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집(金弘集)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AE40D64DC9D1B1842X0 |
이명(異名) | 굉집(宏集) |
자(字) | 경능(景能) |
호(號) | 이정학재(以政學齋) |
시호(諡號) | 충헌(忠獻) |
생년 | 1842(헌종 8) |
졸년 | 1896(건양 1)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경주(慶州) |
활동분야 | 관료 |
부 | 김영작(金永爵) |
5대조 | 김주신(金柱臣) |
묘소 |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 대자리 |
[관련정보]
[상세내용]
김홍집(金弘集)
1842년(헌종 8)∼1896년. 조선 말기의 관료‧정치가.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김굉집(金宏集), 자는 경능(景能), 호는 도원(道園)‧이정학재(以政學齋).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의 5대손이다. 개성부유수 김영작(金永爵)의 아들이며, 모친은 창녕성씨로 성혼(成渾)의 후손이다.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의 5대손이다. 개성부유수 김영작(金永爵)의 아들이며, 모친은 창녕성씨로 성혼(成渾)의 후손이다.
1. 관력
1867년(고종 4) 경과정시(慶科庭試)로 문과에 급제한 다음, 이듬해 승정원사변가주서(承政院事變假注書)에 임명되었다. 몇달 뒤 아버지의 상을 당하고, 이어 1870년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관직을 사직하고 약 5년간 거상(居喪)하였다.
1873년 복직하여 권지승문원부정(權知承文院副正)에 임명되었으며, 승문박사(承文博士)를 겸직하였다.
1875년 부사과(副司果)‧훈련도감‧종사관(從事官)을 지낸 뒤 약 3년간 흥양현감(興陽縣監)을 지내면서 백성과 정부의 신망을 받았다.
그 결과 내직으로 승진, 1877년 사과, 다음해 남학교수(南學敎授), 이어서 호조‧공조‧병조‧예조참의를 차례로 역임하였고, 1879년 돈녕도정(敦寧都正)을 지냈다.
1880년 일본의 인천개항, 공사주차(公使駐箚)와 해관세칙(海關稅則)의 요구 등 현안문제를 타결짓기 위한 제2차 수신사(修信使)로 임명되어 58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일본에 다녀왔다.
일본정부와의 협상에는 실패하였으나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 정관응(鄭觀應)의 『이언(易言)』을 가지고 돌아와 고종을 비롯한 위정자들의 개화정책 채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귀국한 뒤 예조참판으로 승진하였다.
1880년말 우리나라에 온 일본 변리공사(辨理公使) 하나부사(花房義質)와 인천개항문제를 협의, 20개월 뒤에 인천을 개항한다는 데 합의하였다. 아울러 정부가 개화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중추적인 기구로서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하자, 12월 통상관계를 전담하는 당상경리사(堂上經理事)에 발탁되었다.
1881년 위정척사운동(衛正斥邪運動)이 격화되면서 보수유생들로부터 집중적인 비난을 받았다. 이 때문에 여러 차례 사직소를 올린 끝에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얼마 뒤 통리기무아문이 개편되면서 통상사당상(通商司堂上)에 임명되었다.
1882년 3월과 5월 사이 미국‧영국‧독일과 차례로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할 때 조약체결을 담당한 전권대신들의 부관으로 협상의 실무책임을 맡았다.
4월 부제학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호조참판‧공조참판‧경기감사를 역임하였다.
특히, 임오군란의 사후수습책으로 정부에서 일본 및 청나라와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 및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할 때에도 전권부관으로 임명되어 협상의 실무책임을 맡았다.
그뒤 1883년 8월 규장각직제학을 거쳐 1884년초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역임한 다음 9월에 예조판서와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를 겸임함으로써 대외교섭의 최고책임자가 되었다.
1873년 복직하여 권지승문원부정(權知承文院副正)에 임명되었으며, 승문박사(承文博士)를 겸직하였다.
1875년 부사과(副司果)‧훈련도감‧종사관(從事官)을 지낸 뒤 약 3년간 흥양현감(興陽縣監)을 지내면서 백성과 정부의 신망을 받았다.
그 결과 내직으로 승진, 1877년 사과, 다음해 남학교수(南學敎授), 이어서 호조‧공조‧병조‧예조참의를 차례로 역임하였고, 1879년 돈녕도정(敦寧都正)을 지냈다.
