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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조(李基祚)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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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자선(子善)
호(號)호암(浩菴)
시호(諡號)충간(忠簡)
생년1595(선조 28)
졸년1653(효종 4)
시대조선중기
본관한산(韓山)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현영(李顯英)

[상세내용]

이기조(李基祚)
1595년(선조 28)∼1653년(효종 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자선(子善), 호는 호암(浩菴). 판서 이현영(李顯英)의 아들이며, 박동열(朴東說)의 문인이다.

1615년(광해군 7) 진사로서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들어가 박사가 되었으나, 대북파에 의하여 파직되어 아버지 이현영과 함께 수원 쌍부촌(雙阜村)에 은거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형조좌랑이 되었다가 뒤이어 정언이 되었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한남도원수(漢南都元帥)종사관(從事官)으로 난 평정에 공을 세웠으며, 그뒤 지평헌납수찬교리이조좌랑응교좌부승지 등의 청요직(淸要職)을 여러 차례 역임한 뒤 병조참의공주목사호조참의를 거쳐, 1635년(인조 13) 경상도관찰사로 나가 많은 치적을 쌓아 송덕비가 세워졌다.

1636년 안변부사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평안도찬획사(平安道贊劃使)로서 적과 싸우기를 원하였으나 감사의 반대로 좌절되자 죽도(竹島)에 영을 설치하고 백성들을 피란시켜 적봉(賊鋒)을 피하게 하였다.

난 후 도승지에 이어 대사간, 이조참의참판을 역임하고 1645년 부제학으로 동지 겸 정조성절사(冬至兼正朝聖節使)청나라에 가서 지나친 세공미(歲貢米)의 부담을 감축하는 데 성공하였다. 효종이 즉위하자 호조판서에 올랐으나 대동법 및 행전(行錢) 등의 문제로 김육(金堉)과 뜻을 달리하여 대립하였다.

1650년(효종 1) 효종이 성지(城池)를 수축하기 위하여 ‘왜정가려(倭情可慮)’라는 이유로 청나라에 보내는 주문(奏文)에 남방의 수성연졸(修城鍊卒)을 주장하였는데, 청나라가 이를 강화조약의 위반이라고 하여 추궁, 그 책임으로 이경석(李景奭)조경(趙絅) 등이 청사(淸使)의 사문(查問)을 받을 때 이들을 적극 변호, 신구(伸救)하여 효종의 총애를 받았다.

그해 진주부사(陳奏副使)청나라에 갔다 돌아와 우참찬이 되고, 이어서 예조판서가 되었으나 종묘수리에 태만하였다는 김육 등의 탄핵으로 함경감사로 밀려났다가 병으로 사퇴하였다.

1653년 공조판서에 임명되어 돌아오던 중 김화에서 병사하였다.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며,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孝宗實錄
肅宗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집필자]

차문섭(車文燮)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