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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집(金弘集)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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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굉집(宏集)
자(字)경능(景能)
호(號)이정학재(以政學齋)
시호(諡號)충헌(忠獻)
생년1842(헌종 8)
졸년1896(건양 1)
시대조선후기
본관경주(慶州)
활동분야관료
김영작(金永爵)
5대조김주신(金柱臣)
묘소경기도 고양군 벽제면 대자리

[상세내용]

김홍집(金弘集)
1842년(헌종 8)∼1896년. 조선 말기의 관료‧정치가.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김굉집(金宏集), 자는 경능(景能), 호는 도원(道園)이정학재(以政學齋).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의 5대손이다. 개성부유수 김영작(金永爵)의 아들이며, 모친은 창녕성씨성혼(成渾)의 후손이다.
1. 관력
1867년(고종 4) 경과정시(慶科庭試)로 문과에 급제한 다음, 이듬해 승정원사변가주서(承政院事變假注書)에 임명되었다. 몇달 뒤 아버지의 상을 당하고, 이어 1870년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관직을 사직하고 약 5년간 거상(居喪)하였다.

1873년 복직하여 권지승문원부정(權知承文院副正)에 임명되었으며, 승문박사(承文博士)를 겸직하였다.

1875년 부사과(副司果)훈련도감종사관(從事官)을 지낸 뒤 약 3년간 흥양현감(興陽縣監)을 지내면서 백성과 정부의 신망을 받았다.

그 결과 내직으로 승진, 1877년 사과, 다음해 남학교수(南學敎授), 이어서 호조공조병조예조참의를 차례로 역임하였고, 1879년 돈녕도정(敦寧都正)을 지냈다.

1880년 일본인천개항, 공사주차(公使駐箚)와 해관세칙(海關稅則)의 요구 등 현안문제를 타결짓기 위한 제2차 수신사(修信使)로 임명되어 58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일본에 다녀왔다.

일본정부와의 협상에는 실패하였으나 황준헌(黃遵憲)『조선책략(朝鮮策略)』, 정관응(鄭觀應)『이언(易言)』을 가지고 돌아와 고종을 비롯한 위정자들의 개화정책 채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귀국한 뒤 예조참판으로 승진하였다.

1880년말 우리나라에 온 일본 변리공사(辨理公使) 하나부사(花房義質)와 인천개항문제를 협의, 20개월 뒤에 인천을 개항한다는 데 합의하였다. 아울러 정부가 개화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중추적인 기구로서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하자, 12월 통상관계를 전담하는 당상경리사(堂上經理事)에 발탁되었다.

1881년 위정척사운동(衛正斥邪運動)이 격화되면서 보수유생들로부터 집중적인 비난을 받았다. 이 때문에 여러 차례 사직소를 올린 끝에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얼마 뒤 통리기무아문이 개편되면서 통상사당상(通商司堂上)에 임명되었다.

1882년 3월과 5월 사이 미국영국독일과 차례로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할 때 조약체결을 담당한 전권대신들의 부관으로 협상의 실무책임을 맡았다.

4월 부제학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호조참판공조참판경기감사를 역임하였다.

특히, 임오군란의 사후수습책으로 정부에서 일본청나라와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 및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할 때에도 전권부관으로 임명되어 협상의 실무책임을 맡았다.

그뒤 1883년 8월 규장각직제학을 거쳐 1884년초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역임한 다음 9월에 예조판서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를 겸임함으로써 대외교섭의 최고책임자가 되었다.
2. 갑오경장 주도
그는 온건개화파로서 중도개혁노선을 견지했는데, 급진개화파의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직후 조정에서 그 뒷수습을 담당할 적임자로 선택되어 좌의정 겸 외무독판(外務督辦)의 중직을 맡아 1885년초 일본과 한성조약을 체결하였다.

그해 판중추부사라는 한직에 물러나 있다가, 1887년 재차 좌의정으로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였다.

1889년 수원부유수로 밀려나 그곳에서 일어난 민요(民擾) 때문에 곤경에 처하였다.

1894년 봄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계기로 청‧일 양국군이 우리나라에 진주하자 총리교섭통상사무(總理交涉通商事務)에 임명되어 고종에게 민심수습과 내정개혁의 필요성을 상주하였다.

