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정여립(鄭汝立)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C815C5ECB9BDB1546X0
자(字)인백(仁伯)
생년1546(명종 1)
졸년1589(선조 22)
시대조선전기
본관동래(東萊)
활동분야사회 > 사상가
정희증(鄭希曾)
출신지전주(全州)

[상세내용]

정여립(鄭汝立)
1546년(명종 1)∼1589년(선조 22). 조선 중기의 사상가.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인백(仁伯). 전주(全州) 출신. 첨정 정희증(鄭希曾)의 아들이다.
1. 출사
15세 때 익산군수인 아버지를 따라가서 아버지를 대신하여 일을 처리할 때에는 아전들이 군수보다도 더 어려워하였다 한다.

자라면서 체격도 늠름한 장부가 되었으며, 통솔력이 있고 두뇌가 명석하여 경사(經史)와 제자백가서에 통달하였다.

1567년(명종 22) 진사가 되었고, 1570년(선조 2) 식년문과 을과에 두번째로 급제한 뒤 이이(李珥)성혼(成渾)의 각별한 후원과 촉망을 받아 일세의 이목을 끌었다.
2. 서인과의 반목
1583년예조좌랑이 되고 이듬해 수찬이 되었다. 본래 서인이었으나 수찬이 된 뒤 당시 집권세력인 동인편에 반부(反附)하여 이이를 배반하고 박순(朴淳)성혼을 비판, 왕이 이를 불쾌히 여기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가 서인을 공격하는 편에 앞장서게 된 사정은 확실하지 않으나, 그가 이조전랑의 물망에 올랐을 때 이이가 반대한 탓이라는 설도 있으나 오히려 직정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이 동인의 영수 이발(李潑)과 잘 어울린 탓이 아닌가 한다.

그는 이이와의 문제로 서인의 미움이 집중되었고, 선조의 눈밖에 나서 동인의 역천(力薦)에도 불구하고 중앙에서 관직을 얻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동인 사이에는 여전히 인망과 영향력이 있어 감사나 수령이 다투어 그의 집을 찾았고, 특히 전라도 일대에 그의 명망이 높았다.
3. 대동계조직과 역모 고변
진안죽도(竹島)에 서실을 지어놓고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매달 사회(射會)를 여는 등 세력을 확장하여갔다.

1587년 왜선들이 전라도 손죽도(損竹島)에 침범하였을 때에는 당시 전주부윤 남언경(南彦經)의 요청에 응하여 대동계를 동원, 이를 물리치기도 하였다.

그뒤 대동계의 조직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황해도 안악변숭복(邊崇福)박연령(朴延齡), 해주지함두(池涵斗), 운봉(雲峰)의 승려 의연(義衍) 등 기인(奇人)‧모사(謀士)의 세력으로 확대되었다.

1589년 이들이 포함되는 동정이 퍼져 기밀이 누설되자 한강의 결빙기를 이용하여 황해도호남에서 동시에 입경하여 대장 신립(申砬)병조판서를 살해하고, 병권을 장악하기로 하였다는 고변이 황해도관찰사 한준(韓準), 안악군수 이축(李軸), 재령군수 박충간(朴忠侃), 신천군수 한응인(韓應寅) 등의 연명으로 급보되어 관련자들이 차례로 잡혔다.

한편, 그는 금구의 별장을 떠나 아들 정옥남(鄭玉男)과 함께 죽도로 피신하였다가 관군의 포위가 좁혀들자 자살하고 말았다. 정옥남진안현감 민인백(閔仁伯)에게 잡혔다.

이로써 그의 역모는 사실로 굳어지고, 정철(鄭澈)이 위관(委官)이 되어 사건을 조사, 처리하면서 동인의 정예인사는 거의 제거되었으니, 비명에 숙청된 인사는 이발을 비롯하여 1,000여명에 달하였다.
4. 모반사건의 평가
그런데 그의 모반사건에 관하여서는 무옥이라는 설과 모역이라는 양설로 나누어져 있다. 조작설의 이유로는 네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그의 도피는 안악의 교생 변숭복의 급보로 이루어지는데, 그는 수사의 손길이 곧 자기에게 미칠 것을 알면서도 집 안에 각종 수신(受信)문서들을 방치하여 후일 이 문서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을 연루자로 죽게 할 리 없다는 것이다.

