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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목(金思穆)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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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백심(伯深)
호(號)운소(雲巢)
시호(諡號)경헌(敬獻)
생년1740(영조 16)
졸년1829(순조 29)
시대조선후기
본관경주(慶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효대(金孝大)
묘소용인 소운리

[상세내용]

김사목(金思穆)
1740년(영조 16)∼1829년(순조 2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백심(伯深), 호는 운소(雲巢). 형조판서 김효대(金孝大)의 아들이다.

음보(蔭補)로 전랑(殿郞)에 제수되었으나, 그뒤 여러 차례 특지(特旨)로 김제군수가 되었다.

1772년(영조 48)에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홍문관부교리보덕(輔德)승정원동부승지를 거쳐, 1774년에는 승지가 되었다.

1783년(정조 7)에 대사간을 거쳐 이듬해 영조의 즉위 주갑(周甲)을 맞아 경은가(慶恩家)로 인정받아 병조참판에 승진되었다.

1784년 경기도관찰사를 거쳐 이듬해 대사헌총융사를 지낸 뒤, 이듬해 9월에는 형조참판이 되어 상왕대비의 호를 여러 대신들과 의논하였다.

1788년 황해도관찰사로 재직중 우택(雨澤)에 대한 장계를 늦게 올려 파직되었다.

1789년 다시 복직되어 대사간이 되고, 1790년 형조판서비변사유사당상(備邊司有司堂上)이 되었다. 같은해 경기도관찰사로 재직시 도사(都事) 송익효(宋翼孝)경기도의 서리가 조그만 잘못을 저질렀다 하여 곤장을 치는 남형을 행사하자, 왕에게 장계를 올려 그를 파직시켰다.

한편, 사도세자의 능을 수원으로 옮기면서 수원부사에 제수되었다.

그뒤 전라우수사 세번, 경기감사 일곱번, 총융사를 다섯번 역임한 뒤 이조판서에 제수되었다.

1800년 순조가 즉위한 뒤 병조판서예조판서한성부판윤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거쳐, 1808년 우의정, 1819년에 좌의정에 올랐다.

그뒤 왕세자에게 글을 가르쳤으며, 1828년에는 영중추부사군자감도제조를 역임하였다. 그는 천부적인 자질이 영민하고 성실하여 낮은 관직이라도 성심껏 봉사하였다. 묘당(廟堂)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제약(制約)과 법헌(法憲)을 스스로 준수함으로써 그 임무를 다하였다.

또한, 경장(更張)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검약을 생활신조로 삼았다. 그는 70년 동안 삼조(三朝)에 역사(歷事: 영조‧정조‧순조 세 임금의 신하가 됨.)를 하여 원로정승이 되었으며, 회방(回榜: 登科回甲)으로 궤장(几杖)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집에서 한가로이 있을 때에도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언제나 왕이 자문을 구하였다. 안일한 생활을 구하지 않는 교훈을 실천에 옮기면서 귀감으로 ‘무구실(無求室)’이라는 세 글자를 써서 액자로 걸어놓고는 교훈으로 삼았다. 묘는 용인 소운리에 있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純祖實錄
國朝榜目
經山集

[집필자]

손승철(孫承喆)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