그해 7월 일제는 왕궁을 기습, 점령하고 대원군을 앞세워 청나라의 세력을 배경으로 한 민씨척족정권을 타도하고 내정개혁을 하도록 강요하였다. 이어서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가 신설되자 영의정이었던 그는 군국기무처총재관에 임명되었다.

그뒤 12월 군국기무처가 해체될 때까지 그는 제1차갑오경장을 주도하였는바 과거제 폐지, 새로운 관리임용법의 채용, 은본위(銀本位)신식화폐제도의 채택, 의정부궁내부의 관제 시행, 새로운 도량형제도의 채택 등 약 210건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어 박영효(朴泳孝)와의 연립내각이 수립되자, 내정개혁의 목표로서 「홍범 14조」를 발표하여 제2차갑오경장을 실시하였다. 이때 의정부내각으로, 각 아문부(部)로 개편되고 7부의 제정, 군제개편 등의 개혁이 있었다. 그러나 재정 궁핍으로 개혁이 중단된 동안 박영효와의 갈등, 수구파와 급진파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총재직을 사임하였고, 1895년 박정양(朴定陽)박영효의 연립내각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박영효의 역모사건이 드러나 박영효일본으로 망명하자, 재차 입각하여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고 제3차갑오경장을 추진하였다. 이 내각은 친미(親美)‧친로파(親露派)와 제휴하였다.

이때 명성황후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함으로써 열세에 몰린 일본은 1895년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김홍집내각은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시종 반일‧반외세의 처지에 있던 대다수 국민의 지지를 상실하였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김홍집내각이 붕괴, 친로정권이 수립되자 ‘왜대신(倭大臣)’으로 지목되어 광화문 앞에서 군중들에 의하여 타살되었다.

1910년 충헌(忠獻)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묘지는 경기도 파주군 임진면에 있었으나, 6‧25남침 뒤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 대자리로 이장하였다.

유고집으로 『김총리유고(金總理遺稿)』가 있다.

[참고문헌]

以政學齋日錄
大韓季年史
梅泉野錄
續陰晴史
修信使行記錄
韓國痛史(朴殷植, 大同編譯局, 1915)
金弘集遺稿(高麗大學校出版部, 1976)
開化期의 金總理(道園相公記念事業推進委員會, 1978)
庚辰修信使金弘集과 黃遵憲著 ‘朝鮮策略’에 關한 再檢討(李瑄根, 東亞論叢 1, 1963)
列强角逐의 祭物 金弘集(李瑄根, 人物韓國史 7, 信和出版社, 1977)
金弘集의 生涯와 開化思想(鄭濟愚, 史學硏究 36, 1983)

[집필자]

유영익(柳永益)
대표명김홍집(金弘集)
홍집(弘集)
성명김홍집(金弘集)
시호충헌(忠獻)
이명굉집(宏集)

