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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빈(徐命彬)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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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질보(質甫)
시호(諡號)정간(靖簡)
생년1692(숙종 18)
졸년1763(영조 39)
시대조선중기
본관대구(大丘)
활동분야문신 > 문신
서종태(徐宗泰)

[상세내용]

서명빈(徐命彬)
1692년(숙종 18)∼1763년(영조 3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질보(質甫).

영의정 서종태(徐宗泰)의 아들이며, 서명균(徐命均)의 아우이다.

1723년(경종 3)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1727년(영조 3) 7월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다. 같은해 12월에는 박문수(朴文秀)조현명(趙顯命) 등과 함께 홍문관에 신록(新錄)되었으며, 이어서 홍문관교리가 되었다.

이듬해 2월 사간원헌납으로서 군주의 진지실천(眞知實踐)‧절검간약(節儉簡約)‧복어박소(服御朴素) 및 탕평(蕩平)에 대해 상소하였고, 그뒤 홍문관교리이조좌랑정랑직을 역임하였다.

1729년 4월 홍문관응교에 보임되었고, 같은해 6월 사간원사간으로서 대간과 승지와의 역할분담을 분명히 해 줄 것을 주청하였으며, 7월 조명익(趙明翼)황재(黃梓) 등과 더불어 지제교(知製敎)에 뽑혔다.

그뒤 응교승정원승지직을 번갈아 역임하였으며, 1733년 12월 홍문관부제학이 되었고, 이듬해 정월 부제학으로서 파당(破黨)에 대해 거론하였다.

같은해 2월 황해감사로 전보되었으나 부임을 하지 않아서 면직되었다.

그뒤 부제학‧승지‧이조참의경상감사개성유수 등의 관직을 역임하고, 1739년 2월 대사헌이 되었다. 같은해 5월 부제학이 되었는데 여러 유신들의 곡인소혐(曲引小嫌)에 의해 웅천현감(熊川縣監)으로 쫓겨났다가, 이듬해 2월 다시 부제학으로 임용되었다.

그뒤 대사간대사헌대사성형조참판예조참판형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1748년 7월 이조판서가 되었다.

같은해 12월 누차 소명을 어겼다는 대간의 탄핵으로 경주부윤으로 출보(黜補)되었으나 부제조(副提調) 유복명(柳復明)이 ‘그는 일찍이 경상감사를 역임한 바 있으며, 지금의 경주영장(慶州營將) 이윤성(李潤成)은 그의 비장이었던 인물이므로 타 지역으로 이보(移補)할 것’을 청하여 광주부윤(廣州府尹)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듬해 11월 대사헌에 임명되어 서울로 돌아왔으며, 그뒤 예조판서형조판서한성부판윤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우참찬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한때 이조판서에서 상주목사로 출보되었으나, 우의정 이천보(李天輔)가 그의 외보(外補)의 명을 거두어 줄 것을 청함으로써 지방에 가지 않게 되었다.

이 사건 이후 그는 형조판서이조판서광주유수한성부판윤을 역임하였으며, 1755년 9월 신만(申晩)이정보(李鼎輔) 등과 함께 복설(復設)된 찬수청(纂修廳)의 당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듬해 4월 영재(營財)를 이유로 파직되기도 하였으나, 다시 대사헌을 거쳐 판의금부사한성부판윤좌참찬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정간(靖簡)이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國朝榜目
淸選考

[집필자]

남인국(南仁國)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1-01-03문과방목과 大丘徐氏世譜(2003년 간행)를 참고하여 본관을 달성(達城)에서 대구(大丘)로 수정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