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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문(成三問)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C131C0BCBB38B1418X0
자(字)근보(謹甫)
호(號)매죽헌(梅竹軒)
시호(諡號)충문(忠文)
생년1418(태종 18)
졸년1456(세조 2)
시대조선전기
본관창녕(昌寧)
활동분야문신 > 문신
성승(成勝)
외조부박첨(朴襜)
출신지충청남도 홍성(洪城)
묘소서울 노량진 사육신 묘역
묘소충청남도 은진
저서『매죽헌집』

[상세내용]

성삼문(成三問)
1. 가계와 관직
증조부는 대제학(大提學) 성석용(成石瑢)이며, 조부는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성달생(成達生)이고, 부친은 도총관(都摠管) 성승(成勝)이며, 모친은 현감 박첨(朴襜)의 딸이다. 딸은 부사 박임경(朴臨卿)의 아내가 되었는데, 외손 박증(朴增)은 은거, 박호(朴壕)는 문과급제 후 중종조에 호조판서를 지냈고, 박한(朴垾)은 별좌를 지냈다.

1438년(세종 20)에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고, 1447년에 문과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집현전학사로 뽑혀 세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으면서 수찬(修撰)직집현전(直集賢殿)으로 올라갔다.

1442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고, 세종의 명에 따라 『예기대문언독(禮記大文諺讀)』을 펴냈다. 세종이 훈민정음 28자를 만들 때에 정인지(鄭麟趾)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이개(李塏) 등과 함께 이를 도왔으며, 특히 신숙주와 같이 명나라 요동을 여러 번 왕래하면서, 그곳에 유배중인 명나라한림학사 황찬(黃瓚)을 만나 음운(音韻)을 질문하였다.

또한, 명나라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가서 음운과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해와서 1446년 9월 29일에 역사적인 훈민정음을 반포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1453년(단종 1) 좌사간으로 있을 때에 수양대군(首陽大君: 뒤의 세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을 죽이고 스스로 정권과 병권을 잡으면서 그 추종자들과 함께 그에게 내린 정난공신(靖難功臣) 3등의 칭호를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다.

1454년에 집현전부제학이 되고, 이어서 예조참의를 거쳐, 1455년에 예방승지가 되었다. 그해 세조가 어린 조카인 단종을 위협, 선위(禪位)를 강요할 때에 그가 국새(國璽)를 끌어안고 통곡을 하니 세조가 그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2. 단종복위 운동
그는 아버지 성승의 은밀한 지시에 따라, 박중림(朴仲林)박팽년유응부(兪應孚)허조(許慥)권자신(權自愼)이개유성원(柳誠源) 등을 포섭해서 단종복위운동을 계획하면서 거사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1456년(세조 2) 6월 1일에 세조가 상왕인 단종과 함께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위한 잔치를 열기로 하자, 그날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그는 거사일 전날에 집현전에서 비밀회의를 열고 그의 아버지 성승유응부박쟁(朴崝) 등 무신들에게는 운검(雲劒)으로 세조의 뒤에 섰다가 세조윤사로(尹師路)권람(權擥)한명회(韓明澮)를, 병조정랑 윤영손(尹鈴孫)에게는 신숙주를 각각 제거하도록 분담을 시켰다.

그 나머지 중신들은 여러 무사들이 나누어 제거하기로 정하였다. 그리고 김질(金礩)에게는 그의 장인인 정창손(鄭昌孫)으로 하여금 상왕복위를 주장하도록 설득하라 하였다.

그러나 당일 아침에 갑자기 연회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운검의 시립이 폐지되자 그날의 거사는 일단 중지되고, 뒷날 세조가 친히 거둥하는 관가(觀稼)때로 미루어졌다. 거사에 차질이 생기자 함께 모의했던 김질이 그의 장인 정창손과 함께 세조에게 밀고를 하였으므로 모의자들이 모두 잡혀갔다.
3. 복위운동의 실패
그는 세조를 가리켜 ‘진사(進賜: 종친에 대한 호칭)’라 호칭하고 떳떳하게 모의사실을 시인하면서 세조가 준 녹(祿)은 창고에 쌓아두었으니 모두 가져가라 하였다. 그는 모진 고문을 당하였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으면서 세조의 불의를 나무라고 또한 신숙주에게도 세종문종의 당부를 배신한 불충을 크게 꾸짖었다. 격노한 세조가 무사를 시켜 쇠를 달구어 그의 다리를 태우고 팔을 잘라냈으나 그는 안색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 사건에 연루되어 문초를 받고 있던 강희안(姜希顔)을 변호해주어 죽음을 면하게 하였다. 그달 8일에 아버지 성승이개하위지(河緯地)박중림김문기(金文起)유응부박쟁 등과 함께 군기감 앞에서 능지처사(凌遲處死)를 당하였다.