둘째, 급보를 받고 도망간다면 연고지가 아니라 지리산 같은 심산으로 방향을 잡았을 것이며, 또 가족에게 행선지를 알려 추포의 손이 곧 미치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셋째, 150년 뒤에 나온 『동소만록(桐巢漫錄)』 같은 야사에서는 그가 죽도에 가서 놀고 있을 때 선전관 등이 달려와서 박살하고 자결하였다고 보고하였다는 것이다. 기축옥사는 후유증이 컸던 만큼 이설(異說)의 채택에 신중하였을 것으로 보아, 동인 사이에 구전되어오는 설을 직서하였다고 보아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넷째, 김장생(金長生)이 엮은 「송강행록(松江行錄)」에 의하면 고변이 있자 일반인은 그의 상경을 고대하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정철은 그의 도망을 미리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자진하여 옥사처리를 담당하였다는 것이다.

즉, 그의 도망을 미리 안 이유는 정철정여립의 유인과 암살을 지령한 음모의 최고지휘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정철의 배후에서 실질적으로 기축옥사를 조작한 이는 송익필(宋翼弼)이었다.

그는 노비출신으로 서인의 참모격으로 활약하였는데, 자신과 그의 가족 70여인을 환천(還賤)시키고자 한 동인의 이발백유양(白惟讓) 등에게 복수하기 위하여 이 사건을 조작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그의 모반을 뒷받침하는 것으로는 첫째, 그가 남긴 문자 중에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과 누구를 섬기던 임금이 아니겠는가라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을 들고 있다.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 충신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한 것은 왕촉(王蠋)이 죽을 때 일시적으로 한 말이고, 성인의 통론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맹자가 성지화자(聖之和者)라고 칭찬한 유하혜(柳下惠)의 말을 인용한 하사비군이라는 말은 참으로 혁명적인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신채호(申采浩)가 일찍이 지적한대로, 그는 400년 전에 군신강상론(君臣綱常論)을 타파하려 한 것이니 그가 혁명성을 지닌 사상가라는 점은 분명하다.

둘째, 그는 전부터 있었던 목자[李]는 망하고 전읍[鄭]은 흥한다는 참언을 이용하여 전읍은 자기를 가리킨다는 낭설을 퍼뜨리고 그것을 믿게 하였다 한다. 왕조의 운수가 다하여 천명이 타성에게 내려 새 왕조의 출현이 필연적임을 믿는 것이 도참신앙이고, 이것을 고의로 조작하였다는 것은 곧 반역‧모역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또 그의 집에서 압수된 ‘제천문(祭天文)’에는 선조의 실덕을 열거하여 조선왕조의 운수가 다하였음을 논하고, 천명의 조속한 이행을 기도한 흉참한 문구가 있었다고 한다. 아마 그는 선조 밑에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하고, 혁명을 은밀히 생각하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옥사에서 쓰러진 동인 명사들은 선조에게 등을 돌리는 자세에 있어서 어느 정도 공통성은 있으나, 역모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쨌든, 그는 기축옥사의 장본인이 되어 동인의 정치권에 큰 타격을 주었고, 전라도 전체가 반역향이라는 낙인을 찍히게 하여 호남 출신 인사의 관계 진출을 어렵게 만들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國朝榜目
桐巢漫錄
東南小史
燃藜室記述
松江全集
丹齋全集(申采浩, 螢雪出版社, 1972)
鄭汝立硏究(金龍德, 朝鮮後期思想史硏究, 乙酉文化社, 1977)

[집필자]

김용덕(金龍德)

