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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金淨)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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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원충(元冲)
호(號)충암(冲菴)
호(號)고봉(孤峰)
시호(諡號)문간(文簡)
생년1486(성종 17)
졸년1521(중종 16)
시대조선전기
본관경주(慶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효정(金孝貞)
출신지보은
저서『충암집』

[상세내용]

김정(金淨)
1486년(성종 17)∼1521년(중종 16).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원충(元冲), 호는 충암(冲菴)고봉(孤峰). 보은 출신.

부친은 호조정랑 김효정(金孝貞)이다.

1507년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에 보임되고, 홍문관수찬병조좌랑을 거쳐 정언에 전임되었다. 이어서 병조정랑홍문관부교리헌납홍문관교리이조정랑 등을 거쳐 1514년에 순창군수가 되었다.

이때 왕의 구언(求言)에 응하여 담양부사 박상(朴祥)과 함께 일찍이 중종이 왕후 신씨(愼氏)를 폐출한 처사가 명분에 어긋나는 일이라 하여 신씨의 복위를 주장함과 아울러 신씨폐위의 주모자인 박원종(朴元宗) 등을 추죄(追罪)할 것을 상소하였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보은에 유배되었다.

이때 권민수(權敏手)이행(李荇) 등은 이들을 엄중 치죄할 것을 주장한 반면, 영의정 유순(柳洵) 등은 치죄를 반대했고, 조광조(趙光祖)도 치죄를 주장한 대간의 파직을 주청하였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대간 사이에도 대립이 일어나게 되었고, 둘 다 옳다는 설까지 제기된 바 있었다. 얼마 뒤 그는 박상과 함께 재등용되고, 권민수이행이 파직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는데, 그것은 곧 중앙정계에서의 사림파의 승리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뒤 응교전한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뒤에 사예(司藝)부제학동부승지좌승지이조참판도승지대사헌 등을 거쳐서 형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러한 그의 정치적 성장은 괄목할 정도였는데, 그것은 당시 사림파의 급속한 성장과 긴밀한 관계를 지닌 것이었다.

그뒤 기묘사화로 인해 극형에 처해지게 되었으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등의 옹호로 금산(錦山)에 유배되었다가, 진도를 거쳐 다시 제주도로 옮겨졌다.

그뒤 신사무옥에 연루되어 사림파의 주축인 생존자 6명과 함께 다시 중죄에 처해져 사사되었다.

1545년(인종 1)에 복관되었고, 1646년(인조 24)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3세에 할머니 황씨에게 수학하기 시작하였고 20세 이후에는 최수성(崔壽峸)구수복(具壽福) 등과 성리학의 연구에 몰두하였으며, 관료생활을 하면서도 성리학에 대한 학문정진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또한, 시문에도 능하였을 뿐 아니라 그림에도 능하여 새‧짐승 등을 잘 그렸다. 일찍이 사림세력을 중앙정계에 추천하였고, 조광조의 정치적 성장을 뒤에서 도왔다.

그뒤 조광조와 함께 사림파의 대표적인 존재로서, 그들의 세력기반을 굳히기 위해 현량과(賢良科)의 설치를 적극 주장하기도 하였다.

또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개혁정치를 폈는데, 그 일환으로 미신타파와 향약의 실시, 정국공신의 위훈삭제(僞勳削除) 등을 추진하였다. 제자로는 김봉상(金鳳祥)김고(金顧)최여주(崔汝舟)외에 조카인 김천부(金天富)김천우(金天宇) 등이 있다.

보은상현서원(象賢書院), 청주신항서원(莘巷書院), 제주귤림서원(橘林書院), 금산성곡서원(星谷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충암집』이 있으며, 시호는 처음에는 문정(文貞)이고, 나중에 문간(文簡)으로 고쳐졌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海東名臣傳
國朝人物考
東儒師友錄
己卯諸賢傳
己卯士禍の由來に關する一考察(申奭鎬, 靑丘學叢 20, 1935)
賢良科硏究―士類의 進退 및 그 背景과 관련하여―(李秉烋, 啓明史學 1, 1967)
朝鮮黨爭の起源を論じて士禍との關係に及ぶ(瀨野馬熊, 白鳥記念東洋史論叢, 1925; 瀨野馬熊遺稿, 1936)
The Literati Purges―Political Conflict in Early Yi Korea―(Wagner, E. W., Harvard University Press, 1974)

[집필자]

이병휴(李秉烋)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