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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朴祥)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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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창세(昌世)
호(號)눌재(訥齋)
시호(諡號)문간(文簡)
생년1474(성종 5)
졸년1530(중종 25)
시대조선전기
본관충주(忠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박지흥(朴智興)
외조부서종하(徐宗夏)

[상세내용]

박상(朴祥)
1474년(성종 5)∼1530년(중종 2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창세(昌世), 호는 눌재(訥齋). 진사 박지흥(朴智興)의 아들이며, 모친은 생원 서종하(徐宗夏)의 딸이다.

1496년(연산군 2) 진사가 되고, 1501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로 보임받고, 박사를 역임하였다. 승문원교검(承文院校檢)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병조좌랑을 지내고, 1505년 외직으로 전라도사(全羅都事)를 지냈다.

1506년 중종사간원헌납이 되어 종친들의 중용(重用)을 반대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하옥되었으나, 태학생(太學生)과 재신(宰臣)들의 상소로 풀려나왔다.

그러나 1년 동안 논쟁이 그치지 않으므로 전관(銓官)에게 미움을 사서 한산군수로 좌천되었는데, 사헌부가 대간(臺諫)은 마음대로 외직에 보임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논핵(論劾)하자 곧 종묘서영(宗廟署令)소격서영(昭格署令)으로 옮겼으나, 부모봉양을 위하여 임피현령(臨陂縣令)으로 나아갔다.

3년 만기가 되자 사직하고 광산으로 돌아가 글을 읽으면서 스스로 즐겼다.

1511년(중종 6) 수찬응교를 거쳐 담양부사로 나아갔다.

1515년 순창군수 김정(金淨)과 함께 상소하여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복위를 주장하고, 또한 박원종(朴元宗) 등 3훈신(勳臣)이 임금을 협박하여 국모를 내쫓은 죄를 바로잡기를 청하다가 중종의 노여움을 사서 오림역(烏林驛)으로 유배되었다.

1516년 방면되어, 의빈부도사(儀賓府都事)장악첨정(掌樂僉正)을 역임, 이듬해 순천부사가 되었으나 그해 겨울 어머니의 상으로 사직하였다.

1519년 선공감정(繕工監正) 등을 지냈다.

1521년 상주충주목사를 지내고, 만기가 되자 사도시부정(司䆃寺副正)이 되었다.

1526년 문과중시에 장원하고 이듬해 작은 죄목으로 나주목사로 좌천되었으나, 당국자의 미움을 사서 1529년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 되었으며, 성현(成俔)신광한(申光漢)황정욱(黃廷彧) 등과 함께 서거정(徐居正) 이후 4가(四家)로 칭송된다.

1515년 단경왕후 신씨 복위에 관한 상소는 강상(綱常)을 바로잡은 충언이라고 조광조(趙光祖)가 극구 칭찬하였다.

저서로는 『눌재집』이 있다. 광주(光州)월봉서원(月峰書院)에 제향되었으며, 1688년(숙종 14)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참고문헌]

燕山君日記
中宗實錄
國朝人物考
海東名臣錄
燃藜室記述
訥齋集
冲庵集

[집필자]

이동길(李東吉)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