명 : "여립(汝立)"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國朝編年v11於誤矣文章則有之守愼曰珥喜人侫已至於文章亦不致力但於對策雜以俚語浩汗不竭矣未幾三竄蒙放紫海筆談○賊臣汝立見栗谷爲時所推重傾身事之執弟子禮至有孔子已熟底柹子栗谷未熟底柹子之論栗谷旣卒汝立見時議漸變諂附李潑一
國朝編年v12一冊尹根壽又得全帙而來爲首功前後使臣有功者竝分等賜券○十月全州居鄭汝立前修撰謀叛事覺自殺黨與皆伏誅初汝立數被譴旨遁歸湖南朝廷每擬淸望上終不許汝立素有跋扈之志及挫抑甚其叛謀益肆迺假托講學招聚無賴武士僧徒雜於
國朝編年v14乃召公曰知卿素有忠孝大節可急赴行在公馳謁於平壤松江行狀沙溪當論公曰好公者退溪栗谷牛溪諸賢也惡公者仁弘汝立山海等也易曰方以類聚物以群分百世之後有欲知公者蓋觀於此松江墓表鄭澈有一兄殞於杖下妹夫桂林削髮而被誅沈
國朝編年v16重峯金長生沙溪吳允謙楸灘李貴黃愼等秋浦其他行已有度居官廉潔者及屛居田野修身潔行而終焉者亦不少自今觀之汝立仁弘之言爲是耶趙憲金長生之言爲是耶蓋柳稷之論祖述汝立仁弘之餘論也以嶺南一道論之初則一道之論同然也其後
紀年便攷v14汝立
紀年便攷v14煽外侮難禦疏奏両司交章請竄竟因金宇顒剳竄配吉州憲疏言汝立必叛至是儒生梁山璹䓁訟其先見之明卽命放之憲闻汝立叛又上疏備論逆節之萌又言通信之舉必為狡虜所陷監司權徵力止之憲曰死汝立公尙畏之生秀吉来則公當如何及疏上
紀年便攷v14汝立數被譴旨歸全州讀書名重一道朝廷每擬清望 上終不許素有跋扈之志及被挫抑叛謀益肆乃假托講學聚旡頼武士僧徒
紀年便攷v14梁山璹䓁訟其先見之明卽命放之憲闻汝立叛又上疏備論逆節之萌又言通信之舉必為狡虜所陷監司權徵力止之憲曰死汝立公尙畏之生秀吉来則公當如何及疏上 上怒曰趙憲尙不畏戢必欲再踰摩天嶺耶謂憲前後疏皆出於宋翼弼兄弟指嗾命
紀年便攷v14三山兄弟領神兵或入智異山或入鷄龍山又言鄭八龍神勇人當為王八龍卽汝立幻號又以為全州地有聖人作興極濟吾民汝立乃以是年冬末西南一時舉兵直犯京師决計九月山僧有潛應者僧義嚴詗其狀密言于載寧郡守朴忠侃忠侃遲疑未敢發安
紀年便攷v14南一時舉兵直犯京師决計九月山僧有潛應者僧義嚴詗其狀密言于載寧郡守朴忠侃忠侃遲疑未敢發安岳校生趙球常稱汝立弟子踪跡不類平素郡守李軸掩捕問狀㺷盡告以逆狀軸與忠侃信川郡守韓應寅聯名報于監司韓凖凖狀啓上變 上召三
紀年便攷v14朴延齡海州人池㴠斗䓁交結誑誘與隣邑武士公私賤隷作為大同稧每月射帷先是天安私奴吉三峯者勇猛絶倫名闻國內汝立掦言曰吉三峯三山兄弟領神兵或入智異山或入鷄龍山又言鄭八龍神勇人當為王八龍卽汝立幻號又以為全州地有聖人
紀年便攷v14請分遣禁都逮捕時汝立在金溝别墅知機與子玉男及同黨邉涘䓁亡匿于鎭安竹島山谷間縣監閔仁伯搜捕淂之官軍國住汝立勢窮㐲釰自殺載屍以来磔于軍器寺前子玉男婿李震吉俱扙斃親姻中株連甚衆崔永慶鄭介清并被禍告廟頒赦
