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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자덕(尹滋悳)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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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중수(仲樹)
호(號)국헌(菊軒)
시호(諡號)문헌(文獻)
생년1827(순조 27)
졸년1890(고종 27)
시대조선후기
본관파평(坡平)
활동분야문신 > 문신
윤주진(尹周鎭)

[상세내용]

윤자덕(尹滋悳)
1827년(순조 27)∼1890년(고종 2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중수(仲樹), 호는 국헌(菊軒). 목사 윤주진(尹周鎭)의 아들이다.

1848년(헌종 14)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여러 차례 청환(淸宦)의 벼슬을 역임하고 1858년(철종 9) 홍문관에서 관직을 얻었고 1861년 이조참의가 되었다.

이듬해 친제(親祭)시에 예방승지로 가자(加資)되었고 응교로서 옥당(玉堂)의 연차(聯箚)에도 참여하였다.

1866년(고종 3) 이조참판을 거쳐 1872년 사헌부대사헌지의금부사규장각직제학 등을 지냈다.

1874년 행호군에 이어 공조판서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우부빈객(右副賓客)의정부좌참찬을 역임한 뒤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로 나갔다.

1877년 광주유수로서의 치적이 현저하고 특히, 진정(賑政)에 힘써 민심을 안돈시킨 공로로 잉임(仍任)되었다가 다시 경기도관찰사 이재원(李載元)과 관직을 바꾸어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다음해 무위소제조(武衛所提調)시강원좌부빈객(侍講院左副賓客)을 지냈고 1879년에는 예문관제학홍문관제학을 거쳐 이조판서예조판서를 역임하였으며, 수릉친제(綬陵親祭) 때에는 찬례(贊禮)로 참석하여 가자되었다.

1880년 별궁영건당상(別宮營建堂上)을 맡아 별궁의 현광루상량문제술관(顯光樓上樑文製述官)으로 활동하여 가자되었다. 이해 수신사일본에 다녀와서 정부가 개화자강(開化自强)의 방침 아래 관제를 개혁하여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과 12사(司)를 설치할 때 상호군으로서 김보현(金輔鉉)김홍집(金弘集) 등과 함께 당상관(堂上官)이 되었고, 1881년 각 사에 당상관을 정식으로 배치하자 민겸호(閔謙鎬)군국변정기연당상(軍國邊政譏沿堂上)에 임명되었다.

이어 김보현 등과 경리통리기무아문사(經理統理機務衙門事)가 되고 판돈녕부사규장각제학을 역임하고 군물‧기계‧선함사(軍物機械船艦司)의 당상이 되었으며 판의금부사한성부판윤을 지냈다. 신사유람단이 귀국하여 관제를 재개편하고 12사를 7사로 할 때 전선사(典選司)와 통상사(通商司)의 당상경리사(堂上經理事)에 임명되는 등 개혁정권의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 때에는 군중에 의하여 가옥이 피습당하였으며 이어 선혜청제조독판군국사무(督辦軍國事務)판의금부사 등의 요직을 맡았다.

1883년 병조판서가 되었고, 홍문관제학판의금부사 등을 거쳐 1886년 형조판서에 임명되고, 홍문관제학독판내무부사(督辦內務府事)를 지낸 뒤 이듬해 수원부유수로서 외직에 나갔다.

1889년 정순왕후(貞純王后)와 대왕대비전의 옥책문제술관(玉冊文製述官)을 맡는 등 뛰어난 문재(文才)를 인정받았다.

1890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고 이해 사망하자 고종이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도록 하였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참고문헌]

憲宗實錄
哲宗實錄
高宗實錄
日省錄
承政院日記
國朝榜目
陰晴史

[집필자]

하원호(河元鎬)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