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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돈(尹暾)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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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여승(汝昇)
호(號)죽창(竹窓)
시호(諡號)효정(孝貞)
생년1551(명종 6)
졸년1612(광해군 4)
시대조선중기
본관파평(坡平)
활동분야문신 > 문신
윤극신(尹克新)

[상세내용]

윤돈(尹暾)
1551년(명종 6)∼1612년(광해군 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여승(汝昇), 호는 죽창(竹窓). 윤극신(尹克新)의 아들이다.

이황(李滉)기대승(奇大升)의 문인으로, 1579년(선조 12)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1585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여러 청요직을 역임하고, 1591년 이조정랑으로서 건저문제(建儲問題)로 유배된 정철(鄭澈)에 연루되었던 백유함(白惟咸)유공진(柳拱辰) 등을 학관(學官)에 천거하였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추고를 받고 삭직되었다.

이듬해 복관되었고, 이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하였다.

1593년 명나라 장수 낙총병(駱總兵)오유격(吳遊擊)이 나오자 부교리로서 그들의 접반관(接伴官)으로 활약하였고, 이듬해 사인을 거쳐 응교시강관이 되었다.

이어 직제학동부승지도승지 등을 역임하고, 1598년 병조참의를 거쳐 대사간에 이르러 척신(戚臣)의 직을 파할 것과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뒤 형조참의예조참판을 거쳐 강원도관찰사로 나아갔으나 그 임무를 다하지 못한다는 질책을 받았다.

1600년 다시 도승지예조참판을 거쳐 부제학이 되었을 때, 성혼(成渾)이 왕을 호종하지 않았고 간신들과 한 당이 되었다고 탄핵하여 그의 관작을 추삭(追削)하게 하였다.

1602년 대사간이 되었으나 체직을 원하여 이조참판으로 옮겼다. 이후 대사성도승지병조참판을 거쳐, 1604년 공조판서에 올라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뒤 충청도관찰사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1608년 선조가 죽자, 산릉도감제조(山陵都監提調)를 거쳐, 예조판서가 되었으나, 장마로 산릉이 무너지자 그 책임으로 파직되었다. 시호는 효정(孝貞)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典故大方

[이미지]

[집필자]

이문기(李文基)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