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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구(李聖求)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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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자이(子異)
호(號)분사(汾沙)
호(號)동사(東沙)
시호(諡號)정숙(貞肅)
생년1584(선조 17)
졸년1644(인조 22)
시대조선중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수광(李睟光)
저서『분사집』

[상세내용]

이성구(李聖求)
1584년(선조 17)∼1644년(인조 2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이(子異), 호는 분사(汾沙)동사(東沙).

태종의 아들인 경녕군(敬寧君) 비(裶)의 후손이며, 이조판서 이수광(李睟光)의 아들이다.

1603년(선조 36) 진사에 오르고, 1608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한원(翰苑)에 들어가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광해군 초기에 전적감찰에 이어 예조병조형조좌랑, 부교리헌납병조정랑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613년(광해군 5) 헌납으로 있을 때 부친은 대사헌을, 동생 이민구(李敏求)는 홍문관수찬을 지냄으로써 삼부자가 삼사의 언관직에 같이 봉직하여 세인들의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지평으로 있을 때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옥사가 일어나자 시론(時論)에 반대하였으며, 영의정 이항복(李恒福)정협(鄭浹)을 천거하여 종성판관으로 삼자 이를 문제삼는 간당(奸黨)들을 저지하다가 파직되었다.

1614년 이천현감(伊川縣監)을 거쳐 1616년 영평판관(永平判官)이 되고, 겸하여 포천을 다스렸다.

이때 이항복북청의 배소에서 죽자 포천의 향민들이 운구해서 장사지내고 서원을 세워 봉사하였다.

그러나 이 일로 무고당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면당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때에는 사간으로 기용되어 폐정을 일신시키고,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의 인정을 받아 강화부윤부승지예조참의를 거쳐 1625년(인조 3) 대사간이 되고 이듬해 병조참지가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이조참의로서 왕세자를 전주로 호종하고, 이어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되어 이듬해 전라감사에 부임하였다.

그뒤 대사간좌승지도승지병조참판대사헌형조참판경기감사 등을 지냈으며, 1636년 형조판서이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체찰부사(體察副使)를 겸하였고, 병자호란 때에는 왕을 남한산성으로 호종하였다.

이때 최명길(崔鳴吉) 등의 주화론에 동조하였으며, 1637년 왕세자가 심양(瀋陽)에 갈 때에 좌의정이 되어 수행하였다.

이듬해 영돈녕부사가 되고 1640년 사은사(謝恩使)청나라에 가서 명나라를 칠 원군을 보낼 수 없다는 것을 전하고 왔다.

1641년 영의정이 되었으나 이듬해 승지 홍무적(洪茂績)의 모함으로 사직하였다가 곧 영중추부사가 되었는데, 다시 선천부사 이계(李烓)청나라에 기밀을 누설한 사건을 논하다가 파직되어 양화강(楊花江) 부근에 만휴암(晩休庵)을 짓고 향인(鄕人)을 권장하여 「서호향약기(西湖鄕約記)」라는 향약을 정하고 산수간을 소요하며 지냈다.

다시 영중추부사에 서용되었으나 나오지 않고 강호에 살다 죽으니, 인조가 조회를 폐하고 조제(弔祭)하였다. 이시백(李時白)은 “반정 이후 인조가 발탁한 정승 중에서 이성구의 인물됨이 첫째이다.”라고 하였다.

저서로는 『분사집』이 있다. 시호는 정숙(貞肅)이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同文彙考別編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淸太宗實錄

[집필자]

반윤홍(潘允洪)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