紀年便攷v14告鄭彥信彥智李潑李洁白惟讓鄭昌衍為賊內應 上親鞫并遠竄昌衍放送金宇顒以汝立相親竄會寧安岳校生宣弘福又誣引李潑李洁白惟讓再鞫杖死潑母年八十潑子纔七歲并斃杖下
紀年便攷v14其為人右議政鄭彥信曰但知其讀書人 上擲其狀曰讀書人所為乃若是乎使承旨讀之㐫謀狼藉大臣請分遣禁都逮捕時汝立在金溝别墅知機與子玉男及同黨邉涘䓁亡匿于鎭安竹島山谷間縣監閔仁伯搜捕淂之官軍國住汝立勢窮㐲釰自殺載屍
紀年便攷v14汝立
紀年便攷v16事忠貞子中宗乙酉生字文吉號東岡又章洲明宗丙午進士己酉登明經科歴翰林舎人副學東伯官止禮判以文武才被薦知汝立之凶而與之絶性素清儉不受饋遺士論携貳而中立不偏人不敢加以標榜持清議務激濁與金繼輝同榜而為知己友宣祖癸
紀年便攷v16李震吉廷霖子字子修宣祖丙戌登别試歴翰林以汝立甥姪参謀栲死後剖棺依律
紀年便攷v16李廷鸞承孝子鐸三従孫中宗己丑生字文父宣祖戊辰登别試不肯與世俯仰困躦終身與汝立同居一城目之以莾卓及其反趙憲服其先見與憲臭味同有所契許壬辰與憲皆舉義旅時以前縣監罷官家食率義旅赴行在
紀年便攷v16宗己丑生字彦明號月潭李仲虎明人明宗戊午司馬丙寅登文科歴翰林副學吏判有才氣可称為大諌時啓斥鄭汝立奸状及汝立㐲法世称曲江先見宣祖戊子議 宗系辨誣滉力請申白朝京竣事而還 上特賜嘉獎䇿平難功三等。光國功三等封海城
紀年便攷v16一人而已又曰夙欽徳義有懐傾膓所著有愚得錄随手記東漢排節義論晉宋清談序說以排節義論義士流所斥己丑辭連於汝立獄配慶源月餘殁年六十一鄭澈以排節義推問介清曰此朱子之說澈厲聲曰朱子朱子汝何知朱子朱子於其師亦有北恩㤀
紀年便攷v16叛附時人徃来於吏判李山海得除谷城金長生問曰従思菴幾何介清曰聞其家多書籍故徃来借㸔矣長生始其背師無状與汝立親厚甞有書曰見道高明當世惟尊兄一人而已又曰夙欽徳義有懐傾膓所著有愚得錄随手記東漢排節義論晉宋清談序說
紀年便攷v16介清曰此朱子之說澈厲聲曰朱子朱子汝何知朱子朱子於其師亦有北恩㤀徳乎介清垂頭不復言澈每曰介清未叛之汝立汝立已叛之介清介清獄中䟽云臣前日所著者讀朱子之論因有所感以著東漢節義之弊而已 仁祖癸亥反正後復官爵建祠于
紀年便攷v16推問介清曰此朱子之說澈厲聲曰朱子朱子汝何知朱子朱子於其師亦有北恩㤀徳乎介清垂頭不復言澈每曰介清未叛之汝立汝立已叛之介清介清獄中䟽云臣前日所著者讀朱子之論因有所感以著東漢節義之弊而已 仁祖癸亥反正後復官爵建
紀年便攷v16恨復又曰此人少無人君之量以此書下鞫㕔㫁以逆律殞于桁楊年六十鄭澈曰紸幄出一汝立已是大變惟讓雖無状豈復為汝立乎 上大怒肅宗庚午復官子振民中生貟己丑逮鞫供曰父所不知子何知之有罪無罪證在蒼天與弟興民壽民并杖死
紀年便攷v16與汝立書多犯上語有曰此人猜忌恨復又曰此人少無人君之量以此書下鞫㕔㫁以逆律殞于桁楊年六十鄭澈曰紸幄出一汝立已是大變惟讓雖無状豈復為汝立乎 上大怒肅宗庚午復官子振民中生貟己丑逮鞫供曰父所不知子何知之有罪無罪證