1880년 일본의 인천개항, 공사주차(公使駐箚)와 해관세칙(海關稅則)의 요구 등 현안문제를 타결짓기 위한 제2차 수신사(修信使)로 임명되어 58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일본에 다녀왔다.
일본정부와의 협상에는 실패하였으나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 정관응(鄭觀應)의 『이언(易言)』을 가지고 돌아와 고종을 비롯한 위정자들의 개화정책 채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귀국한 뒤 예조참판으로 승진하였다.
1880년말 우리나라에 온 일본 변리공사(辨理公使) 하나부사(花房義質)와 인천개항문제를 협의, 20개월 뒤에 인천을 개항한다는 데 합의하였다. 아울러 정부가 개화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중추적인 기구로서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하자, 12월 통상관계를 전담하는 당상경리사(堂上經理事)에 발탁되었다.
1881년 위정척사운동(衛正斥邪運動)이 격화되면서 보수유생들로부터 집중적인 비난을 받았다. 이 때문에 여러 차례 사직소를 올린 끝에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얼마 뒤 통리기무아문이 개편되면서 통상사당상(通商司堂上)에 임명되었다.
1882년 3월과 5월 사이 미국‧영국‧독일과 차례로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할 때 조약체결을 담당한 전권대신들의 부관으로 협상의 실무책임을 맡았다.
4월 부제학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호조참판‧공조참판‧경기감사를 역임하였다.
특히, 임오군란의 사후수습책으로 정부에서 일본 및 청나라와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 및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할 때에도 전권부관으로 임명되어 협상의 실무책임을 맡았다.
그뒤 1883년 8월 규장각직제학을 거쳐 1884년초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역임한 다음 9월에 예조판서와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를 겸임함으로써 대외교섭의 최고책임자가 되었다.
2. 갑오경장 주도
그는 온건개화파로서 중도개혁노선을 견지했는데, 급진개화파의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직후 조정에서 그 뒷수습을 담당할 적임자로 선택되어 좌의정 겸 외무독판(外務督辦)의 중직을 맡아 1885년초 일본과 한성조약을 체결하였다.
그해 판중추부사라는 한직에 물러나 있다가, 1887년 재차 좌의정으로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였다.
1889년 수원부유수로 밀려나 그곳에서 일어난 민요(民擾) 때문에 곤경에 처하였다.
1894년 봄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계기로 청‧일 양국군이 우리나라에 진주하자 총리교섭통상사무(總理交涉通商事務)에 임명되어 고종에게 민심수습과 내정개혁의 필요성을 상주하였다.
그해 7월 일제는 왕궁을 기습, 점령하고 대원군을 앞세워 청나라의 세력을 배경으로 한 민씨척족정권을 타도하고 내정개혁을 하도록 강요하였다. 이어서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가 신설되자 영의정이었던 그는 군국기무처총재관에 임명되었다.
그뒤 12월 군국기무처가 해체될 때까지 그는 제1차갑오경장을 주도하였는바 과거제 폐지, 새로운 관리임용법의 채용, 은본위(銀本位)신식화폐제도의 채택, 의정부와 궁내부의 관제 시행, 새로운 도량형제도의 채택 등 약 210건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어 박영효(朴泳孝)와의 연립내각이 수립되자, 내정개혁의 목표로서 「홍범 14조」를 발표하여 제2차갑오경장을 실시하였다. 이때 의정부는 내각으로, 각 아문은 부(部)로 개편되고 7부의 제정, 군제개편 등의 개혁이 있었다. 그러나 재정 궁핍으로 개혁이 중단된 동안 박영효와의 갈등, 수구파와 급진파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총재직을 사임하였고, 1895년 박정양(朴定陽)‧박영효의 연립내각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박영효의 역모사건이 드러나 박영효가 일본으로 망명하자, 재차 입각하여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고 제3차갑오경장을 추진하였다. 이 내각은 친미(親美)‧친로파(親露派)와 제휴하였다.
이때 명성황후가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함으로써 열세에 몰린 일본은 1895년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김홍집내각은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시종 반일‧반외세의 처지에 있던 대다수 국민의 지지를 상실하였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김홍집내각이 붕괴, 친로정권이 수립되자 ‘왜대신(倭大臣)’으로 지목되어 광화문 앞에서 군중들에 의하여 타살되었다.
