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지(鄭麟趾)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815C778C9C0B1396X0 |
자(字) | 백저(伯雎) |
호(號) | 학역재(學易齋) |
시호(諡號) | 문성(文成) |
생년 | 1396(태조 5) |
졸년 | 1478(성종 9)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하동(河東)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정흥인(鄭興仁) |
외조부 | 진천의(陳千義) |
저서 | 『학역재집』 |
공신호 | 좌익공신(佐翼功臣) |
공신호 | 익대공신(翊戴功臣) |
공신호 | 좌리공신(佐理功臣) |
[관련정보]
[상세내용]
정인지(鄭麟趾)
1396년(태조 5)∼1478년(성종 9).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백저(伯雎), 호는 학역재(學易齋).
1. 가계와 태종‧문종대의 관력 및 업적
부친은 석성현감(石城縣監) 증영의정부사(贈領議政府事) 정흥인(鄭興仁)이며, 모친은 진천의(陳千義)의 딸이다. 권우(權遇)의 문인이다.
1411년(태종 11)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414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예빈시주부(禮賓寺注簿)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예문관부교리에 개수(改授)되고, 이어 감찰‧예조좌랑을 역임하였다.
1418년(세종 즉위) 8월 병조좌랑을 거쳐 1421년(세종 3)에는 상왕(上王: 태종)의 “대임을 맡길만한 인물이니 중용하라. “는 요청과 함께 병조정랑에 승직되고, 이후 세종의 신임을 받으면서 이조‧예조의 정랑을 역임하였다.
1424년 집현전관(集賢殿官)에 뽑히면서 응교에 제수되고, 다음해 직전(直殿)에 승진되었다.
1427년 문과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다시 직제학에 승진, 곧 세자시강원좌필선을 겸대한 뒤 다음해에는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면서 또다시 부제학에 승진되었다.
1430년 10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면서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 다음해에는 정초(鄭招)와 함께 대통력(大統曆)을 개정하고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을 저술하는 등 역법을 정비하였다.
1432년 예문관제학 겸 동지춘추관사(藝文館提學兼同知春秋館事), 1433년 2월 인수부윤(仁壽府尹), 같은해 6월 예문관제학이 되었다.
1434년 4월 이조좌참판에 발탁되고, 같은해 10월 다시 예문관제학을 거쳐 1435년 6월 충청도관찰사로 나간 뒤 다음해 9월 부상으로 사직하였다.
1437년 세종의 문운육성에 대한 관심과 함께 기복(起復)되어 예문관제학에 서용되고, 1439년에는 집현전제학이 된 뒤 곧 형조참판으로 옮겼다가 1440년 5월 정연(鄭淵)의 천거를 받아 형조판서에 발탁되었다.
같은해 11월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를 거쳐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42년 예문관대제학으로 『사륜요집(絲綸要集)』을 편찬하고, 이듬해 지중추원사로 당시에 찬‧반의 논의가 격렬하던 공법(貢法)을 극력 주장하여 그 실시를 확정하는 데 공헌하였으며,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의 제조(提調) 및 삼도도순찰사(三道都巡察使)로 파견되어 경상도‧전라도‧충청도의 전품(田品)을 분정(分定)하는 등 내‧외의 전제사를 주관하였다.
1445년 1월 우참찬이 되고, 그해 『치평요람(治平要覽)』을 찬진하였다. 다음해 예조판서를 거쳐 1447년에는 이조판서가 된 뒤 지춘추관사가 되어 『태조실록』을 증수(增修)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한편 전라도에 파견되어 전품을 다시 상정하였다.
1449년 공조판서를 거쳐 1450년(문종 즉위) 좌참찬이 되고, 1451년 김종서(金宗瑞) 등과 함께 『고려사』를 개찬(改撰)하였고, 이듬해 김종서 등과 함께 다시 『고려사절요』를 편찬하였다.
1411년(태종 11)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414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예빈시주부(禮賓寺注簿)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예문관부교리에 개수(改授)되고, 이어 감찰‧예조좌랑을 역임하였다.