紀年便攷v16称之執弟子之禮於李珥至有孔子已熟底柿子栗谷未熟底柿子之論珥既卒謟泭李潑一日 上問李珥何如人羣臣未及對汝立極言其短不遺餘力 上深思之曰汝立今之邢恕汝立怒目而退性凶悖兄弟五六皆不相容內外無不為仇敵隣有士族青年
紀年便攷v16為王於是海西藉藉以為全州有聖人作拯濟吾民愚民眩惑喧傳載寕郡守朴忠侃䓁聯報監司韓凖凖宻啓上變命招大臣問汝立何如人領相柳㙉右相李燕山海對以不知其為人左相鄭彦信曰但知其為讀書人不知其他上手擲狀床下曰讀書人所為乃
紀年便攷v16熟底柿子之論珥既卒謟泭李潑一日 上問李珥何如人羣臣未及對汝立極言其短不遺餘力 上深思之曰汝立今之邢恕汝立怒目而退性凶悖兄弟五六皆不相容內外無不為仇敵隣有士族青年丧夫財産頗饒汝立乗夜強滛竟以為妾以其氣魂盛壮
紀年便攷v16餘力 上深思之曰汝立今之邢恕汝立怒目而退性凶悖兄弟五六皆不相容內外無不為仇敵隣有士族青年丧夫財産頗饒汝立乗夜強滛竟以為妾以其氣魂盛壮論議風生開口則滿座称歎博通雜術知有壬亂欲乗時猝起與全州金滿泰仁䓁邑人作大
紀年便攷v16右相李燕山海對以不知其為人左相鄭彦信曰但知其為讀書人不知其他上手擲狀床下曰讀書人所為乃若是乎遂令逮捕汝立知機與子玉男亾匿鎮安竹島山谷間縣監閔仁伯捕捉汝立㐲劒自殺乃磔屍于市従子緝招引鄭彦信彦智洪宗祿鄭昌衍李
紀年便攷v16書人不知其他上手擲狀床下曰讀書人所為乃若是乎遂令逮捕汝立知機與子玉男亾匿鎮安竹島山谷間縣監閔仁伯捕捉汝立㐲劒自殺乃磔屍于市従子緝招引鄭彦信彦智洪宗祿鄭昌衍李潑李洁白惟讓䓁同逆謀命并拿親鞫及緝臨刑大哭曰㗖我
紀年便攷v16汝立㓜號
紀年便攷v16底柿子栗谷未熟底柿子之論珥既卒謟泭李潑一日 上問李珥何如人羣臣未及對汝立極言其短不遺餘力 上深思之曰汝立今之邢恕汝立怒目而退性凶悖兄弟五六皆不相容內外無不為仇敵隣有士族青年丧夫財産頗饒汝立乗夜強滛竟以為妾
紀年便攷v16趙宗道旅五世孫参奉堰子白仁傑外孫李俊民婿中宗丁酉生字伯由號大笑軒曺植門人汝立之獄與崔永慶係獄永慶凝定自守叱咜獄卒宗道謔泿諧笑無異平日卓犖而不覊真竒男子也恒言多笑故以為號明宗丁巳
紀年便攷v16讓寧大君褆太宗子 玄孫極浦守希男子中宗戊戌生字子任號沙村明宗丁卯生貟宣祖丙子登明輕科己丑以安岳郡守告汝立變策平難㓛一䓁封完山府院君壬辰従沈守慶為建義副使甲午為賑恤使官止輔國工判入耆社光海甲寅卒年七十七贈領
紀年便攷v16許震重泰仁人朴祐外孫號東湘受業於外叔朴淳事親至孝以大臣薦除官官止判富先知汝立之為㐫人人称其所居曰君子洞院享
紀年便攷v16年登明經科歴南床銓郞校理官止執義曽言汝立㐫險不可用反被排擯甲申以慶尙道推刷御史辛於宻陽年四十三 上曰汝立㐫逆無一人知之乎柳成龍曰李敬中甞塞其銓郞之薦其時臺諌反駁敬中矣 上遂命特贈吏参其時臺諫鄭仁弘朴光玉削
紀年便攷v16李敬中養中弟中宗壬寅生字公直號丹崖宣祖戊辰司馬同年登明經科歴南床銓郞校理官止執義曽言汝立㐫險不可用反被排擯甲申以慶尙道推刷御史辛於宻陽年四十三 上曰汝立㐫逆無一人知之乎柳成龍曰李敬中甞塞其