그때 동생 성삼빙(成三聘)성삼고(成三顧)성삼성(成三省)과 아들 성맹첨(成孟瞻)성맹년(成孟年)성맹종(成孟終) 및 갓난아이까지 모두 죽음을 당하여 혈손이 끊겼다. 그가 형을 당한 뒤 그의 집을 살펴보니 세조가 준 녹이 고스란히 쌓여 있었을 뿐 가재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며, 방바닥에 거적자리가 깔려 있을 뿐이었다. 부인과 딸이 노비가 되면서 부인 연안김씨가 신주를 만들어 제사하였고, 부인이 죽은 후에는 외손 박호에게 이안되어 외손 봉사하였다. 박호도 아들이 먼저 사망해서 신주를 인왕산에 묻었다. 1672년 신주가 발견되어 송시열 주관하에 홍주 성삼문 구댁으로 모셨고, 1871년 노은서원이 훼철되어 노성에 있는 외손 박증재실로 모셔다가 외손 봉사 한 후, 1903년 성삼문 방손이 봉사손으로 허락을 받아, 현 세종시 성씨집성촌에 문절사를 창건하고 그곳으로 이안하였다.
4. 인품과 학문
그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절신(節臣)으로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국민들의 숭앙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육신의 한 사람일 뿐 아니라, 타고난 자질이 준수하고 문명이 높았으며, 조정의 경연(經筵)과 문한(文翰)을 도맡아 처리하였다.

또한, 그가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에 크게 공헌한 것은 민족문화의 차원에서도 그의 높은 절의에 뒤지지 않는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다. 뒷날 남효온(南孝溫)『추강집(秋江集)』의 육신전에 대의를 위하여 흔연히 죽음의 길을 택한 그의 높은 절의를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고 있다.

1691년(숙종 17) 신원(伸寃)되고, 1758년(영조 34)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791년(정조 15) 단종충신어정배식록(端宗忠臣御定配食錄)에 올랐다.

그의 묘는 서울 노량진 사육신 묘역에 있으나 그의 일지(一肢)를 묻었다는 묘가 충청남도 은진[현재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 산55번지]에도 있다. 장릉(莊陵: 端宗의 능) 충신단(忠臣壇)에 배향되었으며, 영월창절사(彰節祠), 서울 노량진의절사(義節祠), 공주 동학사(東鶴寺)숙모전(肅慕殿)에 제향되었다. 유허(遺墟)는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외가)와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 충곡리(한양말)(별장) 두 곳에 있다. 관직 생활하던 사가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화동 23번지 부근이다.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저서로는 『매죽헌집』이 있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文宗實錄
端宗實錄
世祖實錄
肅宗實錄
正祖實錄
梅竹軒集
莊陵誌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집필자]

이재범(李在範)