1418년(세종 즉위) 8월 병조좌랑을 거쳐 1421년(세종 3)에는 상왕(上王: 태종)의 “대임을 맡길만한 인물이니 중용하라. “는 요청과 함께 병조정랑에 승직되고, 이후 세종의 신임을 받으면서 이조‧예조의 정랑을 역임하였다.
1424년 집현전관(集賢殿官)에 뽑히면서 응교에 제수되고, 다음해 직전(直殿)에 승진되었다.
1427년 문과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다시 직제학에 승진, 곧 세자시강원좌필선을 겸대한 뒤 다음해에는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면서 또다시 부제학에 승진되었다.
1430년 10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면서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 다음해에는 정초(鄭招)와 함께 대통력(大統曆)을 개정하고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을 저술하는 등 역법을 정비하였다.
1432년 예문관제학 겸 동지춘추관사(藝文館提學兼同知春秋館事), 1433년 2월 인수부윤(仁壽府尹), 같은해 6월 예문관제학이 되었다.
1434년 4월 이조좌참판에 발탁되고, 같은해 10월 다시 예문관제학을 거쳐 1435년 6월 충청도관찰사로 나간 뒤 다음해 9월 부상으로 사직하였다.
1437년 세종의 문운육성에 대한 관심과 함께 기복(起復)되어 예문관제학에 서용되고, 1439년에는 집현전제학이 된 뒤 곧 형조참판으로 옮겼다가 1440년 5월 정연(鄭淵)의 천거를 받아 형조판서에 발탁되었다.
같은해 11월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를 거쳐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42년 예문관대제학으로 『사륜요집(絲綸要集)』을 편찬하고, 이듬해 지중추원사로 당시에 찬‧반의 논의가 격렬하던 공법(貢法)을 극력 주장하여 그 실시를 확정하는 데 공헌하였으며,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의 제조(提調) 및 삼도도순찰사(三道都巡察使)로 파견되어 경상도‧전라도‧충청도의 전품(田品)을 분정(分定)하는 등 내‧외의 전제사를 주관하였다.
1445년 1월 우참찬이 되고, 그해 『치평요람(治平要覽)』을 찬진하였다. 다음해 예조판서를 거쳐 1447년에는 이조판서가 된 뒤 지춘추관사가 되어 『태조실록』을 증수(增修)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한편 전라도에 파견되어 전품을 다시 상정하였다.
1449년 공조판서를 거쳐 1450년(문종 즉위) 좌참찬이 되고, 1451년 김종서(金宗瑞) 등과 함께 『고려사』를 개찬(改撰)하였고, 이듬해 김종서 등과 함께 다시 『고려사절요』를 편찬하였다.
2. 단종‧세조대의 관력 및 업적
1455년(세조 1)세조의 즉위와 함께 영의정부사에 승진되고, 세자사(世子師)를 예겸(例兼)한 뒤 세조 즉위에 끼친 공로로 다시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1458년 공신연(功臣宴)을 베풀 때 세조의 불서간행을 반대한 일로 세조의 노여움을 사서 불경죄로 논죄되면서 고신(告身)이 몰수되었으나, 곧 고신을 환급받고 하동부원군에 제수되었다.
1459년 취중에 직간한 일이 국왕에게 무례를 범하였다고 논죄되면서 다시 고신을 몰수당하고 외방에 종편(從便)되었으나 그해에 다시 소환되어 고신을 환급받고, 그 이듬해에 하동부원군에 복직되었다.
1465년 나이 70을 이유로 치사(致仕)를 청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고 궤장(几杖)을 하사받았으며, 다음해 관제개혁으로 인한 부원군호의 군호로의 개칭과 함께 하동군(河東君)에 개봉(改封)되었다.
1458년 공신연(功臣宴)을 베풀 때 세조의 불서간행을 반대한 일로 세조의 노여움을 사서 불경죄로 논죄되면서 고신(告身)이 몰수되었으나, 곧 고신을 환급받고 하동부원군에 제수되었다.