紀年便攷v16官止義州府尹甲申巡撫北路李珥病革時書贈六條大畧及還條陳十二策朝廷不能用乙酉在義州䟽辨李珥鄭澈之誣預知汝立之奸上䟽言将圖不軌且以東西相軋請調合士論見忤時軍終至廢斥還郷築洗心亭於高山治東川邉講道條業両湖學者多
紀年便攷v16金憑通川人翼漢子字敬中一中立宣祖庚辰登别試官止刑佐早有称譽與汝立不相得成隙有風眩觸風淚輒流汝立磔尸時百官序立適日寒淚流以巾屡拭臺諌搆而栲死尤為寃枉
紀年便攷v16金憑通川人翼漢子字敬中一中立宣祖庚辰登别試官止刑佐早有称譽與汝立不相得成隙有風眩觸風淚輒流汝立磔尸時百官序立適日寒淚流以巾屡拭臺諌搆而栲死尤為寃枉
紀年便攷v17李彥吉仟十一世孫武收使悌男子字君迪宣祖己卯登明經科以金堤郡守賂米汝立己丑楮死
紀年便攷v17以自號曰用拙齋李滉門人又遊成運之門宣祖丙子登别試歴三司官止知樞入耆社見識精明用力於禮樂之書己丑以名在汝立門生錄故受刑一次而放光海廢 母庭請時終始不參年過八十而卒仁祖朝贈正卿孝㫌子得淵見下曾孫慶濟見下
紀年便攷v17柳宗智字明仲號潮溪好學力行曺植許以醉厚再除參奉不就己丑汝立獄起儒生丁巖壽等䟽論其締結逆賊之罪被杖死其在晋陽獄也崔永慶勉以順受其正
紀年便攷v17世孫别坐彥清子明宗己酉生字而遠號退村宣祖丙子進壯丙戌以參奉登别試歴翰林己丑差行臺請宗糸辨誣事以持平論汝立獄後濫功禍將不測因成渾力救坐罷而止策光國㓛二等封茂城府院君壬辰從世子至成川以亂中從 上勞陞輔國官止判
紀年便攷v17曺大中昌寧人參奉世明子字和字一弘字號鼎谷宣祖丙子進士壬午登明經科官止全羅都事聞汝立之死流涕行素庚寅栲死 仁祖朝雪寃復爵兄弟文科兄景中郡守
紀年便攷v17恒六世孫頴子顒從子字汝厚號未能齋宣祖丙子進士己丑登别試歴翰林三司官止司諫有德望為李珥上章辨誣有先見與汝立仁弘在近地終不見子荇蘊見下
紀年便攷v17後谷宣祖丙子司馬乙酉以叅奉登明經科不由玉署拜輔徳性至李剛石可及義不可奪在臺憲彈舉無所避坐此枕仕道曾見汝立眸子曰必大奸慝終不見丙申陳游撃囚倿營朝廷擇伴臣六昜乃至級級承命入賊營賊張兵六十里白刃森列脅入囚門級罵
紀年便攷v17世孫明宗壬子生字伯春號苔泉成渾門人宣祖癸酉進士甲申魁别試有文行落拓不諧於世不得通顯仕己丑以鎮安郡守捕汝立拜禮議丹平難㓛二等封驪陽君官止知中樞入耆社 仁祖丙寅卒年七十五贈左賛成謚景靖子垶見下從子墡䕃武都正仁
紀年便攷v17趙惟直咸安人倫子字士清居南原宣祖丙戌登别試官止校權己丑辭連於汝立獄㭳死
國朝捷錄v01鄭氏○退溪卒寒暄一蠧靜庵晦齋從祀文廟請追削袞貞聀復尹任等聀南溟栗谷卒戊子奏請使兪泓卞宗系誣還策勳己丑汝立謀反伏誅丙申夢鶴作亂伏誅戊戌成渾卒遣李恒福李廷龜如京師卞誣乙巳策扈聖勳恒福等八十六人○己巳禍恭憲大王
國朝捷錄v01字立夫號懶庵東萊人己丑拜右辭連汝立獄謫死後伸佐郞振子判書世規祖世規黔丹山戰亡時與海伯東臯李相見公曰必大貴臨終以犀帶與之後果登台