명 : "삼문(三問)"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國朝編年v02有全淸次淸全濁次濁不淸不濁之差字雖簡易轉換無窮諸語音文字所不能記者悉通無礙中朝翰林學士黃瓚時謫遼東命三問等見瓚質問音韻凡往來遼東十三度
國朝編年v03三問之字
國朝編年v03翼功臣桂陽君璔世宗第二王子等四十一人○左贊成鄭昌孫與其壻成均司藝金礩密告成三問等謀叛上引礩問其狀對曰三問請見臣臣往見三問曰近日上王開昌德宮北墻往來瑜舊家此必因明澮等獻策也臣曰何也三問曰未知其詳然不過置上王
國朝編年v06考出後領議政柳順汀等啓曰臣等考見實錄昭陵事丙子五月乙巳命左承旨具致寬往義禁府問成三問上王亦與知汝謀乎三問曰知之權自愼告其母適于上王後自愼尹令孫屢進約告期其日朝自愼先詣昌德宮上王賜長刀子致寬又問自愼所答如三
紀年便攷v5已訖退而不仕及我 朝受命慨然曰吾寧爲王氏鬼不作李家臣遂遯于松京之萬壽山中杜門自失潔其身以殁純祖朝贈謚三問守琛運悌元并其商子杜公入杜門洞所改名也崔邇誤載麗忠惠列紀年便攷第四終
紀年便攷v7輕重之殊舌音有反正之别字亦有全清次清全濁次濁不清不濁之差雖無知婦人無不暸然曉之時中朝翰林黃瓚謫遼東命三問䓁見瓚賁問音䪨凢徃返遼東十三度
紀年便攷v7相王無憂矣端宗癸酉入相至領䇿靖難㓛一等封河東府院君靖難日所着襦衣血汗滿裏世祖朝䇿佐翼㓛二等丙子上疏曰三問之謀上王既預知得罪 宗社請早圖以防後患於是上王出居錦城家謂之徳寕府俄遷寕越尋害之固是奸㐫之尤者也己卯
紀年便攷v7刑參文章冲淡筆慕鍾王集賢文學之士如申叔舟崔恒李石亨鄭麟趾等與朴彭年成三問柳誠源李塏河緯地皆擅名一時而三問文瀾豪縦而短於詩緯地長於對䇿䟽章而不知詩誠源天才夙成而其覧不慱塏清穎英發詩亦清絶然濟軰皆推彭年為集大
紀年便攷v7僚曰若等佐賢主致太平三問見故主於地下仍有詩曰撃皷催人命回頭曰欲斜黄泉無一店今夜宿誰家其㓜女随車而哭踊三問曰男必盡死汝女也必生矣其奴泣而上之酒三問俯而飮之有詩曰食人之食衣人衣素志平生莫相違一死固知忠義在 顯
紀年便攷v7慶會楼也三問止之曰徒死無補遂協謀圖復上王丙子事泄被禍闔門皆死時年三十九臨載車顧旧僚曰若等佐賢主致太平三問見故主於地下仍有詩曰撃皷催人命回頭曰欲斜黄泉無一店今夜宿誰家其㓜女随車而哭踊三問曰男必盡死汝女也必生
紀年便攷v7麓二百餘年顯宗壬子戶曹吏嚴義龍偶於仁王山崩崖間甆器中有栗主三箇其一故承㫖成某也其二乃朴壕夫妻也權安子三問外裔進士嚴纘之家弟三顧三聘三省正郞子孟瞻孟年孟終并當年生合七人同被禍
紀年便攷v7쥭어가셔무어시될고니蓬萊山第一峯의落落長松이되여잇셔白雪이滿乾坤졔獨也靑靑리라中原人使題白鷺圖三問即呼曰雪作衣裳玉作趾窺魚蘆渚㡬多時未及作落句翻示後而乃墨鷺圖也應聲曰偶然飛遇山隂墅誤落羲之洗硯池其敏
紀年便攷v7詩曰撃皷催人命回頭曰欲斜黄泉無一店今夜宿誰家其㓜女随車而哭踊三問曰男必盡死汝女也必生矣其奴泣而上之酒三問俯而飮之有詩曰食人之食衣人衣素志平生莫相違一死固知忠義在 顯陵松柏夢依依自乙亥以後祿俸别置一室書某年
紀年便攷v7宗殊遇文宗與之為布衣交世祖受禪以禮房豕㫖抱國壐痛哭世祖方俯伏謙譲舉頭諦視之及莊陵廢朴彭年欲墜慶會楼也三問止之曰徒死無補遂協謀圖復上王丙子事泄被禍闔門皆死時年三十九臨載車顧旧僚曰若等佐賢主致太平三問見故主於
