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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유(權尙游)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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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유도(有道)
호(號)구계(癯溪)
시호(諡號)정헌(正獻)
생년1656(효종 7)
졸년1724(경종 4)
시대조선중기
본관안동(安東)
활동분야문신 > 문신
권격(權格)
함평이씨(咸平李氏)
외조부이초로(李楚老)

[상세내용]

권상유(權尙游)
1656년(효종 7)∼1724년(경종 4).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계문(季文)유도(有道), 호는 구계(癯溪).

부친은 증영의정 권격(權格)이며, 모친은 함평이씨(咸平李氏)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이초로(李楚老)의 딸이다. 처음에는 맏형 권상하(權尙夏)에게서 글을 배우다가 뒤에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94년(숙종 20)에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었으며, 봉교(奉敎)춘방설서(春坊說書)를 거쳐 사간원정언으로 승진되었다. 곧 옥당(玉堂)에 참여, 수찬교리가 되었다가 병조좌랑사간원헌납지제교(知製敎) 등을 거쳐 부응교 겸 필선에 승진하였다.

윤휴(尹鑴)가 주자학을 호만(浩漫)하다고 비판하고 박세당(朴世堂)『사변록(思辨錄)』을 지어 주자학을 배척하였으므로 왕명에 의하여 그 책이 불태워질 때 두 사람을 공박하는 내용의 변설문(辨說文)을 작성하여 김창협(金昌協)으로부터 그 학식을 높이 칭찬받았다.

경연(經筵)에서 호족의 폐해와 군제(軍制)의 개혁을 주장하고, 또한 궁장(宮庄)의 절수(折受)가 성덕의 허물이 됨을 주장하였다.

1703년 수원부사가 되어 관리의 비행을 숙정(肅正)하는 등 치적을 남겼고, 1704년 대사간이 되고, 동부승지이조참의예조참의공조참의 등을 거쳐 전라관찰사가 되었다.

1709년 개성유수를 거쳐 평안감사에 임명되었으나, 공의(公議)에 따라 대사성으로 옮긴 뒤 도승지가 되었다. 대사헌 정호(鄭澔)윤증(尹拯)을 논핵한 일로 숙종의 노여움을 사서 귀양갈 때 연루되어 면직되었다가 곧 서용(敍用)되어 이조예조병조형조공조의 5조참판을 역임한 뒤, 한성좌윤부제학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그뒤 국경의 확정문제로 관서접반사(關西接伴使)가 되었고, 해적의 진무를 위해 호남순무사가 되기도 하였다.

1715년 형조판서, 1716년 호조판서가 되었다가 예조판서한성판윤우참찬 등을 지냈다.

그뒤 이조판서가 되어 숨은 인재를 많이 등용했으나, 1721년(경종 1) 신임사화 때 탄핵을 받아 삭직되어 문외출송(門外黜送)을 당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그뒤 향리로 돌아가 여생을 마쳤다.

성리설에 밝았으며 특히 『논어』『주역』에 관통하였다. 시호는 정헌(正獻)이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景宗實錄
國朝人物考

[집필자]

권오호(權五虎)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