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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근수(尹根壽)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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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자고(子固)
호(號)월정(月汀)
시호(諡號)문정(文貞)
생년1537(중종 32)
졸년1616(광해군 8)
시대조선전기
본관해평(海平)
활동분야문신 > 문신
윤변(尹忭)
저서『사서토석(四書吐釋)』
공신호광국공신(光國功臣)
공신호호성공신(扈聖功臣)

[상세내용]

윤근수(尹根壽)
1537년(중종 32)∼1616년(광해군 8).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자고(子固), 호는 월정(月汀).

군자감정(軍資監正) 윤변(尹忭)의 아들이며, 영의정 윤두수(尹斗壽)의 동생이다. 김덕수(金德秀)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58년(명종 1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에 임용된 다음, 승정원주서춘추관기사관연천군수 등을 역임하고, 1562년 홍문관부수찬에 임명되었다.

이때 기묘사화 당시 화를 당한 조광조(趙光祖)의 신원(伸寃)을 청하였다가 과천현감으로 체직되었다.

이듬해 8월 행신(倖臣) 이량(李樑)이 그의 아들 이정빈(李廷賓)이조좌랑에 천거한 것을 형 윤두수, 박소립(朴素立), 기대승(奇大升) 등이 반대하였는데, 이량의 사주를 받은 대사헌 이감(李戡)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그해 9월 영의정 윤원형(尹元衡), 우의정 심통원(沈通源)의 상계(上啓)로 인하여 죄가 없음이 밝혀져 승문원 검교에 서용되었으나, 형 윤두수이조전랑이어서 취임하지 않았다.

1565년 홍문관부교리로 재기용된 뒤 이조좌랑정랑(正郞)을 역임하고, 이듬해에는 의정부사인지제교 겸 교서관 교리(知製敎兼校書館校理)『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후 검상사인장령집의사예부응교를 역임하였으며, 1572년(선조 5) 동부승지를 거쳐 대사성에 승진, 이듬해 주청부사(奏請副使)명나라에 가서 종계변무(宗系辨誣)를 하였다.

그뒤 경상도감사부제학개경유수공조참판을 역임하고, 1589년 성절사(聖節使)명나라에 파견되었으며, 귀국할 때 『대명회전전서(大明會典全書)』를 가져왔다.

이듬해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1등에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으로 봉해졌으며, 1591년 우찬성으로 정철(鄭澈)이 건저문제(建儲問題)로 화를 입자, 그가 정철에게 당부하였다는 대간의 탄핵으로 형 윤두수와 함께 삭탈관직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예조판서로 재기용되었으며, 문안사(問安使)원접사(遠接使)주청사 등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명나라에 파견되었고, 국난극복에 크게 노력하였다.

그뒤 판중추부사를 거쳐 좌찬성으로 판의금부사를 겸하였으며,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봉해졌다.

1606년 선조가 죽자 왕의 묘호를 조(祖)로 칭할 것을 주장하여 이를 실현시켰다.

그는 청백간손(淸白簡遜)하고 문장이 고아하며 필법이 주경(遒勁)하여 예원(藝苑)의 종장(宗匠)이라 일컬어졌다 한다.

저서로는 『사서토석(四書吐釋)』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典故大方
月汀集

[집필자]

장동익(張東翼)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