紀年便攷v7自乙亥以後祿俸别置一室書某年某月祿 肅宗辛未復官致祭贈謚忠文英祖戊寅贈吏判○妻金氏為官婢全節金氏自冩三問神主付奴屬祭之及其没而神主歸於外孫朴壕壕亦絶嗣埋之於仁王山麓二百餘年顯宗壬子戶曹吏嚴義龍偶於仁王山崩
紀年便攷v7不許成三問等獄事出是夕妻尹氏獨上楼手持数尺布坐槏下叔舟還家歴搜問其故尹曰君於平曰與成三問軰如兄弟今聞三問等獄事發意君必同死待報至欲自䖏不圖君之生還也叔舟憮然若無所容是年入相至領睿宗朝策翼戴元㓛成宗朝策佐理
紀年便攷v7步至集賢直廬與之問難成三問直殿夜不敢輒解冠帶一日宵刻將半意 鶴駕不出脫衣欲卧忽聞戶外履聲呼謹甫而至三問驚惶顚倒出拜聖學之勤好士之篤誠千古所罕聞性至孝庶務叢劇而嘗葯視膳必身親之夜分侍側不命之退不敢退世宗嗜
紀年便攷v7稍長善屬文甞自書曰人生斯世忠孝為大忠能保國孝能匡世其志所存如此端宗遜位君每燕居涕泣成三問事起 光廟問三問可置之法乎君俯㐲不肯對及錦城事覺鄭麟趾等以上王與知其謀搆誣甚急君即陳䟽力為之辨因此得罪父子俱廢錮卒於
紀年便攷v7世子勿入侍雲劒亦勿入勝佩劒欲入明澮曰己今雲劒勿入勝退欲撃殺明澮等子三問曰世子不来雖殺明澮無益也及事敗三問臨刑上問其黨三問曰彭年等及吾父耳上更問答曰吾父尚不諱况他人乎父子竟被禍六臣復官時同為復官還給田民之在
紀年便攷v7應孚同為雲劒將害上及世子因韓明澮奏世子勿入侍雲劒亦勿入勝佩劒欲入明澮曰己今雲劒勿入勝退欲撃殺明澮等子三問曰世子不来雖殺明澮無益也及事敗三問臨刑上問其黨三問曰彭年等及吾父耳上更問答曰吾父尚不諱况他人乎父子竟
紀年便攷v7勿入勝佩劒欲入明澮曰己今雲劒勿入勝退欲撃殺明澮等子三問曰世子不来雖殺明澮無益也及事敗三問臨刑上問其黨三問曰彭年等及吾父耳上更問答曰吾父尚不諱况他人乎父子竟被禍六臣復官時同為復官還給田民之在連山者贈領相謚文
紀年便攷v7成熺槪子李堅基婿字用晦號仁齋世宗庚午以參軍登科官止校理在集賢殿與三問同心世祖丙子六臣之獄以三問之族為三問五寸叔十次嚴鞫閉口不言籍家產金海圍籬三年後因都承旨蔡壽涷達放還仍
紀年便攷v7三問五寸叔
紀年便攷v7成熺槪子李堅基婿字用晦號仁齋世宗庚午以參軍登科官止校理在集賢殿與三問同心世祖丙子六臣之獄以三問之族為三問五寸叔十次嚴鞫閉口不言籍家產金海圍籬三年後因都承旨蔡壽涷達放還仍悲憤病卒子聃壽見下
紀年便攷v7上王前是時與成勝同為雲劒應孚曰上與世子吾當之其餘君等䖏之旋有世子勿入侍雲劒亦勿入之令應孚猶欲入撃彭年三問固止之曰不如他日俟上與世子同䖏而舉之事成矣應孚曰事貴神速世子雖在本宮謀臣賊子皆從首陽到此今日盡誅此軰
紀年便攷v7此軰將一隊兵入景福宮則世子將安逃乎千載一時不可失也彭年等固止之事泄鞫問曰汝欲何為曰廢足下復故主耳仍顧三問等曰汝等人而無謀何異畜生灼鐵置腹油火並燕顏色不變徐曰欲問情外事問彼竪儒終不服而死初舉謀時衆中奮奏曰誅
紀年便攷v7科歴清州判官官止校理世祖受禪棄官歸墓下托盲不出成三問自洪州泩訪倚醉作詩曰誓將心裏鐵鑄得袖中椎仁文不荅三問曰怖死耶曰仰觀俯察矣一死不足恤終若無益於事貽禍吾君得無為不忠之鬼乎及六臣事發仁文托疾愈堅携小奚托浴溫
