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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成宗){3}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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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이혈(李娎)
시호(諡號)강정(康靖)
생년1457(세조 3)
졸년1494(성종 25)
시대조선전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왕실 > 왕
능호(陵號)선릉(宣陵)
덕종(德宗)
소혜왕후(昭惠王后)
공혜왕후(恭惠王后)
정현왕후(貞顯王后)
숙의 윤씨(淑儀尹氏)
처부한명회(韓明澮)
처부윤호(尹壕)
처부윤기무(尹起畝)
외조부한확(韓確)
묘소서울 강남구 삼성동

[상세내용]

성종(成宗)
1457년(세조 3)∼1494년(성종 25). 조선왕조 제9대왕. 재위 1470년∼1494년. 이름은 이혈(李娎).
1. 가계와 인품
세조의 손자이고, 덕종(德宗: 세조의 長子로 追尊)의 둘째아들이다. 모친은 영의정 한확(韓確)의 딸 소혜왕후(昭惠王后)이고, 비(妃)는 영의정 한명회(韓明澮)의 딸 공혜왕후(恭惠王后), 계비(繼妃)는 우의정 윤호(尹壕)의 딸 정현왕후(貞顯王后)이다.

1461년(세조 7) 자산군(者山君)에 봉해졌다가 1468년 잘산군(乽山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태어난 지 두 달도 채 못되어 덕종이 죽자 세조가 궁중에서 키웠는데, 천품(天稟)이 뛰어났으며 도량이 넓고 사예(射藝)와 서화(書畵)에도 능하여 특히 세조의 사랑을 받았다.

어느날 뇌우(雷雨)가 몰아쳐 옆에 있던 환관(宦官)이 벼락을 맞아 죽자 모두 정신을 잃었으나, 그의 얼굴빛이 바뀌지 않는 것을 보고 세조는 그가 태조를 닮았다고 하였다.

1469년(예종 1)에 예종이 죽고 그 아들이 아직 어리자, 정희대비(貞熹大妃: 世祖妃)한명회신숙주(申叔舟) 등 대신들과 의논하여 형 월산군(月山君)의 몸이 허약하므로 그를 왕위에 계승하게 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가 13세에 불과하였으므로 그뒤 7년간 정희대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다가 1476년(성종 7)에 비로소 친정(親政)을 실시하였다.
2. 친정초기
즉위하던 해 명나라 헌제(憲帝)의 고명(誥命)을 받았고, 세조찬위의 전철을 우려하여 이시애(李施愛)의 난 평정 이후 병조판서영의정을 역임하고 명성이 내외에 자자한 구성군(龜城君) 준(浚)을 유배시켰다.

1474년에 덕종회간왕(懷簡王)으로 추봉하였고, 1476년 공혜왕후가 아들이 없이 죽자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윤기무(尹起畝)의 딸 숙의 윤씨(淑儀尹氏)를 왕비로 삼았다.

그러나 계비가 된 윤씨는 원자(뒤의 燕山君)를 낳고 왕의 총애가 두터워짐에 따라 여러 다른 빈을 투기할 뿐 아니라 왕에게까지 불손하므로, 1479년 윤씨를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고 이어서 1482년에는 사사(賜死)하였는데, 이는 뒤에 갑자사화의 원인이 되었다.
3. 법전편찬 관수관급제
고려로부터 조선 초기까지 100여년간에 걸쳐 반포된 여러 법전‧교지‧조례‧관례 등을 총망라하여 세조 때부터 편찬하여오던 『경국대전』을 수차의 개정 끝에 1485년에 완성, 반포하였다. 이어 1492년에는 이극증(李克增)어세겸(魚世謙) 등에 명하여 『대전속록(大典續錄)』을 완성하여 통치의 전거(典據)가 되는 법제를 완비하였다.

1470년에는 세조 때부터의 직전제(職田制)실시에 따른 토지의 세습과 겸병(兼倂) 및 관리들의 수탈을 방지하기 위하여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를 실시하여, 국가에서 경작자로부터 직접 조(租)를 받아들여 관리들에게 현물 녹봉을 지급하였다.

