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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행(李荇)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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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택지(擇之)
호(號)창택어수(滄澤漁水)
호(號)청학도인(靑鶴道人)
시호(諡號)문정(文定)
시호(諡號)문헌(文憲)
생년1478(성종 9)
졸년1534(중종 29)
시대조선전기
본관덕수(德水)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의무(李宜茂)
저서『용재집』

[상세내용]

이행(李荇)
1478년(성종 9)∼1534년(중종 2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택지(擇之), 호는 용재(容齋)창택어수(滄澤漁水)청학도인(靑鶴道人). 사간 이의무(李宜茂)의 아들이다.

1495년(연산군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예문관 검열봉교, 성균관전적을 역임하고,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00년 하성절질정관(賀聖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홍문관수찬에 임명되었고, 홍문관교리까지 올랐으며, 1504년 갑자사화 때 사간원헌납을 거쳐 홍문관응교로 있으면서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윤씨의 복위를 반대하다가 충주에 유배되고, 이어 함안으로 옮겨졌다가 1506년초에는 거제도에 위리안치되었다. 이해 9월에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와 다시 홍문관교리로 등용되고, 이어 부응교로 승진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13년(중종 8) 다시 성균관사예가 되었다가 이듬해 사성으로 승진하였다. 사섬시정(司贍寺正)을 거쳐 1515년 사간원사간이 되고, 이어 대사간으로 승진하였다.

이때 신진사류인 담양부사 박상(朴祥)순창군수 김정(金淨) 등이 폐비 신씨(愼氏)의 복위를 상소하자, 이를 강력히 반대하였다. 이어 첨지중추부사홍문관부제학성균관대사성좌승지도승지를 거쳐 1517년에 대사헌이 되었다.

그러나 왕의 신임을 받고 있는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사류로부터 배척을 받아 첨지중추부사로 좌천되자 사직하고 충청도 면천에 내려갔다.

이듬해 병조참의호조참의로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 일파가 실각하자 홍문관부제학이 되고, 이듬해 공조참판에 임명됨과 동시에 대사헌예문관대제학을 겸하였다. 그리고 동지의금부사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도 겸임하였다.

1521년 공조판서가 된 이후 우참찬좌참찬우찬성으로 승진하고, 1524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다시 좌찬성을 거쳐 1527년에는 우의정에 올라 홍문관대제학 등을 겸임하였다.

1530년 『동국여지승람』의 신증(新增)을 책임맡아 끝내고 좌의정이 되었다.

이듬해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전횡을 논박하다가 오히려 그 일파의 반격을 받아 판중추부사로 좌천되고, 이어 1532년 평안도 함종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1537년 김안로 일파가 축출되면서 복관되었다. 문장이 뛰어났으며, 글씨와 그림에도 능하였다. 중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용재집』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定)이었으나 뒤에 문헌(文獻)으로 바뀌었다.

[참고문헌]

燕山君日記
中宗實錄
國朝人物考
新增東國輿地勝覽
國朝榜目

[집필자]

신해순(申解淳)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