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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평대군(麟坪大君)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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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이요(李㴭)
자(字)용함(用涵)
호(號)송계(松溪)
시호(諡號)충경(忠敬)
생년1622(광해군 14)
졸년1658(효종 9)
시대조선중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왕실 > 왕자
저서『송계집』
저서『연행록(燕行錄)』
저서『산행록(山行錄)』

[상세내용]

인평대군(麟坪大君)
1622년(광해군 14)∼1658년(효종 9). 조선 후기 왕족.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요(㴭), 자는 용함(用涵), 호는 송계(松溪).

인조의 셋째아들이며 효종의 동생으로, 1630년 인평대군(麟坪大君)에 봉해졌다.

1640년 볼모로 심양(瀋陽)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온 이후, 1650년부터 네 차례에 걸쳐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시서화(詩書畵)를 잘하였을 뿐 아니라 제자백가에도 정통하였던 그는, 1645년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따라 내조(來朝)하였다가 3년 뒤에 본국으로 돌아간 중국인 화가 맹영광(孟永光)과 가깝게 지내기도 하였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은 희귀한 편으로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의 「산수도」, 홍성하(洪性夏) 소장의 「노승하관도(老僧遐觀圖)」, 정무묵(鄭武黙)소장의 「고백도(古栢圖)」 등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고백도」는 섬세하고 꼼꼼한 필치로 다루어져 있어 맹영광의 공필법(工筆法)과 상통하는 바 크며, 「산수도」의 다소 거치른 필치 등은 절파풍(浙派風)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작품 이외에 『송계집』『연행록(燕行錄)』『산행록(山行錄)』의 저서를 남겼다.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경(忠敬)이다.

[참고문헌]

槿域書畵徵
韓國繪畵大觀(劉復烈, 文敎院, 1969)
韓國의 美 11―山水畵 上―(安輝濬監修, 中央日報社, 1980)

[집필자]

홍선표(洪善杓)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