1490년에는 여주의 영릉(英陵: 世宗의 능)을 참배, 왕래하는 연로(沿路)군현의 조세를 반감해주었고, 수령과 변장 임명시에는 친히 인견(引見)하여 지방민의 통치에 심혈을 기울일 것을 당부하였다.

또한, 백성들의 원고(怨苦)를 고려하여 형벌을 가볍게 하고, 장리(贓吏)의 자손은 등용하지 않는 국초 이래의 규정을 완화하였다.
4. 풍속과 교화
1485년 풍속을 교화하기 위하여 조신(朝臣)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가녀(再嫁女)의 자손은 관리등용을 제한하는 법을 공포하였으며, 형제숙질 사이에 다투는 자는 변방으로 쫓아내도록 하였다.

1487년에는 고려의 충신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의 후손을 녹용(錄用)하는 한편, 인재를 널리 등용하였으며, 세조 때의 공신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세력(勳舊勢力)을 견제하기 위하여 근왕세력(勤王勢力)으로 김종직(金宗直)일파의 신진사림세력(新進士林勢力)을 많이 등용하여 훈신과 사림간의 세력균형을 이룩, 왕권을 안정시켰고 조선 중기 이후 사림정치의 기반을 조성하였다.
5. 유교장려
불교를 배척하여 1489년 향시(鄕試)에서 사불양재(祀佛禳災)하여야 한다는 답안을 쓴 유생을 귀양보내도록 명령한 바 있으며, 1492년에는 도승법(度僧法)을 혁파하고 승려를 엄하게 통제하였다. 경사(經史)에 밝고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어 경연(經筵)을 통하여 학자들과 자주 토론을 하는 한편, 학문과 교육을 장려하였다.

1475년에는 성균관에 존경각(尊經閣)을 짓고 경적을 소장하게 하였으며, 양현고(養賢庫)를 충실히 하여 학문연구를 후원하고, 1484년과 1489년 두 차례에 걸쳐 성균관과 향교에 학전(學田)과 서적을 나누어주어 관학(官學)을 진흥시켰다.

또한 홍문관을 확충하고 용산두모포(龍山豆毛浦)에 독서당(讀書堂, 일명 湖堂)을 설치하여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고 독서제술(讀書製述)에 전념하게 하였다.
6. 문운진흥과 국방
또 편찬사업에도 관심을 가지고 노사신(盧思愼) 등의 『동국여지승람』, 서거정(徐居正) 등의 『동국통감』『삼국사절요』『동문선』, 강희맹(姜希孟) 등의 『오례의』, 성현(成俔) 등의 『악학궤범』 등 각종 서적을 간행하게 하여 문운을 진흥시켰다.

한편 국방대책에도 힘을 기울여 1479년 좌의정 윤필상(尹弼商)도원수로 삼아 압록강을 건너 건주야인(建州野人)의 본거지를 정벌하였고, 1491년에는 함경도관찰사 허종(許倧)을 도원수로 삼아 2만4천의 군사로 두만강을 건너 ‘우디거’의 모든 부락을 정벌하게 하여 국초부터 빈번히 침입하는 야인의 소굴을 소탕하였다.

이렇게 하여 태조 이후 닦아온 조선왕조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기반과 체제를 완성시켰으니 그의 묘호(廟號)가 후일 성종으로 정해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태평의 난숙에 따라 퇴폐의 풍이 한쪽에서 싹트고 왕 자신도 유흥에 빠지는가 하면 회뢰(賄賂)가 성행하였으며, 규방(閨房)의 일로 물의를 일으켜 폐비 윤씨사건은 급기야 정쟁의 불씨를 불러 일으키게까지 하였다.

그는 세 왕비와 여덟 후궁에게서 아들 19인과 딸 11인을 낳았는데, 제10대왕 연산군은 폐비 윤씨의 아들이며 제11대 중종이 된 진성대군 역(晉城大君懌)정현왕후 윤씨의 아들이었다. 능은 선릉(宣陵)으로 광주(廣州)에 있었는데 현재는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능과 함께 있다.

시호는 강정(康靖)이다.

[참고문헌]

世祖實錄
睿宗實錄
成宗實錄
璿源系譜

[집필자]

이성무(李成茂)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