1910년 충헌(忠獻)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묘지는 경기도 파주군 임진면에 있었으나, 6‧25남침 뒤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 대자리로 이장하였다.
유고집으로 『김총리유고(金總理遺稿)』가 있다.
그해 판중추부사라는 한직에 물러나 있다가, 1887년 재차 좌의정으로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였다.
1889년 수원부유수로 밀려나 그곳에서 일어난 민요(民擾) 때문에 곤경에 처하였다.
1894년 봄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계기로 청‧일 양국군이 우리나라에 진주하자 총리교섭통상사무(總理交涉通商事務)에 임명되어 고종에게 민심수습과 내정개혁의 필요성을 상주하였다.
그해 7월 일제는 왕궁을 기습, 점령하고 대원군을 앞세워 청나라의 세력을 배경으로 한 민씨척족정권을 타도하고 내정개혁을 하도록 강요하였다. 이어서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가 신설되자 영의정이었던 그는 군국기무처총재관에 임명되었다.
그뒤 12월 군국기무처가 해체될 때까지 그는 제1차갑오경장을 주도하였는바 과거제 폐지, 새로운 관리임용법의 채용, 은본위(銀本位)신식화폐제도의 채택, 의정부와 궁내부의 관제 시행, 새로운 도량형제도의 채택 등 약 210건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어 박영효(朴泳孝)와의 연립내각이 수립되자, 내정개혁의 목표로서 「홍범 14조」를 발표하여 제2차갑오경장을 실시하였다. 이때 의정부는 내각으로, 각 아문은 부(部)로 개편되고 7부의 제정, 군제개편 등의 개혁이 있었다. 그러나 재정 궁핍으로 개혁이 중단된 동안 박영효와의 갈등, 수구파와 급진파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총재직을 사임하였고, 1895년 박정양(朴定陽)‧박영효의 연립내각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박영효의 역모사건이 드러나 박영효가 일본으로 망명하자, 재차 입각하여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고 제3차갑오경장을 추진하였다. 이 내각은 친미(親美)‧친로파(親露派)와 제휴하였다.
이때 명성황후가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함으로써 열세에 몰린 일본은 1895년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김홍집내각은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시종 반일‧반외세의 처지에 있던 대다수 국민의 지지를 상실하였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김홍집내각이 붕괴, 친로정권이 수립되자 ‘왜대신(倭大臣)’으로 지목되어 광화문 앞에서 군중들에 의하여 타살되었다.
1910년 충헌(忠獻)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묘지는 경기도 파주군 임진면에 있었으나, 6‧25남침 뒤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 대자리로 이장하였다.
유고집으로 『김총리유고(金總理遺稿)』가 있다.
[참고문헌]
以政學齋日錄
大韓季年史
梅泉野錄
續陰晴史
修信使行記錄
韓國痛史(朴殷植, 大同編譯局, 1915)
金弘集遺稿(高麗大學校出版部, 1976)
開化期의 金總理(道園相公記念事業推進委員會, 1978)
庚辰修信使金弘集과 黃遵憲著 ‘朝鮮策略’에 關한 再檢討(李瑄根, 東亞論叢 1, 1963)
列强角逐의 祭物 金弘集(李瑄根, 人物韓國史 7, 信和出版社, 1977)
金弘集의 生涯와 開化思想(鄭濟愚, 史學硏究 36, 1983)
大韓季年史
梅泉野錄
續陰晴史
修信使行記錄
韓國痛史(朴殷植, 大同編譯局, 1915)
金弘集遺稿(高麗大學校出版部, 1976)
開化期의 金總理(道園相公記念事業推進委員會, 1978)
庚辰修信使金弘集과 黃遵憲著 ‘朝鮮策略’에 關한 再檢討(李瑄根, 東亞論叢 1, 1963)
列强角逐의 祭物 金弘集(李瑄根, 人物韓國史 7, 信和出版社, 1977)
金弘集의 生涯와 開化思想(鄭濟愚, 史學硏究 36, 1983)
[집필자]
유영익(柳永益)
명 : "홍집(弘集)"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
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