명 : "홍집(弘集)"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東宮日錄v13講無異矣上曰原任大臣同爲入侍舜澤曰兩殿駕臨春坊特賜法醞珍饌是稀有之盛擧天氣暢佳勞動餘睿體若何余曰一樣弘集曰大駕臨幸宣醞宮官我邸下侍座開講睿學日就不勝慶祝之忱矣予曰今日盛擧予亦慶祝矣炳始曰今日盛擧乃罕有之慶
東宮日錄v17御已爲多日連請復膳尙靳開納臣等憂慮已不容達而伏想睿衷尤切焦迫頻頻仰請期回聖聽千萬顒祝余曰當竭誠仰請也弘集曰方纔承候于大殿仰覸聖敎孝出天哀慟左右下情不勝憂慮伏想睿衷尤切焦迫矣自內必已請復常膳而益加盡誠仰勉則
東宮日錄v18自內仰請屢承謙柳之聖敎故將如是疏請大臣賓客輪覽可也舜澤曰敬覽疏本辭旨懇摯睿誠所格庶幾感回我聖上謙衷矣弘集曰伏讀疏本尤切顒祝矣炳始曰辭旨如是懇摯以我聖上止慈之念必有孚格矣秉世曰睿誠藹然於言辭之表矣余曰亟蒙兪
東宮日錄v18下顯揚頌禱之情也臣等盡▣晝宵攢企之情也庶民祈祝顒望之情也今此陳疏仰請其於睿孝尤有光焉祗不勝萬萬欽頌矣弘集曰來歲莫大之慶竝溱於一時此實國朝罕有之盛會也以我邸下知年祝岡之誠飾慶之典方欲陳疏仰請聖德益彰睿孝有光
東宮日錄v18乎上曰然矣弘集曰中庸致中和而位育乃聖人之極工也睿學於此益躋高明尤切顒祝矣上曰今日眞是冬令而風寒頗甚矣弘集曰今日乃今冬最寒之日也此時臨殿恐欠節宣之宜卽爲還內是臣區區之望也上曰當如是矣仍敎曰凡陳賀時頒敎卽宣敎
東宮日錄v18太孫行禮條俱無此儀節則禮曹儀註亦宜倣此釐正故禮堂使之來待矣皇明典禮旣無此儀節則其在從周之義允合遵用矣弘集曰臣等雖未考見禮書而今承聖敎此可以爲據矣上命禮堂進前敎曰纔有詢議於大臣而凡陳賀儀註中王世子王世孫行禮
東宮日錄v18孟子一部乃遏人欲存天理工夫也舜澤曰此書在四書中卷帙最大矣判府事金弘集曰東宮繼講當以中庸爲之乎上曰然矣弘集曰中庸致中和而位育乃聖人之極工也睿學於此益躋高明尤切顒祝矣上曰今日眞是冬令而風寒頗甚矣弘集曰今日乃今
東宮日錄v21訖仍陞座奉手批傳示大臣余曰今蒙允從之批敎萬萬慶幸矣舜澤等奉覽訖舜澤曰伏奉勉從之批旨伏想睿衷益切慶祝矣弘集曰睿誠仰格兪音遄宣而辭敎蕩然兼示省約之意尤切欽誦矣炳始曰奉承兪音伏想睿衷慶祝而批敎中亦有所仰體聖意者
東宮日錄v21欽誦萬萬矣余出示疏本曰諸大臣輪覽也舜澤等敬覽訖舜澤曰伏覽疏本文字懇摯又可以仰格聰聽尤用欣祝恭俟兪音矣弘集曰疏辭懇摯不勝欽誦此非張大之擧則庶可以蒙兪矣炳始曰辭旨懇摯庶期孚格只切顒祝矣秉世曰辭旨若是懇擧兪音冞
春坊日記v20乎果無以強從爾其諒之讀訖更令大臣入對令曰伏奉批答又未蒙允益切悶菀矣舜澤曰申請而又未蒙兪下情去益抑菀矣弘集曰連章顒企之中又未蒙兪群情轉益缺望矣炳始曰又未承允批伏想睿衷尤切悶菀矣秉世曰伏想睿衷悶迫而下情莫不折
春坊日記v20疏靳允不勝悶鬱又將疏請矣仍下疏本輪示訖舜澤曰今又伏覽疏本辭旨愈往篤摰尤仰睿衷悶迫而亦豈無上天之孚格乎弘集曰臣等昨日求對備奏邸下懇摰之誠則聖衷早已覽燭而今又伏覽疏本若是申懇庶可冀其回聽矣炳始曰伏想邸下顒祝之
