義烈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결(忠潔)이다.
영의정 정인지(鄭麟趾)의 7대손이다. 증조부는 정인국(鄭仁國)이고, 조부는 정희영(鄭希永)이며, 부친은 현감 정득열(鄭得悅)이다. 외조부는 강종경(姜宗慶)이고, 처부는 정사경(鄭思敬)이다(주1)
가족 |
『國朝文科榜目』(규장각[奎106]) 광해군 4년(1612) 임자 증광방 생진 장원 명단을 참고하여 조, 증조, 외조, 처부를 추가함. |
1612년(광해군 4)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615년 이이첨(李爾瞻)이 정조(鄭造)‧윤인(尹訒)‧이위경(李偉卿) 등을 사주하여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론을 제기하자, 은둔생활을 하고 있던 이원익(李元翼)이 그 부당성을 극력 논박하다가 유배당하였다.
이에 대하여 유생 홍무적(洪茂績)‧김효성(金孝誠) 등과 더불어 이른바 논척조인(論斥造訒)의 상소를 올려 이원익을 변호하고, 이이첨 일파를 치죄할 것을 극력 주장하였다.
이로 인하여 남해의 절도에 유배되었으며, 어머니 강씨(姜氏)가 함께 배소에 기거하다가 1616년에 죽자 애통 끝에 실명하여 그곳에서 죽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이후에 지평, 순조조에 이조판서로 추증되었고, 부여의 의열사(義烈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결(忠潔)이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純祖實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大東野乘
仁祖實錄
純祖實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大東野乘
[집필자]
이범직(李範稷)
명 : "택뢰(澤雷)"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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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