紀年便攷v8孚為雲釰彭年䓁欲因此入侍而事舉上従之金礩以同謀見事不諧因其妻父鄭昌孫上變告之於是上出御便殿令武士捽下三問而鞫之三問引朴彭年李塏河緯地柳誠源俞應孚朴崝䓁上曰若䓁何為叛我三問曰欲復舊主耳天下誰有
紀年便攷v8三問
紀年便攷v8曰受禪之時何不沮之三問曰勢不能也吾固知進不能禁退有一死然徒死無益故忍而至此者欲圖後效耳時申叔舟在上前三問叱之曰昔與汝同直集賢殿 英陵抱元孫逍遥步庭中曰寡人千秋萬歲後爾䓁須念此兒言猶在耳汝豈忘之耶不意汝之惡
紀年便攷v8乎進賜方言呼宗親為進賜平日動稱周公周公亦有此事乎三問之為此者天無二日民無二主故也上曰受禪之時何不沮之三問曰勢不能也吾固知進不能禁退有一死然徒死無益故忍而至此者欲圖後效耳時申叔舟在上前三問叱之曰昔與汝同直集
紀年便攷v8時 天使来上欲同上王請宴于昌徳宫三問䓁謀復上王欲以是日舉事約誓已定韓明澮啓廣延殿窄熱請世子勿入侍雲釰亦令勿入時三問父勝與俞應孚為雲釰彭年
紀年便攷v8孫上變告之於是上出御便殿令武士捽下三問而鞫之三問引朴彭年李塏河緯地柳誠源俞應孚朴崝䓁上曰若䓁何為叛我三問曰欲復舊主耳天下誰有
紀年便攷v8不愛其君者乎進賜方言呼宗親為進賜平日動稱周公周公亦有此事乎三問之為此者天無二日民無二主故也上曰受禪之時何不沮之三問曰勢不能也吾固知進不能禁退有一死然徒死無益故忍而
紀年便攷v8賢人也希顏遂得免時誠源在成均館時帶司藝職聞三問事卽還家與妻酌酒飮訣仰卧自刎俄而吏来取屍磔之於是彭年塏三問緯地應孚朴仲林彭年父朴大年蓍年永年引年皆彭年弟權自慎上王外従金文起成勝三問
紀年便攷v8問曰實不知也進賜盡殺 先朝名士而獨有此人不預謀姑留用之此實賢人也希顏遂得免時誠源在成均館時帶司藝職聞三問事卽還家與妻酌酒飮訣仰卧自刎俄而吏来取屍磔之於是彭年塏三問緯地應孚朴仲林彭年父朴大年蓍年永年引年皆彭
紀年便攷v8灼鐡寘腹下油火并煎應孚顏色不變待鐡冷投地曰更使灼熱来時提學姜希顏辭連拷訊不服上以問三問曰希顏知其謀乎三問曰實不知也進賜盡殺 先朝名士而獨有此人不預謀姑留用之此實賢人也希顏遂得免時誠源在成均館時帶司藝職聞三
紀年便攷v8三問
紀年便攷v8年䓁欲因此入侍而事舉上従之金礩以同謀見事不諧因其妻父鄭昌孫上變告之於是上出御便殿令武士捽下三問而鞫之三問引朴彭年李塏河緯地柳誠源俞應孚朴崝䓁上曰若䓁何為叛我三問曰欲復舊主耳天下誰有
紀年便攷v8三問父勝與俞應孚為雲釰彭年䓁欲因此入侍而事舉
紀年便攷v8疏曰三問之謀上王旣預知得罪宗社未可因享上王位號請早以圖防後患
紀年便攷v8見雲釰勿入侍應孚猶欲入撃彭年三問固止之曰非萬全計不如俟他日舉之成事云
紀年便攷v8居正曰詩似韋柳筆兼王趙畫比劉郭才徳兼備真大人也名入畫家筆苑所著有養花錄行于世辭連於成三問獄被鞫上問於三問曰希顏與此謀乎三問曰希顏實不知進賜今日盡殺名士誰與為國上悟而釋之甞於楊州樓院題詩曰有山何䖏不為廬坐對
紀年便攷v8王趙畫比劉郭才徳兼備真大人也名入畫家筆苑所著有養花錄行于世辭連於成三問獄被鞫上問於三問曰希顏與此謀乎三問曰希顏實不知進賜今日盡殺名士誰與為國上悟而釋之甞於楊州樓院題詩曰有山何䖏不為廬坐對青山試一居簮笏十年
東國歷代總目v02獨我國無之遂倣篆籕製二十八字母演作諸字設局禁中使鄭獜趾成三問申叔舟等撰定之時皇朝學士黃鑽以罪謫遼東命三問等往見鑽質問凡往返十三度