春坊日記v20衷悶迫而下情莫不折菀矣令曰未蒙允兪明日當率百官庭請矣舜澤曰伏承明日庭請之敎徹啓之後似當有處分以是蘄祝弘集曰今承明日庭請之敎有以仰睿孝之愈切而亦在廷臣僚之所同聲願祝者也炳始曰明日庭請邸下必致勞動又切憧憧矣秉
春坊日記v22從爾其諒之讀訖更令大臣入對令曰伏奉批答快蒙允從余心慶幸矣仍出批旨輪示大臣賓客訖舜澤曰伏覽批旨愈切慶祝弘集曰兪音遄降懽忭何達炳始曰此莫非睿孝攸格而臣等躬覩爲榮矣秉世曰伏想睿衷尤爲慶祝矣舜澤曰邸下旣竝進箋文表
春坊日記v22筵敎伏想睿衷極其憧憧而日間諸節果若何邸下曰未盡康復矣炳始曰何湯劑連爲煎進乎邸下曰正氣天香湯連爲煎進矣弘集曰暑熱如此下情尤切憧憧矣舜澤曰睿體若何邸下曰一様矣舜澤曰臣等承令來待矣邸下曰今年慶祝異於他年而千秋慶
春坊日記v22四旬之慶年而慶節又在是月以我殿下愛日祝岡之誠竝進箋文表裏賁飾晟典允叶情又今承下詢臣等不勝攢煩懽忭之至弘集曰聖壽與天無極睿誠維日不足年年慶會躬覩盛典臣等慶忭歡祝之忱何可形達乎炳始曰惟我邸下孝思肫篤又以是年是
春坊日記v22疏請尤仰睿孝之篤摯矣邸下出示疏草敎曰將如是陳請恭俟兪音矣舜澤曰伏覽疏草睿誠溢於行墨之間豈不孚格天心乎弘集曰疏辭極其懇摯況有昨年已行之禮必當卽蒙允兪矣炳始曰疏本捧覽尤不勝忭祝之忱秉世曰亟蒙兪音是所顒祝邸下令
春坊日記v22何可以言語形達而從前亞歲今辰每稱來年之慶矣今聆睿敎益頌睿誠將見茀祿川至永迓萬億洪休臣等彌切歡抃之忱矣弘集曰年年此日承此識慶之睿敎臣等歡忭年年益切而況來年莫大慶會之荐湊乎聖曆彌長睿孝愈彰將於亞歲先覩盛擧惟攢
春坊日記v22勉從慶幸萬萬矣仍出疏批輪示大臣訖舜澤曰伏奉勉從之批旨睿衷益切慶祝而是禮也亦紹述之典也群情尤不勝歡忭矣弘集曰批旨準請尤爲慶忭矣炳始曰顒祝之餘不勝慶幸矣秉世曰誠孝所感批旨勉從睿衷慶祝群情忻矣範朝曰陳請勉從慈孝
春坊日記v22喜之典睿孝深光群忱胥忭不勝攢祝之至邸下下疏本曰將如是陳請恭俟兪音矣舜澤曰睿孝肫篤辭旨懇摯庶可以孚格矣弘集曰伏覽疏本愈功慶祝而此非張大之擧則庶可以蒙兪矣炳始曰辭旨懇到必知有孚格是庸顒祝而此是繼述之盛德也秉世
春坊日記v22此邸下顯揚頌禱之情也臣等晝宵攢企之情也庶民祈祝顒望之情也今此陳疏仰請其於睿孝尤有光焉秪不勝萬萬欽誦矣弘集曰來歲莫大之慶竝湊於一時此實國朝罕有之盛會也以我邸下知年祝岡之誠飾慶之典方欲陳疏仰請聖德益彰睿孝有光
春坊日記v22竢之中未蒙兪音伏想睿衷悶菀矣臣等方欲請對于大殿謹將睿敎辭意備達仰請矣令曰卿等善爲稟達期蒙允兪是所深祝弘集曰顒若之中不勝悶鬱而伏覽批旨勸勉睿學伏願邸下益勤講學則聖心嘉悅而孚格矣令曰未能仰承聖意恒切憧憧邸下令
春坊日記v22自內迎請屢承謙抑之聖敎故將如是疏請大臣賓客輪覽可也舜澤曰敬覽疏本辭旨懇摯睿誠所格庶幾感回我聖上謙衷矣弘集曰伏讀疏本尤切顒祝矣炳始曰辭旨如是懇摯以我聖上止慈之念必有孚格矣秉世曰睿誠藹然於言辭之表矣邸下曰亟蒙
春坊日記v22衷更爲悶迫矣秉世曰伏覽批敎去益悶鬱矣令曰將於明日率百官庭請矣舜澤曰今承明日庭請之敎有以仰睿誠之切至矣弘集曰睿孝篤摯有此庭請之敎亦在庭臣僚之所共願祝也炳始曰天寒如此明日庭請時觸冒勞動下情預爲憧憧矣秉世曰明日