1459년 취중에 직간한 일이 국왕에게 무례를 범하였다고 논죄되면서 다시 고신을 몰수당하고 외방에 종편(從便)되었으나 그해에 다시 소환되어 고신을 환급받고, 그 이듬해에 하동부원군에 복직되었다.
1465년 나이 70을 이유로 치사(致仕)를 청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고 궤장(几杖)을 하사받았으며, 다음해 관제개혁으로 인한 부원군호의 군호로의 개칭과 함께 하동군(河東君)에 개봉(改封)되었다.
3. 예종‧성종대의 관력
1468년(예종 즉위)남이(南怡)의 옥사에 끼친 공로로 다시 익대공신(翊戴功臣)3등에 책록되었으며, 1470년(성종 1) 부원군호의 복구와 함께 하동부원군에 개봉되고 경연영사(經筵領事)를 겸대하였다.
같은해 1467년(세조 13)에 설치된 국왕의 측근에서 원상에 임명되어 국정의 논의와 처결의 실권을 장악하였고, 1471년 성종 즉위에 끼친 공로로 또다시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1478년 성종의 호학 및 당시의 문운융성과 함께 연덕(年德)을 구비하고 명망이 높은 유학자를 삼로오갱(三老五更: 王師)으로 봉하여 문풍을 더한층 진작시키자는 논의와 함께 삼로에 선정되었다.
그러나 그 진봉식의 거행직전에 대간의 “한미한 가문에서 기신하였으나 식화(殖貨)에 전념하여 치부하였으니 불가하다.”라는 반대가 있었다.
비록 한명회(韓明澮) 등의 대신이 “정인지의 식화는 장리(長利)에 불과하였으니 큰 흠이 될 수 없다. “라고 하면서 그 실시를 주장하였지만, 결국은 진봉되지 못하였으며, 같은해에 하동부원군으로 죽었다.
같은해 1467년(세조 13)에 설치된 국왕의 측근에서 원상에 임명되어 국정의 논의와 처결의 실권을 장악하였고, 1471년 성종 즉위에 끼친 공로로 또다시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1478년 성종의 호학 및 당시의 문운융성과 함께 연덕(年德)을 구비하고 명망이 높은 유학자를 삼로오갱(三老五更: 王師)으로 봉하여 문풍을 더한층 진작시키자는 논의와 함께 삼로에 선정되었다.
그러나 그 진봉식의 거행직전에 대간의 “한미한 가문에서 기신하였으나 식화(殖貨)에 전념하여 치부하였으니 불가하다.”라는 반대가 있었다.
비록 한명회(韓明澮) 등의 대신이 “정인지의 식화는 장리(長利)에 불과하였으니 큰 흠이 될 수 없다. “라고 하면서 그 실시를 주장하였지만, 결국은 진봉되지 못하였으며, 같은해에 하동부원군으로 죽었다.
4. 공로
[참고문헌]
太宗實錄
世宗實錄
文宗實錄
端宗實錄
世祖實錄
睿宗實錄
成宗實錄
國朝榜目
海東名臣錄
新增東國輿地勝覽
燃藜室記述
淸選考
世宗實錄
文宗實錄
端宗實錄
世祖實錄
睿宗實錄
成宗實錄
國朝榜目
海東名臣錄
新增東國輿地勝覽
燃藜室記述
淸選考
[집필자]
한충희(韓忠熙)
대표명 | 정인지(鄭麟趾) |
명 | 인지(麟趾), 인지(獜趾), 인지(狑趾), 인지(蹸趾) |
봉호 | 정하동인지(鄭河東麟趾),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 |
성명 | 정상인지(鄭相麟趾), 정인지(鄭麟趾), 정인지(鄭獜趾), 정인지(鄭狑趾) |
시호 | 문성(文成), 문성공(文成公) |
자 | 백저(伯雎), 백휴(伯睢) |
호 | 학양제(學昜齊), 학역재(學易齋) |
명 : "인지(麟趾)"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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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