東國歷代總目v02乙亥元年皇明代宗景泰六年○丙子成三問等被誅○三問與朴彭年河緯地柳誠源李塏兪應孚等謀復上王事覺而死肅宗大王八年壬戌立六臣祠于露梁十八年壬申賜額
國朝捷錄v01字子修號獨谷昌寧人前第壬午拜領賜几杖文景公汝完子戊寅生三問從曾祖
國朝捷錄v01三問
國朝人物志v1提學諡文肅石瑢子槪文科參判槪子熺字用晦號仁齋文宗庚午文科校理以三問從叔受刑圍籬籍沒家產後放還國朝榜目石璘弟石珚號桑谷文科判書有集行于世諡靖平
國朝人物志v1昌寧人襄惠公達生子武科官都摠管乙亥上禪位勝子三問爲承旨勝時直都摠府送奴政院數問三問三問不答久之起如廁仰天太息曰事畢矣奴還白勝勝
國朝人物志v1人詼諧放浪外若無持守內實堅確世宗製訓民正音時明翰林學士黃瓚謪謫遼東命三問見瓚質問音韻往返者十三東閣雜記常侍經幄啓沃弘多上幸溫泉與朴彭年申叔舟崔恒李
國朝人物志v1上禪位彭年臨慶會樓池欲自隕成三問曰上爲上王我輩且後圖不成死亦未晚彭年從之遂與三問河緯地柳誠源李塏兪應孚等數十人密謀復位尋出爲忠淸監司丙子爲刑曹參判及事覺被鞫對
國朝人物志v1召拜禮曹參判受祿別貯一室而不食丙子事覺上愛其才密諭曰諱之可免緯地不答上親鞫灼刑三問等次及緯地緯地曰旣加我叛逆名則厥罪應誅夫復可問上怒弛灼刑不施與三問等同日死戊寅贈
國朝人物志v1時不可失也彭年等固不可遂止事覺上問汝欲何爲應孚曰欲復故主不幸爲奸人所發復何爲哉顧謂三問等曰人謂書生不足與謀果然向者吾欲試劍汝輩固止之以致今日之禍人而無謀何異畜生卽閉口不言施灼刑顏色
國朝人物志v1武士各主其殺鈴孫主叔舟曾罷雲劍謀中止而鈴孫不之知叔舟就便房沐髮鈴孫按劍欲前三問目止之乃退秋江集與三問同日死莊陵志
國朝人物志v1見問明澮安在曰在闕鞫囚保揮手曰令公殺此人當爲萬古罪人卽拂衣去明澮以聞上鞫之對曰素知三問彭年之爲正人君子故有是言上命轘之仍問此何人左右曰鄭夢周之孫上遽止之曰忠臣之
國朝人物志v1昌寧人父熺字川晦觀察使槪子學識高明世宗庚午文科校理端宗朝國勢危疑與從父兄子三問協輔王室以死生不易其心相勉三問死亦受嚴鞫閉口不言安置金海三年宥歸公州竟以忠憤歿寒
國朝人物志v1章叔號睡翁綾城人判事賢佐子世宗辛酉生員文科集賢殿校理嘗與成三問議出處三問曰吾欲從仕人文曰吾當自廢因忤旨出補寶城投紱歸海美先墓下托靑盲杜門不出一日三問自
國朝人物志v1似韋劉畫似柳郭書兼王趙有才有德眞大人君子丙子六臣之禍辭連栲訊不服上問成三問曰希顏與謀乎三問曰實不知無盡殺名士宜留此用之實賢士也由是免禍丙子錄嘗過楊州樓院詩曰有山何處不爲廬
國朝人物志v1馬對君無乃不可石亨長者信其言捨而製詩三問瞯知之掠其聯爲箋竟占一頭石亨曰此膝不屈於人久矣三問曰我能屈不屈人之膝一時傳爲勝談超授直提學及世祖受禪始遷大司成在集賢殿凡十四年
國朝人物志v1司藝丙子六月礩與妻父左贊成鄭昌孫密告成三問謀反上引礩問其狀對曰三問請見臣往見三問曰近日上王開昌德宮北門往來錦城大君瑜家此必韓明澮等獻策礩曰何也三問曰未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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