春坊日記v22從之理爾其諒之讀訖更令大臣入對邸下曰再疏伏奉批旨未蒙允兪下情轉益悶迫矣舜澤曰又未蒙允兪下情轉益抑鬱矣弘集曰顒企之中群忱尤爲缺望矣炳始曰伏想睿衷更爲悶迫矣秉世曰伏覽批敎去益悶鬱矣令曰將於明日率百官庭請矣舜澤
春坊日記v22大臣賓客輪覽可也輪示奉覽訖舜澤曰臣等昨於入侍備奏睿孝肫篤之誠矣今又伏見疏本愈往懇摯竊揣聖衷必當感回矣弘集曰睿誠愈往愈摯臣等尤切顒祝矣炳始曰伏想自內連爲仰請而又此封章度望孚格矣秉世曰早蒙愈兪音是切顒望矣邸下
春坊日記v23內時時仰勉區區所望矣令曰當益加仰勉矣仍令大臣就座弘集曰沈判府事以脚痛今日承候未得入來矣令曰不至甚苦乎弘集曰似因昨日勞碌而然矣令曰大臣先退仍令原任賓客李鎬俊進前鎬俊進前令曰何日上京乎鎬俊曰十四日入城矣令曰連
春坊日記v23深而大殿哀毀過度下情不勝悶迫炳德曰哀毀連爲過度而又將幸行勞動必多區區下忱尤不勝伏慮之至答曰下情憧憧矣弘集進前達曰孝慕殿祥事已過昨又謁陵勞動之餘大殿聖體若何令曰萬安矣弘集曰邸下亦爲連日勞動矣睿體若何令曰一樣
春坊日記v23尤致愆今日群下所顒祝者惟在敢於保護寬譬而已伏願邸下自內時時仰勉區區所望矣令曰當益加仰勉矣仍令大臣就座弘集曰沈判府事以脚痛今日承候未得入來矣令曰不至甚苦乎弘集曰似因昨日勞碌而然矣令曰大臣先退仍令原任賓客李鎬
春坊日記v23安矣弘集曰邸下亦爲連日勞動矣睿體若何令曰一樣矣仍令曰孝慕殿祥事奄過曷勝愴而兩聖連日哀毀過度下情焦悶矣弘集曰臣等多日參班謁陵亦爲從邁伏覩聖慕無窮哀痛左右下情尙切悶迫中宮殿連日哀慕諸節無損乎令曰萬安矣炳始曰兩
春坊日記v23區區下忱尤不勝伏慮之至答曰下情憧憧矣弘集進前達曰孝慕殿祥事已過昨又謁陵勞動之餘大殿聖體若何令曰萬安矣弘集曰邸下亦爲連日勞動矣睿體若何令曰一樣矣仍令曰孝慕殿祥事奄過曷勝愴而兩聖連日哀毀過度下情焦悶矣弘集曰臣
進饌儀軌v2厥有彛典 盈庭百官匝域萬民之所共抃頌 莫不鼓舞於壽域之中 摟指以俟今日者也 伏願亟降成命 涓吉擧行焉弘集曰 惟我東朝殿下 寶齡彌卲 純嘏無疆 此誠國家罕有之大慶 迺以飾喜之聖孝 勉回執謙之慈衷 誕擧彛典
進饌儀軌v2上表裏致詞箋文於大王大妃殿矣 吿布之節 令儀曹依例磨鍊舜澤曰 揚號吿布 次第有命 臣等尤不任慶祝之至弘集曰 又承元朝稱慶之敎節文備至 尤切慶祝矣炳始曰 乃於元朝呼嵩之禮 亦我聖上祝岡之誠矣上曰 以予懽祝之
進饌儀軌v2 磨鍊諸般儀節 令各該司預爲準備舜澤曰大王大妃殿恤民之念 伏不勝欽仰萬萬 而承順養志 益有光於聖孝矣弘集曰 以我聖上識喜之誠 宜於豐豫之節 靡不用極 而沖挹之慈德承順之宸孝 兩盡其美 尤有光焉 曷任欽頌萬
韓史綮v3緖六年春遣承旨金弘集修信于日本弘集於日本得淸人黃遵憲所作朝鮮策策中所言皆勸朝鮮改革政治兼通各國者也夏弘集還以其策進于王慶尙道儒生李晩遜聞之糾萬人伏闕上斥洋疏請斬弘集左贊成閔台鎬招晩遜諭以禍福晩遜懼改疏辭稍
韓史綮v3策策中所言皆勸朝鮮改革政治兼通各國者也夏弘集還以其策進于王慶尙道儒生李晩遜聞之糾萬人伏闕上斥洋疏請斬弘集左贊成閔台鎬招晩遜諭以禍福晩遜懼改疏辭稍婉王賜溫批以退之○以申應朝爲吏曹判書應朝欽之後也剛嚴有文學於