國朝捷錄v01字太古荷衣仁佑子南陽人先見汝立之奸韓俊謙女
郯述v03萬歷十七年己丑十一月日鄭汝立等謀反載寧郡守朴忠侃等上變告汝立等誅伏庚寅八月錄朴忠侃等
國朝人物志v2人府使希參子宇顒兄壬子進士壯元丙寅文科歷檢閱副提學爲靑松府使己丑弟宇顒坐汝立收司律謫會寧宇宏馳遇榮川解裘別之贈以詩曰唐公淮上舟何泊韓子潮陽馬不前庚寅卒官至大司
國朝人物志v2山人癸酉司馬戊寅文科壯元十歲通小學稍長遊閔杏村純之門歷湖堂舍人拜校理筵中汝立極詆李珥履祥曰汝立嘗師事珥而背之嘗深惡而絶之上曰汝立可謂郉恕也壬辰扈從爲
國朝人物志v2絶人學語便知讀書幼孤受敎母夫人遊牛溪成渾門歷監察陰竹縣監庚寅爲正言斥李山海擬汝立金堤郡守又斥欺隱之狀黜爲高山縣監壬辰敍爲司書持平接伴宋經略從光海南下爲體府
國朝人物志v2上疏貶沈義謙金孝元乙酉拜領議政己丑鄭汝立謀反事覺上曰吾尊禮守愼甚厚而引用汝立國之危亡係焉守愼出門外引罪自居明年卒年七十六諡文懿以從子大海爲後相臣錄權容
國朝人物志v2上怪問之對曰臣賦命至薄不得長侍聖上是以泣之出語同僚曰聖上辭氣之間其兆已見矣不敢直對其十月有汝立上變事大獄起而至壬辰有倭寇國果大亂臨沒謂子曰母蹙禍亂迫矣病死何蹙緖善知人嘗大醉論人品其善惡脩
國朝人物志v2李潑及洁白惟讓等出賊招上親鞫震怒公進曰朝臣交親逆賊不過好而不知其惡天下寧有兩汝立乎上意稍解竝命遠竄儒生梁詗疏論當初彥信欲斬告者上益怒命再鞫賜彥信等死澈
國朝人物志v2咸鏡道都巡邊使入幕之士如李舜臣中砬金時敏李億祺皆名將中上駟己丑拜右議政辭連汝立獄彥信上疏曰臣與逆賊趣舍異路年輩不敵京鄕相懸其無過從之雅國人所共知云云其後搜出逆家文書中
國朝人物志v2等嘗稱金應南文學才望爲當世第一黨人所稱詡者不亦黨人乎且濟州飢甚予欲仗是人全活及歸無持物汝立負時譽應南戒李潑李洁勿與交此人內險外飭終必敗己丑汝立果以謀叛誅坐交遊被禍者無
國朝人物志v2喜勇角觝蹴跼母聞而切責恒福痛折節力學年二十五文科栗谷李珥薦翰林三人恒福其一也己丑汝立獄以問事郞入對明敏上曰高才高才壬辰上西幸扈駕至義州明使楊邦亨敬重之曰東方
國朝人物志v2靑松人鍵子蘇齋盧守愼謪謫海島喜壽冒鯨濤躬進受學庚午進士壬申文科選入湖堂己丑汝立獄多濫滯喜壽到時宰家抗言忼慨拂衣起出門遇張雲翼喜壽笑曰白鷗波浩蕩萬里誰能馴當路不悅
國朝人物志v2經筵適驟雨亂瀉筵臣奏對聲不登徹上曰啓辭宜分明應寅應聲書曰簷溜亂耳奏聲宜高一時稱善己丑汝立獄起超授戶曹參議錄平難光國勳封淸平府院君素習漢語與李德馨爲接伴使面論兵機忠
國朝人物志v2州人縣監渭子年十二遭父喪秉禮如成人服除聞同郡處士李廷麟有學行往學焉鑑識過人逆魁汝立方盜名其父希曾素與命龍父善謂命龍曰小子盍從吾兒遊乎命龍謝終不往壬辰倭亂赴行朝
國朝人物志v2夷險之際其剛不可及其義不可奪其在臺憲彈劾無所避王子縱奴驅人級嚴刑幾死諸僚縮頸莫敢言戊午年間逆魁汝立新負朝望人爭趨競勸與同訪級曰曾見其眸子必大奸慝終不一見壬亂之初作宰韓山領軍禦倭官軍潰於龍
