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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자운(尹子雲)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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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망지(望之)
호(號)낙한재(樂閑齋)
시호(諡號)문헌(文憲)
생년1416(태종 16)
졸년1478(성종 9)
시대조선전기
본관무송(茂松)
활동분야문신 > 문신
윤경연(尹景淵)
조부윤회(尹淮)
증조부윤소종(尹紹宗)
공신호추충좌익공신(推忠佐翼功臣)
공신호좌리공신(佐理功臣)

[상세내용]

윤자운(尹子雲)
1416년(태종 16)∼1478년(성종 9).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무송(茂松). 자는 망지(望之), 호는 낙한재(樂閑齋).

윤소종(尹紹宗)의 증손이며, 집현전학사 윤회(尹淮)의 손자이고, 윤경연(尹景淵)의 아들이다.

1438년(세종 20)에 진사가 되고, 1444년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을 시작으로 집현전 부수찬이조좌랑사간원좌헌납, 응교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집현전부수찬으로 있을 때 수사관(修史官)이 되어 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고려사』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정권과 병권을 장악하자 그의 요속(僚屬)으로 활약하였으며, 수양대군이 즉위하자 추충좌익공신(推忠佐翼功臣)이 되어 대호군으로서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를 겸하고, 이어 승정원동부승지도승지에 올랐다가 1460년(세조 6)어머니상을 당하여 일시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때 세조여진족의 모련위(毛憐衛)를 정벌하기 위하여 장재(將材)를 구하게 되었는데 단연 그가 뽑혀 기복(起復)되어 이조참판이 되고 무송군(茂松君)에 봉하여져 군사를 지휘하게 되었다. 원정에서 돌아와 인수부윤(仁壽府尹)이 되었는데 3년상을 나게 해주기를 원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고, 그뒤 1462년에 병조판서, 1465년에 의정부우참찬에 올랐다.

그러나 당시 그의 매서(妹壻)였던 신숙주(申叔舟)영의정이었으므로 그를 의정부에 임명하는 것은 상피관계(相避關係)에 저촉된다 하여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으나 세조의정부에는 마땅한 사람이 아니면 임명할 수 없다 하여 1466년에 그를 의정부좌참찬으로 승진시키고, 이듬해에는 다시 의정부우찬성으로 승진시켰다.

이때 마침 함경도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 그를 함길도체찰사(咸吉道體察使)에 임명하여 난을 집압하도록 하였는데, 이시애가 이미 관찰사절도사와 제진장(諸鎭將)을 죽이고, 또 그마저 죽이려고 칼을 빼들고 둘러싸 7일이나 지키고 있어서 하는 수 없이 적(賊)이 정부를 속이는 위조문서에 서명하고 살아 돌아왔다.

그러나 세조는 그를 위로하고 1469년에는 우의정으로 승진시켰다.

그뒤 곧 좌의정이 되었다가 이듬해에 영의정으로 승진하고, 성종이 즉위하자 좌리공신(佐理功臣) 등이 되어 무송부원군 겸 예조판서(茂松府院君兼禮曹判書)에 피봉(被封)되었다. 그리고 잠시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1476년(성종 7)에 다시 우의정이 되었다.

사람됨이 단아(端雅)하고 상밀(詳密)하여 일생 동안 관부(官府)의 탄핵을 한번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국가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여러번 순찰사로 나아가 일을 처리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모두 좌리공신으로서 권세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명회(韓明澮)신숙주구치관(具致寬) 등과 함께 예종이 죽은 뒤에는 원상(院相)으로서 국정을 좌우하였다.

그러나 사신(史臣)은 그를 성품이 편협하고 아무런 재능이 없으면서도 의정부의 고관이 되어 별다른 정책을 건의한 것도 없으며 이시애의 난 때에는 협박을 받고 적이 조정을 속이려는 문서에 서명하고 적을 대할 때마다 대인(大人)이라 칭하였다고 혹평하였다.

뿐만 아니라 조석으로 어머니가 사는 집 앞을 지나다니면서도 찾아보지 않는 일이 많아서 사람들이 이 노파는 자식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한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文宗實錄
端宗實錄
世祖實錄
睿宗實錄
成宗實錄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海東名臣錄

[집필자]

이성무(李成茂)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