韓史綮v3庚辰十七年淸德宗光緖六年春遣承旨金弘集修信于日本弘集於日本得淸人黃遵憲所作朝鮮策策中所言皆勸朝鮮改革政治兼通各國者也夏弘集還以其策進于王慶尙道儒生李晩遜
韓史綮v3使往見李鴻章與謀禦日本之事云○沈舜澤自知不爲時議所容辭職去以金炳始代爲領議政炳始又堅辭於是授金弘集自弘集出而大院君稍稍不預政焉○設軍國機務處以金弘集爲本處會議總裁官令與朴定陽金允植等諸議員共議改革之事○初
韓史綮v3戕王后欲掩其跡乃與趙羲淵謀使禹範善等仍屯軍禁中宣言王后自知負罪而出奔因劫金弘集等廢后曰否者內閣將血矣弘集等懼以其言告于王王不得已下勅廢之時內閣諸大臣惟朴定陽不署廢后勅辭職而退○時各國以閔后事有嘖言於日本日
韓史綮v3軍部大臣趙羲淵犯本部贓弘集令內閣總書兪吉濬驗之無實弘集面責泳孝泳孝怒見王言弘集黨護羲淵王信之罷羲淵故弘集不自安自劾而退○改外官制分全國爲二十三府三百三十一郡府置觀察使郡置守○時王外爲日本所持內爲憲政所縛不
韓史綮v3五月金弘集罷以朴定陽代爲總理大臣時朴泳孝悞聽人言謂軍部大臣趙羲淵犯本部贓弘集令內閣總書兪吉濬驗之無實弘集面責泳孝泳孝怒見王言弘集黨護羲淵王信之罷羲淵故弘集不自安自劾而退○改外官制分全國爲二十三府三百三十一
韓史綮v3總理大臣時朴泳孝悞聽人言謂軍部大臣趙羲淵犯本部贓弘集令內閣總書兪吉濬驗之無實弘集面責泳孝泳孝怒見王言弘集黨護羲淵王信之罷羲淵故弘集不自安自劾而退○改外官制分全國爲二十三府三百三十一郡府置觀察使郡置守○時王
韓史綮v3部大臣嚴世永官員起復自此始○五月金弘集罷以朴定陽代爲總理大臣時朴泳孝悞聽人言謂軍部大臣趙羲淵犯本部贓弘集令內閣總書兪吉濬驗之無實弘集面責泳孝泳孝怒見王言弘集黨護羲淵王信之罷羲淵故弘集不自安自劾而退○改外官
韓史綮v3兪吉濬趙羲淵張博鄭秉夏五人弘集秉夏被捕斬死吉濬等三人逃之日本禹範善李斗璜以下凡涉閔后之事者皆踵而隨之弘集有文學廉淸敏幹爲外人所重方被捕時左右勸逃弘集曰死耳安能爲朴泳孝輩之所爲乎遂閉目不復開而死○魚允中歸鄕
韓史綮v3濬等三人逃之日本禹範善李斗璜以下凡涉閔后之事者皆踵而隨之弘集有文學廉淸敏幹爲外人所重方被捕時左右勸逃弘集曰死耳安能爲朴泳孝輩之所爲乎遂閉目不復開而死○魚允中歸鄕至龍仁縣縣之士族有鄭元老者嘗辱允中族人族人訴
韓史綮v3夜請大院君入闕遂潛同大院君出至俄羅斯使館下詔罷內閣諸臣職隨遣警務官捕金弘集兪吉濬趙羲淵張博鄭秉夏五人弘集秉夏被捕斬死吉濬等三人逃之日本禹範善李斗璜以下凡涉閔后之事者皆踵而隨之弘集有文學廉淸敏幹爲外人所重方
韓史綮v3秉世尋辭去○以權在衡爲農商工部大臣在衡爲人奸細爲內閣總書時數以金弘集等動靜密報于帝以爲觀望之計及帝除弘集等以在衡爲有功柄用之時人爲之語曰附心附肝權在衡後改名重顯○以金永準爲警務使永準輔鉉之庶子也以善賣官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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