國朝人物志v2善畫書同上洪宗祿字延吉號柳村南陽人判書曇子丁卯生員甲申文科直提學己丑汝立獄杖流同上李澍字彥霖號盆峯延安人郡守慶宗子戊午進士癸酉文科丙子重試
國朝人物志v2仲謙水原人府使仁豪子仁傑侄庚午生員壬申文科副提學己丑獄起惟讓子壽民娶汝立兄汝興女惟讓及四子皆杖死後伸雪昭代紀年李震吉字子脩德山人丙戌文科
國朝人物志v2字敬中通川人庚辰文科佐郞己丑鄭汝立謀反死屍到京師百官序立追刑汝立屍于軍器寺前憑素有風淚之疾遇風拭眼於是臺諫論以流涕栲死燃藜述
國朝人物志v2時父夢見鄭仲夫生時又如之故舊來賀而父無喜色年七八歲與群兒嬉剉鵲雛從嘴至趾父問曰誰所爲婢子曰汝立也父怒叱是夜刺殺其婢於暗處謂人曰此吾所爲心不小挫聞者或曰非常或曰惡將軍出矣年十五六一邑諸事擅
國朝人物志v2術致名而實有將帥才介淸素不許左相鄭澈爲人曰其人飾情僞行非正人澈聞之深怒之未久有汝立事獄旣成丁巖壽洪千璟等發言介淸與汝立通及按問皆無實上意解鄭澈曰介淸嘗著排
國朝人物志v2戊辰生員庚午文科歷校理官至執義辛巳鄭汝立以多學拔擢敬中曰此人顯用他日必爲士林羞及汝立獄起上曰汝立凶逆無一人知者知人之難固如是乎柳成龍曰臣亡友李敬中嘗塞銓郞之薦
國朝人物志v2眞儒也有姻親爲古阜縣監焰以事過郡投宿極道李栗谷秉銓時我在甸邑詳知其用人無偏係之私又焉知汝立畢竟做何樣人我則不苟友也倅不悅卒未免汝立之禍戊子除古阜縣監每過鄭汝立之門一不見面目
國朝人物志v2都事鄭仁弘盜時名監宜寧矯傲不行迎送禮公怒罪其主吏諸豪有名位者一切不相假借己丑變逆起有言汝立嘗與崔永慶往還公從監司金睟聞其語入都偶泄之所親言官請鞫永慶事連公亦被逮吐實
國朝人物志v2人修撰承孝子宣廟戊辰文科家在全州與鄭賊汝立同一城常以莽卓目之廷鸞登第汝立方顯重於朝擠之不有餘力遂自校書卽出爲海美縣監及汝立誅人始服其先見壬辰夏倭兵踰嶺及湖
國朝人物志v2達遠號近始齋光山人承旨緣孫戊子進士己丑文科待敎己丑坐史院同僚焚草事落職還鄕汝立獄遭誣削奪歸田里壬辰起義兵至安東會明兵復平壤賊撤兵遁走於是乘勢捕首級頗多人物考與
國朝人物志v3許篈宋應漑朴謹元劾李珥反坐見竄及珥卒西人常困於東人朝象益潰裂東人謀攻栗谷不已者汝立及柳永慶洪汝諄李潑等也己丑汝立謀逆死李潑李洁辭連栲死鄭彥信彥智竄死金宇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2-02-03"그는 금구의 별장을 떠나 아들 정옥남(鄭玉男)과 함께 죽도로 피신하였다가 관군의 포위가 좁혀들자 자살하고 말았다."을 "그는 금구의 별장을 떠나 아들 정옥남(鄭玉男)과 함께 죽도로 피신하였다가 관군의 포위가 좁혀들자 자살하고 말았다. 정옥남은 진안현감 민인백(閔仁伯)에게 잡혔다."로 수정함.[수정자: 이재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